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옛 광고가 들려주는 사연들

 근대 예술의 풍경 2015.05.22 제 05호 옛 광고가 들려주는 사연들
자본주의 예술의 꽃. 광고를 가리키는 흔한 수사다. 우선 그 화려함을 가리키는 말이겠는데 광고를 보노라면 눈이 돌아가고 귀가 먹먹하다. 돈과 기술, 감성의 집약체인 광고는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채우고 있다.
무엇보다 광고는 자본주의를 먹여 살린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예술이다. 광고가 직접 욕망을 자극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물자와 물자에 대한 욕망이 끊임없이 생산될 수 있나.

물론 이 말은 과장되었다. 욕망은 만족하지 않으므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욕망을 부추기는 대상은 광고 말고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소비하라고, 그럼으로써 당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메시지만을 반복하는, 그것도 무척이나 즐겁도록 종용하는 매체는 광고 이외에 없다.
자본주의 예술의 꽃 광고
눈만 돌리면 광고와 부딪친다. 한국의 도시 인구는 90%를 넘었고 도시인들은 광고 속에 산다. 나머지 10%, 그러니까 행정 구역상 면이나 리(里) 단위에 사는 사람들의 풍경은 좀 다를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접속하는 텔레비전 속 세상은 동일하고 휴대용 복합기기(스마트폰) 속 세상은 다르지 않다.
언제부터 광고가 득세했을까. 소설가 이태준이 1937년에 쓴 단편 ?장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굳이 버스의 뒤를 보지 않으려, 그 얄미운 버스 뒤에다 광고를 낸 어떤 상품의 이름 하나를 기억해야 할 의무를 가지지 않으려 다른 데로 눈을 피한다." 버스 꽁무니에 붙은 광고가 보기 싫어서, 정확히 말하자면 광고를 '기억해야 할 의무'를 피하고자 소설의 주인공은 눈을 돌린단다. 80년 전에 나온 소설 속 풍경이 낯설지 않다. 물론 당대 대다수 농촌 마을의 풍경이 아니라 서울의 이야기이고 대도시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나는 굳이 버스의 뒤를 보지 않으려, 그 얄미운 버스 뒤에다 광고를 낸
어떤 상품의 이름 하나를 기억해야 할 의무를 가지지 않으려
다른 데로 눈을 피한다."

