숨어있는 역사

칭경기념비에 숨어있는 『고종의 허세와 고단함』

도심 속 전통건축물에 깃든 고종의 허세와 고단함,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세종로사거리에 서면 눈에 띄는 전통건축물이 두 개 있다. 하나는 광화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념비전이다. 광화문이야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전통건축물이지만 기념비전은 제대로 아는 이가 없을 만큼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과연 기념비전이 이처럼 푸대접을 받을 만큼 가치가 없는 것일까? 칭경기념비와 이를 보호하고 있는 기념비전의 숨겨진 이야기와 의미를 찾기 위해 이번에도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동행했다.
칭경기념비 사진
빼어난 전통건축물 ‘기념비전’의 수난
“서울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어서 더 아름답습니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도심 한복판에 대단히 한국적인 전통건축물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서울 주재 한 외국관광청 소장이 우리 문화의 조화로움을 칭찬하면서 한 말이다. 그가 말한 건축물은 사적 제117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高宗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를 보호하고 있는 기념비전이다.
칭경기념비는 고종이 보위에 오른 지 40년, 5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과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기로소는 조선시대에 나이가 많은 임금이나 현직에 있는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지금으로 치면 최상급 경로당에 해당한다. 고종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기로소에 들었는데, 이는 영조가 51세에 기로소에 든 전례에 따른 것이다. 기념비전(紀念碑殿)은 칭경기념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지만 비전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비는 잘 보이지 않고 비전만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러다보니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념비전 안에 비석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그저 건축미가 빼어난 전통건축물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들:'칭경기념비전이 모에요?', 아빠:'고종이 보위에 오르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야~'
칭경기념비 사진
편액에 ‘기념비각’이 아닌 ‘기념비전’이라 되어 있는 것은 건축물의 격을 가렸던 우리의 전통 때문이다.
우리 전통건물의 명칭은 크게 전(殿), 당(堂), 각(閣), 합(閤), 재(齋), 헌(軒), 루(樓), 정(亭) 등 여덟 가지로 구분된다. 전(殿)은 일반적으로 큰 집이나 큰 건물, 또는 임금의 거처나 궁궐을 칭(稱)한다.
궁궐에서도 임금이나 왕비, 대비가 머무는 건물에나 붙일 수 있으며, 세자가 있는 건물에도 전(殿)을 붙일 수 없다. 절에서도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에만 전(殿)을 붙이고, 성균관에서도 공자님을 모신 대성전(大成殿)에만 전(殿)을 붙인다. 하지만 각(閣)은 집, 누각, 궁궐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고종의 어극 40년 기념비’를 보호하는 건축물을 각(閣)이라 하지 않고 전(殿)이라 높여 부르는 것이다.
  • “아들, 저 위에 있는 한자 한번 읽어볼래?”
  • “잘 모르겠는데요.”
  • “기념비전이야. 고종의 아들이자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황태자 때 직접 쓴 글씨야.”
편액뿐 아니라 비문의 제목과 아치문 정면에 새겨진 만세문(萬歲門)이라는 글씨도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이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빼어난 솜씨다. 당시 세간에는 순종이 바보였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는데, 무슨 바보가 글씨를 저처럼 잘 쓰겠는가. 이는 일제나 친일파들이 조선의 마지막 임금을 깎아내리기 위해 퍼뜨린 유언비어일 터다.
기념비전은 우리 고유의 건축양식의 틀이 해체되기 직전에 세워진 건축물 중 하나다. 규모는 작지만 기본적으로 경복궁 근정전의 모양새를 따르고 있다. 이중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건물로, 팔각형의 높은 초석 위에 사방 4개, 그 사이에 각각 2개씩 총 12개 나무기둥이 우뚝 서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공포는 3단으로 구성된 다포식(多包式)이고, 정자 형태인 네모지붕의 추녀가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시원하게 뻗쳐있다. 지붕 꼭대기 종마루에는 돌난간 같은 것이 피뢰침처럼 서 있어 눈길을 끈다.
칭경기념비 사진
일제강점기에 경복궁, 창덕궁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수난을 당했다. 기념비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2년 일제는 지금의 세종로와 신문로, 종로가 엇갈리는 세종로사거리에 있던 황토마루 언덕을 없애고 여기에 광장을 조성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세종로의 길을 틀고, 태평로를 넓히면서 기념비전의 만세문과 담장을 헐었다. 이때 헐린 만세문을 충무로에 살던 한 일본인이 가져가 자기 집의 대문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도 만세문은 그대로 방치돼 있었는데, 6.25전쟁을 겪으면서 일부 파손된 기념비전을 1954년에 보수하면서 찾아와 복원했다. 그나마 담은 사라지고 없어 철제 울타리를 둘렀는데, 옹색하기 이를 데 없다. 제대로 된 복원이라 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 일본인은 과연 만세문을 드나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가 마치 황제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았을까?
다시 제자리를 찾은 만세문은 그 치욕의 역사를 고스란히 몸 안에 품고 있으리라.
잡상과 함께 사라진 국운
칭경기념비를 세운 1902년은 열강의 각축전에서 승리한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국운이 거의 다할 때였다. 설상가상으로 전국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극심한 자연재해에 시달리는 등 나라 안팎으로 몹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고종은 어극 40주년에 대한 일체의 기념행사를 하지 못하게 했고, 대신 칭경기념비의 건립과 기념우표만 발행했다고 한다.
기념비전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비석의 정확한 명칭은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國 大皇帝寶齡望六旬 御極四十年 稱慶紀念碑)’다. 비문은 의정 윤용선이 짓고 글씨는 육군부장 민병석이 썼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부의장을 지내는 등 적극 친일활동을 한 민병석이 칭경기념비의 글씨를 썼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기에는 입맛이 자못 씁쓸하다.
비문에는 서(序)와 송(頌)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하늘에 제사 올리고 황제(皇帝)가 되었고,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이라 하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한 사실’과 ‘1902년이 황제가 등극한 지 40년이자 보령이 망육순(51세)이 되는 해이므로 기로소에 든 사실’을 기념하여 비석을 세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보령은 임금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말로 보력(寶曆), 보산(寶算)이라고도 한다. 망육순(望六旬)은 말 그대로 50세를 넘어 60세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칭경기념비 사진
기념비 사방에는 돌난간이 둘려 있는데, 연잎과 연꽃을 새긴 동자기둥 위에 방위에 따라 사신(四神)과 십이지신(十二支神)을 조각하여 배치했다. 동쪽에는 용-호랑이-호랑이-용을, 서쪽에는 호랑이-닭-닭-해치를, 문이 있는 북쪽에는 해치-쥐-쥐-해치를, 정문인 남쪽에는 해치-주작-주작-해치를 서로 마주보게 배치했다.

