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무성영화 시대의 극장과 활동사진 변사

근대 예술의 풍경 2015.04.01 제 04호 무성영화 시대의 극장과 활동사진 변사
흔히 ‘무성영화’라고 하면 글자 그대로 ‘조용한(silent) 영화’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시대의 영화상설관은 대단히 다채롭고 풍부한 청각적 환경을 구축하고 있었다.
객석 사이를 오가며 과자 파는 사람의 흥얼거림, 극장으로 전화가 걸려온 관객을 찾는 목소리, 관객들끼리 두런거리는 잡담 등 온갖 소음들이 극장의 소리 풍경을 구성하는 가운데, 악사들의 연주 음악이 관객의 귀를 잡아끌었고, 변사가 관객들을 영화의‘이야기’ 속으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이때의 영화란 ‘상영’되는 것이라기보다 ‘상연’되는 것이었다. 영화는 촬영된 필름이 현상되고 편집되는 그때가 아니라 ‘영사기사와 악사, 그리고 변사’의 공조가 이루어지는 상영 현장에서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영화 상영은 오늘날의 멀티플렉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회성과 현전성을 구현한 일종의 공연 이벤트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영화 상영은 일종의 공연 이벤트에 가까웠다.
변사의 해설 과정 상영전 상영될 영화의 내용을 낭독 상영중 대사 낭독, 육성이나 소도구를 이용한 음향효과 상영후 다음에 상영할 영화 예고
이 이벤트에서 변사는 영화 해설을 통해 스크린에 영사되는 필름과 극장 안의 관객 사이를 매개했다. 상설관 초기에는 기록영화(실사영화)와 단편영화(서부활극이나 희극)를 먼저 상영한 후 극영화와 연속영화 등을 보여주는 것이 한 프로그램이었는데, 실사영화의 해설은 보통 극장의 견습변사가 맡았고, 프로그램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극영화와 연속영화를 극장의 주임변사가 해설하여 관객을 웃기고 울렸다.

변사의 해설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변사는 상영 전에 악단의 연주를 신호로 무대에 등장해 상영될 영화의 내용을 마치 고대소설을 낭독하는 듯한 어조로 미리 소개해줌으로써 영화에 대한 관객의 이해와 기대감을 높인다. 본격적인 상영이 시작되면, 변사는 내레이터로서 영화를 설명하다가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연기하며 대사를 낭독하기도 하며, 때로는 육성이나 소도구를 이용해 음향효과도 낸다. 영화 상영이 끝나면, 다음에 상영할 영화를 예고하는 것으로 변사의 해설도 막을 내린다.
사실, 변사의 역할은 영화를 해설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영화 개봉 전이나 상영 기간에는 극단의 악사들과 함께 거리를 돌며 프로그램을 알리고, 상영 중에는 영사기사 및 악단과 호흡을 맞추어 가며 영사 속도를 조절하고, 필름 교체를 위한 막간(幕間)에 여흥을 제공하며,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상영 사고에 대해서도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등 영화 상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과정을 주재하는 것이 변사였다.
무성영화 시대의 극장에서 변사는 해설자인 동시에 연기자이고, 무대감독이었다. 한국의 변사들은 유독 말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변사들은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장면에서도 멈추지 않고 관객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때로는 내용과 상관없이 자신이 직접 개입해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고,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대사를 읊어서라도 말을 쉬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영화를 자의적으로 해독하거나 변조했으며, 퍼포먼스에 몰두하느라 영화 따위야 우습게 보는 변사도 있었다. 변사 자신을 등장인물과 동일화하다가 다시 해설자의 위치로 돌아오고, 그러다가 갑자기 내러티브 외부로 돌출해 관객에게 변사 개인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등 변사의 연행은 관객의 수용 과정에 과도하게 개입했다고 볼 수도 있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러한 과잉에 대해 비교적 너그러웠을 뿐더러 어떤 사람들은 그 재미로 극장을 찾기도 했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심훈처럼, 변사의 과잉된 연행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러한 과잉에 대해 비교적 너그러웠을 뿐더러 어떤 사람들은 그 재미로 극장을 찾기도 했다. 변사의 영화 해설이 인기를 끌고, 누가 해설하느냐에 따라 관람 여부를 결정할 정도로 변사가 흥행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자, 각 극장은 전속변사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영화를 광고했고, 몇몇 스타 변사는 엄청난 수당을 받으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변사의 관습이 일본 영화 문화의 영향으로 식민지 조선에 도입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변사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한국과 타이완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과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도 꽤 오랫동안 존속했다고 하는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극장을 둘러싼 여러 문화적 상황과 결부해 변사의 존재 그 자체가 갖는 영화사적 의미가 각별하다. 식민지 상황에서 무성영화 시대의 영화상설관들은 ‘조선인 상설관’과 ‘일본인 상설관’이라는 식으로 민족적으로 구획되었는데, 이러한 분리는 제도적으로 강제된 것이라기보다 ‘조선어’와 ‘일본어’라는 민족어의 구획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인 상설관의 조선인 변사는 종족적(ethnic) 영화 공간을 지탱하는 중심축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객들을 겨냥한 일본인 상설관에서는 일본인 변사를 고용하고 일본인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들(주로 일본영화)로 프로그램을 구성했고, 조선인 상설관은 조선인 변사를 고용해 조선인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들(주로 서양영화)을 상영했다. 제작 인프라가 극히 취약했던 당시는 영화 산업의 중심이 상영에 있었고 조선인이 제작한 조선영화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 상설관의 조선인 변사는 종족적(ethnic) 영화 공간을 지탱하는 중심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인 관객에게는 일본영화나 서양영화나 모두 이질적인 풍속과 문화를 보여주었을 테지만, 조선인들은 일본영화에 대한 반감과 서양영화에 대한 선호가 뚜렷해 조선인 상설관의 주요 프로그램은 서양영화, 그 대부분이 일본을 통해 들여온 미국영화가 차지했다.