- 이태준, 단편 장마 中 -
옛날엔 광고라 하면 간판이나 전광판 같은 옥외광고를 가리켰다. 신문이나 잡지가 최첨단 매체였으므로 이들 매체에 실린 광고보다는 길거리 광고가 보다 친숙하게 여겨졌던 탓이다.
물론 문맹률도 높았고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인쇄 매체의 구독자는 상층 엘리트였던 때다. 라디오는 있었지만 광고는 하지 않았던 때, 텔레비전이라는 진기한 물건이 잡지에 소개되기도 했지만 실제로 선보인 것은 1950년대 들어서였다. 신문과 잡지가 반짝반짝하는 새로운 매체였을 때 이들 매체에 실린 광고는 그렇다면,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사실 신문은 태동하면서부터 광고와 함께 했다. 최초의 민간신문이었던 《독립신문》(1896~1899년)은 신문 지면의 절반 이상을 광고로 채우기도 했다. 독립신문의 창간자였던 서재필은 교육자이며 정치가, 독립운동가로 역사에 남아있는데 광고의 필요성을 자각한 선구적인 인물로도 기록되어 있다. 광고 수입을 꾀하지 않고서는 신문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신문사의 만성적인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광고를 적극 유치하려고 했다.
잡지 광고는 신문 광고보다 늦다. 잡지 광고는 신문 광고에 비해 분량도 적지만 그래도 그나마 광고가 많은 《조광(朝光)》(1935~1944년)과 같은 잡지가 등장한 것은 소위 신문사잡지가 발행되기 시작한 1930년대에 들어서였다. 신문사잡지는 신문사가 발행하는 잡지를 가리키는 말인데 신문사잡지가 발행되던 때는 신문사가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상업적인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던 때다.
1938년 조광 조미료 아지노모도, 1924년 동아일보 카라멜 모리나가
애초에 신문사 경영은 뜻있는 사람들의 사회사업쯤으로 여겨졌지만 기업 체제로 바뀐 이후 달라지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역사는 19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들 신문사들은 1930년대 들어서면서 자본금을 축적하고 기업 형태로 변신했다. 이제 신문사는 다른 돈벌이 장사와 다름없어졌다고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당시는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신문사가 대규모 일본인 광고주들을 유치하는 데 경쟁적으로 나섰던 상황은 비난을 받기 쉬웠다. "한 손에 조선 민족을 들고 한 손에 도쿄, 오사카의 상품을 들고 나가는 것"이 한반도의 신문들이라고 타박을 받았다.
화려한 광고, 지면을 넓게 차지하는 광고 중에는 일본 제품이 많았다. 오늘날까지도 인기를 얻고 있는 삿포로와 아사히, 기린 맥주는 1910년대부터 광고를 많이 했다. 미원의 뿌리인 아지노모도(味の素), 은단의 뿌리인 인단(仁丹)을 비롯해서 모리나가(森永), 시세이도(資生堂), 라이온(Lion)도 신문과 잡지의 지면에 자주 등장했다. 일본 제품 외에도 배타고 왔다는 박래품(舶來品) 즉 양품(洋品)도 인기를 모았다. 미국의 포드와 제네럴 모터스, 프랑스의 코티 화장품, 영국의 싱거 미싱 등이 그들이다.
한국 회사들도 광고 지면에 나타났는데 오늘날까지 건재한 유한양행과 동화약품도 만날 수 있다. 동화약품은 동화약방이라는 이름으로 1897년 평양에서 서울로 진출했고 유한양행은 1926년에 창립되었다. 유한양행은 당대부터 버드나무표를 내세워 광고했는데 기업 로고를 쓴 선구적인 광고 사례였다. 유한양행의 도안은 오늘날 보아도 근사하다.
1915년 매일신보 아사히, 삿포로 맥주, 1924년 조선일보 포드 자동차, 1927년 조선일보 유한양행의 개업
옛 신문과 잡지의 광고 지면을 마주하노라면 갖가지 사연들이 보인다. 제품의 발명과 생산, 유통에 관련된 과학 기술이 있고 이를 현대적이라고 규정하는 새로운 감성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신문과 잡지의 광고 속에 등장하는 상표(브랜드) 상품들은 힘이 셌다. 이들 상표 상품들은 방물장수나 보부상을 통해 우리네 일상에 오랫동안 유통되어왔던 무명의 상품들을 몰아내기 시작한 것들이었다.
광고의 수사는 예나 지금이나 화려하다. 비누는 "현대 문화와 발을 맞추어 온" 것으로 선전했고 화장품은 "신사 숙녀의 필요품"으로 선전했으며 이들을 갖추지 않으면 "현대인의 자격을 잃는 것같이 생각되게" 되었단다. 광고는 <현대= 문화= 위생= 미(美)>의 등식을 보여주고 소비자가 됨으로써 손쉽게 우월한 현대인이 될 수 있다는 현대 사회의 비밀을 속삭인다. 따라서 현대인의 정체는 소비자다.

광고가 속삭이는 비밀 중에는 성(섹스)도 빠지지 않았다. 쾌락을 위한 소비는 생식을 위한 소비보다 현대적으로 여겨졌고 숱한 정력강장제 광고가 섹시한 남녀를 만들어냈다.
1938년 동아일보 정력강장제 킹 오브 킹즈
아름답고 위생적이며 섹시한 현대의 도시 사람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비위생적이며 시대착오적이며 비문명적인 시골 사람이라는 짝패다. 시골과 비문명이 연결되어야 도시의 꽃은 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시골'과 '비문명', '촌스러움'은 후지지 않고 원초적이지 않으며 대단히 현대적이고 인위적인 산물이다. 무엇이 촌스럽나, 비문명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바뀌어왔지만 촌스러움이 아니라 세련된 것, 야만적인 것이 아니라 문명적인 것을 향하는 우리의 몸짓은 동일하다. 유행이 늘 새로워 보이지만 변하지 않는 까닭과 같겠다. 새로움을 끊임없이 상품화하는 불변의 유행 말이다.
장영우_평론가,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56년생
저서 <이태준소설연구>, <중용의 글쓰기>, <소설의 운명, 소설의 미래>, <거울과 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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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6-0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