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일제하 최고 베스트 셀러, 박계주 소설 - 순애보

근대 예술의 풍경 2015.05.01 제 05호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 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사랑에 빠진 연인은 대부분 자신들의 이야기가 '순애보'이길 바란다. 이때의 순애보란 '오직 한 사람만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이야기[純愛譜]'로, 일제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 <순애보(殉愛譜)>와는 제목부터 다르다.
박계주의 소설 제목 '순애보'는 '사랑에 순절(殉節)하는 인생기록'이란, 훨씬 비장하고 섬뜩한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939년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하여 단행본으로 발행된 뒤 해방 전까지 10만부나 제작된 최고의 베스트셀러 <순애보>는 그 제목부터 독특했던 것이다.
숨겨진 밀리언셀러 <순애보> 단행본 쪽수 630쪽 → 발행가격 1전80원 → 재판까지 걸린 일수 15일 → 총 발행 수 47판 → 총 발행부수(대략) 10만부
<순애보>는 상금 천 원을 걸고 모집한 《매일신보》의 '특별문예현상공모'에 당선한 소설로, 신문 연재가 끝난 뒤 발간된 단행본(초간본 4?6판 양장본, 630쪽, 정가 1원80전, 1천부)이 순식간에 팔려 보름만에 재판을 찍을 만큼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 후 1945년 8월 5일까지 47판이 발행되었는데, 이때까지의 총 발행부수는 대략 10만부로 추산된다. 해방 후에도 1956년까지 10판, 3만부 이상 발행되었고, 1957년(한형모 감독, 정의향?성소민?이빈화 주연)과 1968년(김수용 감독, 태현실?윤정희?신성일 주연) 두 차례나 영화화되어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므로 지금 육칠십 대 이상의 한국인으로 소설로나 영화로 <순애보>를 접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통계 수치는 알기 어려우나 <순애보>도 밀리언셀러 목록에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의 대표적 밀리언 셀러로 <인간시장>?<태백산맥>?<토지> 등을 꼽지만 이들은 적게는 열권에서 많게는 스무 권 분량의 대하소설이란 점이 고려되어야 하고, 낱권으로 백만 부 이상 팔린 소설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칼의 노래>?<엄마를 부탁해> 등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일제시대부터 1960 ~ 70년대까지 꾸준히 팔린 <순애보>는 한국 소설계나 출판계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朴啓周)는 1913년 7월 26일 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감리교 이용도 목사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성장한다.
그는 1936년 상경하여 이광수를 사사(事師)하였는데, 《매일신보》 장편소설 심사자가 춘원이었던 것도 재미있다. 당시 《매일신보》 사회부장이었던 팔봉 김기빈은 춘원에게서 <순애보>를 읽어달라는 편지를 받고 "춘원선생의 작품과 모랄도 같고 문장도 유려창달할 뿐더러 글씨마저 춘원선생의 글씨와 비슷하여 의아를 느끼고 있던 차이라 그렇잖아도 사람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뵈려 했사온데 전혀 신인이라 하니 더욱 기쁘"다는 답장을 보낸다. 당시 박계주는 원산?금강산 등을 여행하고 돌아와 《매일신보》 현상공모 마감이 10월말까지 두 달 연기되었다는 사고(社告)를 보고 1938년 9월 4일 상경하여 내자동 하숙집에서 소설 집필에 몰두, 마감 직전인 10월말 오후 네 시 경 원고지 1천5백장 분량의 <순애보>를 탈고하여 '박진(朴進)이란 필명으로 응모하였다고 한다.
<순애보>의 남녀 주인공 최문선과 윤명희가 보여주는 자기희생과 봉사, 인내와 헌신의 태도는 이기적 욕망 충족을 위해 살아가는 대부분의 범속한 인간들로서는 흉내 내기조차 힘든 것이다. 《매일신보》에서는 "일찍이 조선의 신문지상에 이같이 높고 깨끗한 사랑에 순절하는 청춘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실려 본 일"이 없는 특별한 작품으로 "인생으로서 가져야할 높은 철학과 순결한 도덕"을 갖춘 작품이라 선정 이유를 밝힘으로써 은근히 멸사봉공의 군국주의적 이데올로기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으나<순애보>의 문학적 의의는 이용도 목사의 '사랑의 신비주의'를 형상화함으로써 기독교적 정신에 입각한 사랑의 새로운 모랄과 문법을 제시하려 한 것으로 보아야 할 터이다.
이용도 목사의 사랑의 신비주의 + 십자가를 진 예수의 고난을 직접 체험하여 예수와 일체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운동
이용도의 '사랑의 신비주의'는 십자가를 진 예수의 고난을 직접 체험하여 예수와 일체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운동으로, 박계주는 용정에서 《예수》란 잡지를 만들며 이 소설의 줄거리를 구상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소설을 연재하고 발행한 곳이 총독부 산하 기관이란 점과 작품 속에 당대의 열악한 현실 상황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친일의 혐의를 받기도 하지만, 1930년대 말의 억압적 현실을 고려하면 그렇게만 몰아붙일 게 아님을 알게 된다.
<구원의 정화>, <별아 내 가슴에>, <대지의 성좌>, <장미와 태양>... 그리고 <여수>
해방 후 박계주 소설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과 관련된 굵직한 사건을 제재로 한 작품이 대종을 이룬다. 1860년대 기독교 박해사건을 다룬 <구원의 정화>, 6·25동란 전후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그린 <별아 내 가슴에>, 일제하 항일독립투쟁을 형상화한 <대지의 성좌>, 자유당의 몰락을 예견한 <장미와 태양> 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의 소설은 거의 영화화되었는데, 1957년과 1968년 두 차례나 영화화된 <순애보>는 말할 것도 없고, 1958년에 제작된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감독, 김지미 주연)는 관람객이 15만 명을 넘어서는 성공을 거둔다. 이처럼 신문 연재소설과 소설의 영화화로 큰 인기를 얻은 그가 <여수>로 필화사건을 겪으면서 급격하게 몰락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61년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여수>는 자유당 독재를 비판한 소설을 써 반정부 작가로 알려진 작중인물 이춘우가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오 년간의 국제신탁통치를 받았던들 오년 뒤엔 국제기구인 유엔에 의해 오스트리아처럼 통일되었을 것"이라며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김구 등의 근시안적 태도를 비판한 내용 때문에 곧바로 연재 중단된다. 《동아일보》(1961. 11. 29.)는 "비록 소설이라 할지라도 게재 내용이 본사의 견해와 현저히 상이하므로 게재 중지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사고(社告)를 싣고 있는데, 그 이후 박계주 소설을 연재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작중인물 이춘우 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오 년간의 국제신탁통치를 받았던들
오년 뒤엔 국제기구인 유엔에 의해 오스트리아처럼 통일되었을 것
- 박계주, 여수 中 -

