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비슷하다고 같은 것은 아니다 - 허삼관(매혈기)

'비슷하다고 같은 것은 아니다 허삼관 (매혈기)
영화는 흥행으로 말한다. 그 기준으로 보면 배우 하정우가 용기 있게 두 번째 메가폰을 잡은 영화 <허삼관>은 실패다. 관객 100만 명에도 못 미쳤으니, 시쳇말로 극장 상영에서 반 본전(순제작비 70억 원)도 못 건졌다.
작품성이 뛰어나도 흥행에 실패하는 영화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허삼관>을 두고 이 말을 할 수는 없다. 인상적인 한 두 장면을 제외하고 구성은 성기고, 연기는 어색하고, 감정은 겉돈다. 좋은 원작이 곧 좋은 영화를 낳는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흠이 뜻밖의 결과를 낳은 것도 아니니 그리 애석할 일은 아니다.
영화 <허삼관>은 작품 안팎에서 실패의 요인을 안고 있었다. 먼저 바깥 이야기부터 해보자. 영화의 콘셉트와 마케팅 전략이다.
<허삼관>은 감동이란 뒷말을 달기는 했지만 코믹을 지향했다. 그 기둥은 ‘씨’가 다른 아이를 아들로 키우는 한 남자(허삼관)의 상황과 그 남자의 캐릭터이다. 그것은 포스터, 홍보물, 광고에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관객도 배우도 그 코믹이 마치 어딘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스멀스멀 어색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날카로운 풍자를 담은 블랙코미디도 아니다. 코미디도, 드라마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 차라리 코믹 뒤에 붙인 '휴먼 드라마'만 작심하고 붙잡고 나아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영화 내내 남는다. 특히 일락이 보여준 눈물과 용기와 순수를 보면.
허삼관의 한장면
본격적으로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자. 우선 허삼관(하정우)과 그의 아내 허옥란(하지원)의 캐릭터가 일종의 시대극, 독특한 가족극의 주인공들로는 너무 평범하다.
자연히 감정도 빛깔이 없다. 허삼관은 그 시대(1950년대) 가난한 가장이고, 아내 허옥란 역시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다. 더욱 의아한 것은 11년간 남의 자식을 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허삼관이 보여준 반응이다. 허옥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허풍스러운 인물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정서는 아니다. 쉽사리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웃음을 의식한 것이라면 잘못 생각한 선택이고, 원작을 의식한 것이라면 너무나 소심한 결정이다.
원작인 중국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의 허삼관은 얼핏 보면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영화보다 10년 전인 1940년대 후반 중국의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없는 남자이다. 성 마르고, 가볍고, 때론 고집도 부리지만, 줏대 없이 남 따라 하고, 남의 씨를 아들로 키우고 있어 사람들로부터 가장 심한 욕인 ‘자라대가리’(무능하고 바보 같은 놈)란 욕을 듣고 사는 남자이다. 그의 행동거지, 윤리관, 가치관이 우리에게 다소 이질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는 한국인도, 한국에서 사는 사람도 아니니까.
허삼관의 한장면-2
별난 것 같지만, 나와 다른 것 같지만 결국은 같은 사람, 그가 소설 속의 허삼관이다
잠시다. 소설을 읽다보면 금세 그의 매력에 빠진다. 그 역시 바로 우리가 말하는 평범함에서 온다. 여기에서 평범함은 진부함이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 ‘언젠가 나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 사람, 누구도 쉽게 팽개칠 수 없는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가치관들이다. 이를테면 기른 정(情),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자식과 아내 심지어 남의 ‘씨‘ 라고 미워하며 국수도 사 주지 않던 일락이를 위해 ’피‘까지 판 돈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희생과 같은 시대와 장소와 인종을 초월한 변할 수 없는, 삶의 아름다움과 감동들이다.

작가 위화는 이를 오래도록 버리지 못하고 간직해온 미련, 기억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 기억을 통해 다른 사람들 로 하여금 지나간 삶을 추억하게 했고, 그 삶을 다시 한 번 살도록 해주었다. 별난 것 같지만, 나와 다른 것같지만 결국은 같은 사람, 그가 소설 속의 허삼관이다. 1,000만 명 이상이 보고 눈물을 흘린 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의 덕수(황정민)도 그와 다르지 않다.
어정쩡한 선택은 캐릭터와 정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대도 혼란스럽다. 거리와 간판, 사람들의 모습은 분명 1950년대 작은 소도시인데 처음에는 중국으로 착각할 만큼 헛갈린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그 혼돈이 해소되기는 하지만 그 냄새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이 또한 원작 탓이라고 할 것인가. 귤이 회수를 그냥 건너면 탱자가 된다. 기후가 다르고 토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허삼관도 서해를 건너, 10년의 시대를 건너뛰어 한국에 왔다. 한국의 기후와 토양에 맞게 개량을 하지 않았으니 역시 ‘탱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업자득이다. 영화 <허삼관>은 중요한 두 가지를 소홀히 취급했다. 하나는 영화 제목이 말해주듯 '매혈기’이고, 하나는 '역사'(사건)이다.
