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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길라잡이

밀양

역사탐방 길라잡이 11편 땀 흘리는 비석의 신비, 사명당의 고향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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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코스

밀양시립박물관(아빠와 함께 고고학자 되어보기) > 영남루(아빠와 함께 소원빌기) >  표충비 > 대법사 > 사명대사 생가 터 > 사명대사 기념관(사면대가 벽화 찾기)
예상소요 시간 : 2시간 30분
밀양시립박물관과 영남루를 본 뒤, 다음 코스를 가기까지에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쉬어 가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차량을 이용해서 이동할 수도 있으니 아이가 피곤해하지 않도록 시간을 배려하는 여행을 만들어보자.

탐방길라잡이

밀양시는 낙동강의 지류, 밀양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도시다. 밀양의 원래 이름은 '미리벌'로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밀성'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공식 명칭이 '밀양'으로 확정되었다. 밀양은 오래 전, 가야와 신라의 영토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근거지로 유명했다.
은하에게 밀양의 이러한 내력에 관해 설명했지만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땀 흘리는 비석'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심을 보였다.
'땀 흘리는 비석'으로 알려져 있는 표충비는 밀양을 대표하는 아이콘이자, 우리 역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나라가 위험에 처할 때 마다 땀을 흘린다는 이 비석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며 왜적과 맞서 싸운 사명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표충비가 밀양에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은 이곳이 사명대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집을 나서서 밀양으로 향하는 내내 은하는 사명대사가 누구인지, 비석이 어떻게 땀을 흘릴 수 있는지 물었다. 호기심에 안달이 난 아이를 보니 나도 표충비가 궁금해 졌다. 그 동안 신문기사나 책으로만 접해왔을 뿐 직접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밀양, 이야기 속으로

표충비의 유래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는 의병을 이끌며 왜군에 맞서 싸운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어명을 내렸다. "사명대사의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사명대사의 진영을 봉안하여 그의 충혼을 기로도록 하라." 임금의 명에 따라 사명대사의 고향인 밀양군 무안면에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되었다. 선조는 이 사당에 '표충사'라는 이름을 하사하며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치하했다. 그렇게 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사명대사의 후손인 남봉선사는 표충사를 중건하면서, 사명대사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표충비 그림
영조 14년(1738년)의 일이었다. 남봉스님은 비석에 쓰일 돌을 구하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발품을 파는 노력 끝에 표충비를 만들었는데, 정승이었던 이익현에게 비문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조선은 배불숭유정책을 펴며 불교를 탄압했는데,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익현은 기꺼이 비문을 썼다. 나라를 위해 갖은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 사명대사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이 그 발로였다. 다시 세월이 흘러, 조선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밀양 무안면에 있던 표충사는 밀양 영정사로 옮겨갔고, 표충비만 덩그러니 남았다. 일본 사람들은 오래 전,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의 활약상을 잘 알고 있었기에 표충비를 몹시 꺼림직 하게 여겼다. 사명대사의 혼이 표충비에 어려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표충비에 남아있는 사명대사의 혈맥을 끊기 위해 표충비의 바로 옆에다 감배창고를 세웠다. 그런데 표충비가 돌연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쫙!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고 한다. 그 형상이 마치 비석이 시뻘건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밀양 탐방하기

1. 밀양 시립 박물관
밀양 시립 박물관
표충비를 찾기에 앞서, 은하에게 밀양에 관한 폭 넓은 이해와 사명대사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을 전해주기 위해 밀양 시내에 자리 잡은 밀양시립박물관을 찾았다. 아담한 공원으로 꾸며진 정원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매표소가 눈에 들어왔다. 표를 끊고 로비로 들어가니 박물관 안은 견학 온 은하 또래의 어린 아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 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 까지 밀양의 포괄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어, 선사시대에서부터 삼국시대,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 까지 밀양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전시장 한 쪽에는 사명대사에 관해 소개하는 글과 사명대사의 업적을 기록한 책, 사명대사가 남긴 책 등이 따로 진열되어 있었다. 사명대사가 누군지 궁금해 했던 은하는 이 곳을 통해 궁금증을 약간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박물관 사진
미션
아빠와 함께 고고학자 되어보기박물관 내 화석전시관에는 현미경으로 직접 화석을 관찰할 수 있는 코너가 있다.아빠와 함께 고고학자가 되어 화석을 관찰해보자!
2. 영남루
밀양시립박물관을 나서서 밀양강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밀양 시내를 관통하는 밀양강 강가에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누정(樓亭)이 하나 있다. 보물 1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남루다. 높이 뻗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강변에 인접한 동산 위에 자리 잡은 오래된 건물이 나타났다. 빛이 바랜 현판과 군데군데 갈라진 기둥은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었지만,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운 외관만큼은 여전히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영남루
은하의 손을 잡고 영남루 위에 오르자 곡선을 그리며 유유히 흘러가는 밀양강의 풍광이 눈 앞에 펼쳐졌다. 밀양강 좌우로 넓고 비옥한 평야와 곳곳에 봉긋하게 솟아 난 아담한 산들이 보였다. 은하는 천정에 그려진 오래된 그림들과 정교하게 맞물린 구조가 신기한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구경하느라 바빴다.
은하를 데리고 영남루를 내려와 아래로 이어진 샛길을 걷다보니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사당이 나타났다. 아랑 이야기 속에서도 등장하는 아랑각(阿娘閣)으로, 죽은 아랑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었다. 은하에게 아랑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랑각 아래로 내려갔다. 강변을 따라 산책로가 이어져 있었다. 은하는 아랑 이야기가 무섭다고 하면서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랑이 불쌍한 모양이었다. 아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한적한 강가를 한참 걷다 보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프다며 보채는 은하를 데리고 식사할 곳을 찾아 나섰다.
아랑전설
옛날 옛적, 밀양 윤부사에게 아랑이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의 손에서 자란 아랑은 아름다운 미모와 그에 못지않은 따듯한 마음씨를 가진 참한 규수였다.
밀양 관아에는 아랑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해, 호시탐탐 그녀를 노리던 어느 하급관원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통인으로, 아랑에 대한 욕망에 눈이 멀어 마침내 그녀를 범하기로 마음 먹었다. 통인은 아랑의 유모를 사주하여 아랑을 유인했고 겁탈하려 했다. 아랑은 격렬히 저항했고, 통인은 격렬한 실랑이 끝에 그녀를 살해하고 말았다. 통인이 아랑의 시체를 유기한 뒤부터, 관아에 흉흉한 일이 끊이질 않았다. 새로 부임하는 부사들마다 원인모를 죽음을 맞는 것이었다.