동아일보
비록 소설이라 할지라도 내용이 본사의 견해와 상이하므로
게재를 중단하시오.
그는 1963년 5월 21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투병하다가 1966년 4월 7일 오후 아홉시 경 사망하였고,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간호사 출신의 아내도 3개월 뒤 간경화로 세상을 뜬다.

그는 1963년 5월 21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투병하다가 1966년 4월 7일 오후 아홉시 경 사망하였고,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간호사 출신의 아내도 3개월 뒤 간경화로 세상을 뜬다.
<순애보>를 비롯한 여러 편의 장편소설을 신문에 연재하고 영화화에서도 성공을 거둔 그가 "미아리 산꼭대기 게딱지같은 집”에서 빚과 병고에 시달렸다는 전언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그가 술을 좋아하고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미남 작가였다고 하지만, 이용도의 영향으로 <순애보>란 소설을 쓸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그가 술과 여자에 탐닉해 재산을 탕진했으리라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원래 술을 안 했으나 삼천리사에 근무하며 최정희에게 놀림을 받고 술을 마시기 시작해 술고래가 되었다고 하지만, 술이나 여성과 련된 추문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하 최고 베스트셀러 박계주 소설 순애보殉愛譜 사진 1
<순애보>는 일제 말기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인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박계주는 평생 신문 연재소설에 주력했으나 남녀의 애정문제만 다룬 통속작가가 아니라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진보적인 역사관을 지닌 지식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거리에서 김두한을 만나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김좌진 장군은 만주에서 목숨 바쳐 싸우고 있는데 그 후손으로 부끄럽지 않느냐고 질책을 했다는 증언이다.
김두한은 그의 소설 <순애보>를 사다가 여관에서 학생에게 밤새 읽혀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해방 후 박계주 소설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한국 사회의 올바른 방향 모색을 주제로 한 작품이 대종을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박계주는 대중통속소설 <순애보>의 작가로만 인식이 고착되어 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여수>를 연재하다 갑작스레 중단한 사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가 <여수>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주었던 정치적 발화의 진정한 의미는 작품의 본격적 분석을 통해 해명되어야 하겠지만, <여수> 이후 그의 문학 활동이 거의 중단된 일이라든지 빚 때문에 정릉에서 미아리 산동네로 이사한 사연 같은 것은 쉽게 밝혀질 것 같지 않다.
<순애보>는 초판본과 해방 후 간행된 판본, 그리고 전집에 실린 작품 사이에 많은 차이를 보인다. 1939년 매일신보사에서 발행한 초판본과 달리 해방 후 간행된 책에서는 적지 않은 분량의 첨삭이 이루어졌으며, 그 내용은 대부분 민족의식을 고취한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해방 전 세대와 해방 후 세대가 읽은 <순애보>는 같으면서도 다른 작품이다. 하지만 해방 전에 쓴 작품을 일부 또는 전면적으로 개작한 것은 박계주만이 아니라 대다수 작가들의 관행이었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관행이어서 무조건 이해하라는 게 아니라, 일제시대와 해방 후의 판이하게 달라진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을 작가들의 고민을 조금이나마 헤아리자는 것이다.
장영우_평론가,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56년생
저서 <이태준소설연구>, <중용의 글쓰기>, <소설의 운명, 소설의 미래>, <거울과 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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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5-0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