변사는 낯선 것들을 낯설지 않게 풀어내는 문화 번역을 수행...
조선인 상설관에서 변사의 연행은 무성영화에 삽입된 서양어 간자막(intertitle)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는 번역 기능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번역이란 단순히 생경하고 낯선 언어를 조선어로 바꾸는 것이라기보다는 외부 세계의 낯설지만 매혹적인 광경들을 설명하고 안내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절모에 프록코트를 차려입고 등장한 변사는 이 ‘박래(舶來)’의 근대/문물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함으로써 스크린에서 보이는 외부 세계에 대하여 낯선 것들을 낯설지 않게 풀어내는 문화 번역을 수행한 것이다. 변사의 연행은 영화라는 새로운 근대 매체 환경 속에서 변형되고 재배치된 구연문화의 하나로서, 근대의 극장 공간에서 새로운 공통 경험의 장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종족적 동질성과 단일한 언어 공동체의 상상에 기반해 구성되는 ‘동족(어) 공간’인 조선인 상설관에서, 조선인 변사의 조선어 해설은 민족을 상상하게 하는 공론장으로 극장을 구성하기도 했다. 상영 중 막간 휴식을 틈타 선동적인 연설로 경찰에 구인된 변사도 있었고, 영화 해설 중 변사의 다소 불온한 언사로 인해 상영이 중지된 사건도 많았다. 변사의 ‘혀’를 단속하고자 극장 뒤편에 자리 잡고 앉은 임석경관이 변사가 검열에 통과된 대본대로 해설하는지를 감시하는 것은 무성영화 시대의 극장을 재현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광경이다.
이러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극장의 정치적 잠재성이 돌발한 사건들은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가령, 식민지 시대 최고의 흥행작 <아리랑>(1926)이 민족적 저항영화로 신화화된 것도 조선인 상설관이 가지고 있는 ‘동족(어) 공간’으로서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무성영화 시대의 상영 환경이 빚어낸 일이다
변사는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설했는데, 이것이 <아리랑>을 사후적으로 민족영화로 의미화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
경찰의 감시가 엄중할 때에는 영진이 “서울 모전문학교에 재학 중 철학을 연구하다가 미쳐났다”고 해설했지만, 감시가 소홀할 때에는 “서울 모전문학교에서 철학 공부하다가 3?1운동의 고문으로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해설했다는 것이다. 금지된 ‘3.1운동’이라는 말을 발화함으로써, <아리랑>의 비극은 평범한 농촌의 비극에서 식민지의 비극으로 전화되었다.
이 차이는 당시의 상영 공간에서 무성영화의 현전성과 식민지 극장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빚어진 것들이다. 1930년대 들어 사운드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영화상설관들이 사운드 시스템으로 더디게 이행한 까닭에 한동안은 변사가 여전히 상영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지켰다.
영진은 서울 모전문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3.1운동의 고문으로 미치광이가 되었다
그러나 ‘왕년의 인기변사’ 서상호가 파고다공원에서 <명금>을 해설하며 구걸하다가 그 자신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우미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던 1930년대 후반이 되면, 경성에서는 변두리 극장에서나 변사의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근대문화의 첨단에 있었던 변사들은 영화 관람에 불필요한 낡은 존재, ‘활동사진’ 시대의 유물로 인식되었다. 이제 관객들에게 영화란 ‘상연’되는 것이 아니라 ‘상영’되는 것이었다.
이화진_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 1975년생,
주요 논문 「식민지 조선의 극장과 ‘소리’의 문화 정치」(논문), 저서 「월경하는 극장들」(공저)「조선영화와 할리우드」(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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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4-06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