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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예술의 풍경

천재 가수를 내어라

근대 예술의 풍경 2015.08.03 제 06호 천재 가수를 내어라 근대, 대중가요 가수 선발대회의 현장속으로
한동안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2009년, <슈퍼스타 K1>을 시작으로 해서 2012년에 <슈퍼스타 K4>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고, 케이블 방송에서 시작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정규 방송으로 넘어가면서 유사한 많은 프로그램이 양산되었다. 2013년 1월 현재, <내 인생의 마지막 오디션>, <위대한 탄생3>, 등이 방영되었거나 방영 중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그 ‘경연’의 성격으로 인해 보는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곤 한다. 하지만 과도한 경쟁이 낳은 부작용에 주목하면서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과 우려의 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신자유주의가 낳은 병폐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경연을 통해 대중가요 가수가 되고 스타가 되는 것이 단지 오늘날만의 일일까?
그 모습은 조금 다를지라도 대중가요 현장에서 경연은 초창기 때부터 있어 왔으니, 이제 근대 대중가요 가수 선발대회 현장의 풍경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일제강점기에 가수로 활동한 고복수, 조금자, 진방남, 백난아, 정일경, 김영춘 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짐작했을지 모르겠으나, 모두 가수 선발대회 출신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콜럼비아나 태평 등의 음반 회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와 매일신보 등의 신문사가 후원한 가수 선발대회가 열리곤 했다. 주로 ‘전국 음악 콩쿠르’라 명명된 이 가수 선발대회는 오늘날의 오디션 프로그램과 유사하다. 전국에서 지역 예선을 거쳐 선발된 예비 가수들이 모여 본선을 치루고, 결선에서 상을 받은 사람들이 가수로 데뷔하는 수순을 밟았던 것이다.
아마도 가장 처음으로 열린 대중가요 가수 선발대회는 1933년 10월, 콜럼비아 회사가 전국을 순회하면서 열었던 대회일 것이다. 콜럼비아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이 대회는 서울을 시작으로 하여 평양, 신의주, 함흥, 원산, 부산, 대구, 군산, 청주 등 10개 도시에서 각 지역별로 3명 정도의 가수를 선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17일, 소공동 하세가와공회당(長谷川公會堂-현 서울 상공회의소)에서 최종 결선 대회를 실시했다. ‘대중적 명가수 선발 음악 대회’ 내지는 ‘천재 가수 선발대회’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대회의 심사위원으로는 이화여자 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의 메리 영,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의 현제명,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의 여동생인 윤성덕이 참여했다. 참가자는 지정곡 1곡과 자신이 선택한 자유곡을 불러야 했는데, 이 대회에서 입선하면 콜럼비아 전속 가수가 되는 것은 물론 일본 송죽(松竹) 키네마 전속 배우로 초빙될 것이라 광고하기도 했다.
《명가수 선발 음악대회 광고》
성황리에 끝난 이 대회에서 1등은 전남 대표로 출전한 정일경, 2등은 경남 대표 고복수, 마지막으로 3등은 함북 대표로 간도에서 온 조금자였다.
1934년 3월 13일, 정일경과 조금자는 라디오에서 생방송으로 노래를 하기도 했는데, 이때 1934년 5월 발매 예정곡인 「섬색시」와 「이별 설워」 등을 선보였다. 입선한 여가수들이 바로 활동을 시작했던 것과 달리, 고복수는 이미 콜럼비아 회사의 간판스타였던 채규엽과 강홍식 등의 그늘에 가려져 별 활동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오케 회사의 이철에게 발탁되었고, 이후 「타향살이 (원제목은 타향)」로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고복수는 스타 가수의 반열에 올랐었다.
왼쪽부터 마이크로폰 앞에 선 정일경(左)과 조금자(右) (1934년),
정일경과 조금자의 라디오 방송 출연 「동아일보」 1934.03.13
오케 회사 전속 가수 시절의 고복수(1936년)
이른바 서양 고전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대중 가수 선발대회의 심사위원으로 나선 것은, 1930년대 초반대중음악계의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때는 아직 온전하게 대중음악계가 자리를 잡기 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수 선발대회’가 대중가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경성 방송국은 이 대회를 중계 방송하기도 했다. 게다가 대회의 규모나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만 보더라도 가수에 대한 당대인의 열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가수 선발대회는 신종 직업인 직업 가수가 등장하는데도 일조했으며, 이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012년 3월 26일에 타계한 반야월(본명 박창오) 선생님도 가수 선발대회에서 입선하여 가수로 데뷔한 경우에 해당한다. 박창오는 1939년에 태평레코드와 조선일보가 공동 주최한 전국 음악 콩쿠르를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 1939년 7월 29일 김천극장에서 열린 가수 선발대회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온 사람에서부터 함경도 부령, 청진 등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각지에서 온 수백 명을 대상으로 2일 간에 걸쳐 예선과 결선을 치렀는데, 참가비는 3원이었다고 한다. 함께 출전했던 친구가 예선에서 떨어진 것과 달리 박창오는 결선에 진출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작곡자 전기현과 작사자 천아토였으며, 결선 진출자는 지정곡인 채규엽의 「북국 오천 킬로」와 자유곡 1곡을 불러야 했다. 결선 전날 밤에 불이 나는 꿈을 꿨던 박창오는 이 대회에서 1등을 했다. 하지만 대회가 끝난 직후, 자유곡으로 불렀던 「춘몽」의 가사가 불순하다는 이유로 순사에게 끌려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는 ‘진방남(秦芳男)’이란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하면서 「불효자는 웁니다」 등의 노래로 인기를 얻었고, ‘반야월’이라는 예명으로 광복 이후까지 수많은 대중가요 가사를 남기기도 했다.
태평 레코드 시절의 가수 진방남
<불효자는 웁니다>의 광고 「동아일보」 1940.07.18
이처럼 광복 이전까지 크고 작은 가수 선발대회가 많이 열렸고, 이러한 가수 선발대회를 통해 가수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있었다.
조선일보 1940년 4월 25일자에는 「가수 선발 콩쿨과 컴머-샬리즘」이라는 기사가 실렸었다. 이 기사에서는 “콩쿠르 참가자가 3원의 참가비를 내야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참가자가 해당 회사의 레코드 2장을 사야만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동기가 불순하며, 너무나 상업적이고 교활한 행위”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모든 일에는 음지와 양지가 함께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떤 일이든지 맨 처음의 의욕적이고도 순수한 의도를 상실하면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근대 대중가요 가수 선발대회를 통해 당시 음반 회사의 상업주의와 상술, 가수에 대한 대중의 열망, 그리고 가수 선발대회의 열기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왜냐 하면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데스)’에게 있어, 경연과 경쟁을 통한 재미의 추구는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또한 노래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열망은 참으로 오래고도 질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계할 것은 경연 자체가 아니라 과도한 경쟁과 지나친 상술로 인한 부작용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다.
장유정_단국대학교 교양기초교육원 교수. 1972년생논문 「한국 근대 만화의 전개와 문화적 의미」 등저서 「오빠는 풍각쟁이야-대중가요로 본 근대의 풍경」 「다방과 카페, 모던보이의 아지트 「근대 대중가요의 지속과 변모」 「근대 대중가요의 매체와 문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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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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