50대 이상은 기억하겠지만, 허삼관이 살았던 시대에 중국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매혈’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피는 허삼관의 말처럼 “몸속의 피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인간의 마지막 생존수단이자, 자신의 ‘조상’이자 ‘뿌리’이다.
때문에 허삼관의 매혈 행위는 곧 자신의 힘과 조상의 맥을 파는 행위이다. 그래서 일락이가 동네 아이를 돌로 때려 물어줘야 할 입원비 때문에 피를 팔고 온 허삼관에게 허옥란이 “몸은 자기 것이지만 피는 조상님 거라구요. 당신은 조상을 팔아먹은 거라구요" 라고 소리를 친 것이다. 허삼관이 처음에 매혈로 받은 돈을 피가 다른 일락에게는 한 푼도 쓰지 않으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 시대 중국에서 매혈은 삶의 고비와 위기 때마다 조상을 팔아서라도 가족을 살리는 최후의 수단이자, 가장 비참한 선택 이었다. 매혈은 소설의 큰 줄기이자, 이야기와 가족을 끌고 가는 수레인 셈이다. 위화가 굳이 제목을 ‘허삼관 매혈기’로 단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 <허삼관>에서의 매혈은 그런 의미도, 비중도 뚜렷하게 찾아볼 수 없다. 허삼관에게 매혈은 그렇게 절박하지도, 대단한 최후의 수단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일락의 병원비를 위해 허삼관이 연이어 매혈을 하는 것도, 소설과 같지만 그러기에는 한국이란 좁은 땅덩어리, 1960년대 초반에서 정지해버린 시간이 설득력을 잃게 만들었다. 결국 허옥란이 장기이식으로 일락이의 병원비를 마련한 것에서 보듯, 허삼관의 매혈이 아버지의 절박한 심정으로만 남아버리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소설은 허삼관이 예순의 나이까지 이야기를 이어간다. 피를 팔아 살아가는 한 작은 도시의 가난한 남자와 그의 가족연대기에 불과하고, 단순한 에피소드들의 아기자기한 나열에 불과해 전혀 무관할 것 같았던 시대의 물결과 역사도 어김없이 그들에게 밀려들고, 그것에 의해 소설 『허삼관 매혈기』는 시대성과 사회성을 얻는다. 그야말로 이름 없는 민초에 불과한 허삼관과 그의 가족들에게 문화대혁명과 하방은 기회가 아니라 질곡이다. 아이들은 뿔뿔이 농촌으로 흩어지고, 일락은 병에 걸리고, 허옥란은 '화냥년'으로 손가락질 당하며 삭발을 당하고 거리에 내몰리는 수모와 아픔을 겪게 만든다.
소설 『허삼관 매혈기』가 명작으로 꼽히는 이유는, 비록 허구이지만 그 역사의 소용돌이가 그들을 겉돌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시련을 안기면서도 삶의 소중한 것들을 더욱 살찌도록 만들고, 가족이 서로 화해하고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게 만든작가의 솜씨 덕분이기도 하다.
소설 허삼관 매혈기
△ 소설 『허삼관 매혈기』
몸이 아픈 채 농촌으로 돌아가는 ‘씨’가 다른 아들 일락에게 자신의 피 판 돈을 몰래 주는 허삼관, 길거리에 내몰린 아내 허옥란에게 줄 밥통 밑바닥에 반찬을 숨겨 갖고 가는 허삼관에게 누가 ‘자라대가리’라고 욕할 것인가. 소설 속의 허삼관이 비록 서해 건너 한물간 인간이지만 한없이 따뜻하고, 인정 넘치고, 비슷한 시대를 산 우리들의 아버지와 다름없이 <국제시장>의 덕수만큼이나 흐뭇한 미소와 함께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영화 <허삼관>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생략과 소홀과 단축과 단순한 보망으로 그것을 스스로 잃어버렸다. 돼지 간볶음을 순대로, 국수를 만두로, 간염을 뇌염으로, 상해를 서울로 바꾸기만 하면 귤이 그대로 귤로 남는 것은 아니다. 시대와 시간의 생략과 단축, 중요한 이야기의 모티브의 포기,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부족과 내면화하지 못한 배우들의 연기로는 영화가 소설처럼 될 수는 없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덕수 같은 우리의 아버지를 결코 만날 수 없다.
우리의 역사와 인물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는 정서의 차이라고 말하지 말라. 원작의 무게에 짓눌려서라는 변명도 구차하다. 그것이 어설픈 흉내내기를 합리화 할 수는 없다. 흉내내기는 비슷한 것이지 같은 것은 아니다.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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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5-1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