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만화, 붓 가는 대로 그리다

 근대 예술의 풍경 2015.06.26 제 05호 만화, 붓 가는 대로 그리다
아이들이 낙서해놓은 것 같은 이 그림은 당대 가장 유명했던 스타들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1937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것으로, 기사의 제목은 「만화로 본 스타」이다.
위에서부터 에드와-드 지 로빈슨, 챌리 채프린, 죠지 알리스, 안 하딩, 올리바 하디와 스탄 로렐, 찰스 라프톤, 찌미 쥬렌트, 모리스 세발리, 샐리 템플 등 총 14명의 영화배우들이 그려져 있다.

펜 혹을 몇 번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 같은 이 만화는 대상의 전체를 간소화한 캐리커처이다. 상당히 압축된 캐리커처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는 “사진 이상으로 더 적확(適確)하게 누구인지 알게 된다”고 쓰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이 배우들의 캐리커처를 그들의 출연작품과 비교해 보면 만화가의 기발함에 무릎을 칠 것이다. 이는 바로 배우들이 가진 그들만의 개성이 만화 안에 잘 부각되기 때문이다. 연재만화처럼 이야기(story)를 가지거나 정치만평처럼 정세(政勢)에 대한 분석과 판단력을 바탕으로 할 필요는 없지만, 이처럼 대상의 특징을 잘 포착해 구현하기만 해도 그것은 만화로 충분했다. 여기에 관한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
1937년 동아일보 만화로 본 스타
(……) 고리대금업 송공우(宋孔雨)(49,假名)는 원래 빈한한 살림을 하다가 요지음 고리대금업을 시작한 후 차차 재산이 늘어 지금은 수 십 만원 재산을 이루고 소위 겸이포 사회에는 유지라는 명칭을 듣고 잇든 바 지난 단오가절인 오월오일에 겸이포시민 주최로 각히대회가 열리엇든 바 송씨도 역시 대회역원으로 잇엇다한다. 그런데 같은 역원으로 잇든 김봉성(金鳳先)(26), 김강상(金江三)(28)(가명) 양인이 송씨에 난후로 처음 입는 양복이 몸에 붓지 안코 퍽으나 서툴러 보이는게 너무도 우수어서 송씨의 양복입은 모양을 만화로 모사하야 일반 관중에게 배부코자 회장에게 검열을 맛고자 가지고 왓스나 회장이 승인치 안흐므로 그대로 찌저 버리고 말엇다한다. 이제 그 내용을 알게 된 송씨는 극도로 분노한 남아지 자기 부하로 잇는 사람 삼십 여 명을 인솔하야 가지고 전기 김봉선, 김강삼 양인이 돌아오는 길가에 매복하얏다가 때마침 지나가는 양인을 포위습격하고 폭행을 가하얏다.

「醜貌 그렷다고 漫畵家 亂打」, 동아일보, 1937년 7월 8일
1937년 황해도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만화로 그렸다하여 삼십 여 명의 폭력단을 동원해서 만화를 그린 사람을 폭행하고 1개월 이상의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만화의 대상이 된 송씨는 극도로 분노했고, 씨름대회의 회장은 참석자들에게 만화를 배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런데 두 청년에게 송씨를 소재로 하여 만화를 그리게 한 동인. 그것은 바로 “송씨가 양복이 몸에 붓지 않고 퍽으나 서툴러 보이는게 우수어서”였다. 그를 그린 두 청년은 송씨의 모습이 만화의 소재로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터이다. 한편 만화의 대상이 된 송씨는 우스꽝스럽게 과장된 자신의 모습에 모멸감을 느꼈던 것이고, 빈한한 살림살이를 벗어나 이제 막 지역 유지 대접을 받던 자신의 명예가 실추됐다고 여겼을 것이다. 게다가 이 만화를 “추모(醜貌)”라는 부제로 표기한 기사만 보아도 그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위의 두 기사는 ‘만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당대인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우스꽝스럽고 과장적이며 넌센스한 (대상에 대한) 희화”. 이것이 1930년대 당대인들이 생각하는 만화였다. 특히 이 만화라는 것은 청년들이 송씨를 그렸던 것처럼, 특별한 기술이나 예술적 안목 없이도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식민지 시기에도 만화가는 엄연히 존재했다. 대부분은 화가나 삽화가를 겸업하기도 했지만 만화가로서의 자의식을 고민하던 흔적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일찌감치 「만화 그리는 법」이 잡지에 연재되기도 했으며, 작가들 사이에서는 일본에서 건너온 만화이론 서적들이 유통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만화라는 것이 반드시 만화 그리는 기법과 정석이 구현되고 하나의 형태가 완성될 필요는 없었다. 만화의 “만(漫)” 자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이것저것 되는 대로” 그려도 무방했다.
「漫」 字의 眞意義는 「自由無檢制」에 있다. 思想으로 形式으로 가장 자유로워서, 어떠한 命令에 屈服치아니하고, 또 어떠한 法則에도 매이지 아니한 거기에 「漫」 字 의 생명이 있고 「漫」 字의 진면목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漫畵란 것은 繪畵上의 異端者요, 漫文이란 것은 文學上의 放浪兒이다. 그것들이 正統의 法則을 벗어난 者이기 때문에, 또 본래의 規度를 버린 者이기 때문에 그것은 禮義와 道德을 삼가지 아니한다…….