특이한 것은 돌난간 모서리에 현무를 배치한 것이다. 언뜻 볼 때는 장수를 뜻하는 거북으로 생각했는데, 자료를 검토하다보니 그건 현무(玄武)였다. 현무는 생명의 끝, 곧 죽음을 알리는 북쪽의 수호신이다. 순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의 머리말에서 쓴 다음 널리 알려진 말이다. 하지만 유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2권에서 정정하고 보완한 대로, 이 구절은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인 유한준이 당시 특별한 것을 모으는 취미를 가진 김광국의 화첩에 부친 발문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에서 인용한 것이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하나를 알면 하나를 더 사랑하게 되고, 둘을 알면 둘이 더 보이며, 셋을 알면 다른 셋이나 넷에 눈을 뜬다. 지식과 경험은 쌓이면 생각하는 힘이 생기고, 생각의 힘은 지혜의 눈을 갖게 한다.

기념비전의 남쪽에 있는 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다. 문의 가운데 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한자로 ‘萬歲門(만세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만세문의 편액 위에 난간을 받치는 연잎 모양의 동자기둥을 본떠 만든 대좌 위에 주작(朱雀)을 조각하여 놓았다. 문기둥에는 앞면에 당초문을 새기고 위쪽에 들짐승을, 앞에는 해치(태)를 배치했다. 태극문양이 선명한 중앙철문과 양 옆에 보조 철문이 설치되어 있다.
  • “철문에 태극문양이 있네. 오른쪽 위에 있는 게 뭔지 알아?”
  • “도깨비 같은데요.”
  • “귀면(鬼面)이라는 거야. 보통은 기와나 돌기둥에 많은데, 특이하게도 철문에 있네.”
귀면은 툭 튀어나온 눈. 뾰족한 송곳니에 찢어질 듯 벌어진 입, 산발한 머리칼 등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빌려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겠다”는 벽사구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돌난간의 사신도나 건물 지붕의 잡상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1904년에 찍은 사진에는 기념비전의 지붕에도 잡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귀면과 철문의 태극문양 사진
힘없는 나라 왕의 허세와 고단함
고종 집권기는 1876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 체결,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1894년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경장,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1896년 아관파천 등 자본주의 열강의 침입, 특히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 급박한 시기였다.

고종도 열강의 침입에 자주국임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라 칭했으며, 광무개혁을 실시했다. 하지만 외국군대가 우리 땅에서 전쟁을 벌이고,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는 결국 허장성세(虛張聲勢)일 수밖에 없다.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를 보면서 멋진 전통건축물이라는 외면 뒤에 힘이 없는 나라 왕의 허세와 고단함을 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떤 시대를 닮아가고 있는가?

좋은 것은 본받고, 잘못된 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배운다.
오늘 광화문에서 배운 역사가 동행한 아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기를 바란다면 너무 과한 욕심일까.
광화문 칭경기념비 사진
김정수(시인)
사진
김정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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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0-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