- 이은상, 「漫」이란 것」, 『만화만문』, 1938년 7월 1일
이은상은 “만(漫)”의 개념을 통해 어떠한 형식과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형식성으로부터 만화와 만문의 자유로움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비단 이은상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이 “만(漫)”은 무규칙성, 무형식성, 제한이 없다, 자유롭다와 같은 수사적 표현들을 동원하기 일쑤였고, 만화는 이러한 수사들에 가장 어울리는 양식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만화는 1930년을 전후해 유행했던 유머, 넌센스라는 단어와 교착하게 되었고 넌센스 자체가 만화의 속성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1931년에 게재된 「모던신어(新語)사전」에 따르면 넌센스란, “에로와 결합하여 자본주의 말기세상의 일단(一端)을 표현시키는 무의미하고 못난 소리, 허튼수작의 풍자문학”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만화와 넌센스의 만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1930년대를 즈음해 외래에서 들어온 에로, 그로, 넌센스는 대중으로 하여금 흥미를 유도하려는 잡지들에 의해 양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식민지 조선의 문화의 한 양상으로 정착되었으며, 만화는 이러한 대중적 욕망을 담아내면서 점점 통속화되었다.
그림1 1929년 학생 안석영, 「新入生二態」 그림2 1933년 신여성 에로狂과 ㅽㅏ나나
당시의 에로 열기를 한 컷 안에 담아 에로틱한 시선이 돌출된 근대의 풍경을 그린 만화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시골양반들이 서울구경 와서 마네킹 다리 앞에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도회인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풍경을 담은 만화(《신동아》, 1935년 6월호), 여성선전시대가 오면 모던-걸들의 옷이 간략해지면서 육체미가 발휘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출한 만화(조선일보, 1930년 1월 14일), 그리고 그림 ①에서처럼 이제 갓 서울로 상경한 신입생이 누드화가 그려진 브로마이드에 넋이 빠져 영어 습자책을 사야할 돈으로 누드화를 살 생각부터 하는 만화는 오히려 얌전한 편에 속했다.
웃옷을 벗고 권투에 열중하는 선수를 보고 에로틱한 상상을 하는 만화(「에로이야기」, 《신동아》 59호, 1933년 5월호)는 에로틱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두 명의 레슬링 선수가 포개져 있어 마치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듯한 장면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핸드폰 광고를 연상케 한다. 또한 바나나 껍질을 벗긴 후 “나체미(裸?美)”를 연상하며 바나나를 한 번에 꿀떡 삼켜버리는 “에로狂”의 “색향(色香)”(그림②)은 누드화를 바라보는 학생의 시선보다 농후하고 은밀하다.
이러한 “에로”의 열기는 인쇄 문화나 문자 문화에 익숙한 상류계층이나 학생들이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에로를 넘어서 엽기적 “그로”를 추구하기에 이른다.

「아이구 모가지야!」에서는 강도가 여성의 그림자에서 목을 따서 도망치거나(그림③), 「여자와 가방」에서는 기차역에서 어느 여자로부터 가방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남자가 순사의 검문에 걸려 가방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죽은 어린애가 있었다는 내용이 그려지기도 했으며 李靑田, 「여자와 가방」에서는 강도에게 총을 맞아 피살된 사나이가 웃으면서 죽은 것은 간지럼을 타는 성격이기 때문으로 만화에서는 죽음마저도 희화된다. 이러한 만화들은 다소 그로테스크하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만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만화론」을 쓴 강한인은 만화(Punch)가 “그로테스크하고 넌센스 미(味)를 가진 풍속화로써 발생”한 것으로 파악했고, 1930년대 만화계를 이끌었던 최영수 역시 만화는 “어떠한 권리의 구속이나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자유 관찰에 의한 자유표현”이며, 이로 인해 “비귀족적이며 비형식적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같이 만화의 무형식성에서 오는 자유로움과 비규정성이 주는 해방감이 대중으로부터 만화에 대한 거리감을 줄여준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만화는 누구나 쉽게 접하고 그릴 수 있는 대중적인 매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4. 그림3. 인스피레이숀 아이구목아지야, 신여성 59호) 1932년 신동아 李靑田, 여자와 가방
서은영_평론가, 백석대학교 강사. 1976년생
논문 「한국 근대 만화의 전개와 문화적 의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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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7-03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