그때 한 부사가 자원하여 밀양 관아로 부임했다. 부임한 첫 날 밤. 부사가 잠에 들려는데 싸늘한 한기와 함께 웬 처녀의 원혼이 나타났다. 바로 아랑의 혼령이었다. 목숨을 잃은 부사들은 모두 아랑의 귀신을 보고 놀라서 숨을 거둔 것이었다. 기백이 남달랐던 부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신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아랑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랑은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자신을 보고 부사들이 죽어 나가니, 사람들이 되려 자신을 원망한다며 답답해하고 있었다. 부사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랑의 사연을 듣고,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다.
다음 날, 부사는 관원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 한 마리가 관원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다가, 통인의 머리 위를 빙빙 맴돌았다. 부사는 통인이 범인임을 눈치 채고 그를 심문해 아랑의 시신을 유기한 장소를 찾아냈다.

부사는 영남루 옆 대숲에서 아랑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죽은 지 3년이나 지났음에도 시체가 썩지 않아 살아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부사가 아랑의 몸에 박혀있던 칼을 빼내니 살은 사르르 녹아 없어지고 뼈만 남았다. 부사는 아랑의 장사를 지내주고, 시체를 발견한 장소에 아랑각을 지어 매년 제사 지내게 하니, 어느 날 밤 아랑이 고운 모습으로 나타나 절을 하고 돌아갔다.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먹거리
돼지국밥은 부산, 경남 지역의 대표적인 먹거리 중 하나다.하지만 밀양이야 말로 돼지국밥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부산의 돼지국밥집 중에는 밀양이라는 상호를 내세우는 가게들이 많은데, 주인도 밀양 출신인 경우가 대다수다. 조선시대, 밀양에 돼지고기를 많이 쓰는 관창, 양반가가 많이 있었다는 점도 주목해 볼 만 하다. 밀양 시내를 걷다 보면 돼지국밥을 파는 가게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밀양식 돼지국밥은 다른 지방과는 달리 돼지 뼈를 이용해 국물을 우려내는 것이 아니라, 소뼈로 국물을 우려낸 뒤 돼지고기를 곁들이는 방식으로 만들어 진다. 따라서 일반 돼지국밥보다 맑고 담백한 맛이 난다. 생각보다 잡내가 많지 않아서 아이들과 함께 먹기에도 좋다.
3 표충비
밀양 시내를 벗어나 무안면으로 향했다. 은하가 고대하는 표충비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밀양 시내에서 무안면 까지는 차로 이십 분 가량 걸린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고 배차시간이 길어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다.
표충비 사진
미션
아빠와 함께 소원 빌기밀양의 표충비는 영험한 신물(神物)로 알려져 있다. 아빠와 함께 소중한 소원들을 기억에 남겨보자!
무안면 중심으로 들어서자 삼비문(三碑門)이라는 현판이 내 걸린 입구와 아담한 높이의 돌담이 보였다. 삼비문을 지나 또 하나의 입구를 통과하자 마침내 표충비가 보관되어 있는 표충비각(表忠碑閣)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하는 한 달음에 표충비각 앞까지 뛰어갔다. 표충비각 바로 앞에는 절을 할 수 있도록 방석과 향로가 마련되어 있었고, 나무로 된 창살 너머에는 암회색으로 빛나는 표충비가 우뚝 서 있었다.
실제로 본 표충비는 여느 비석과 특별히 다르지 않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비석에 관한 수많은 일화와 범상치 않은 이력 탓인지, 왠지 모를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기도 했다. 은하는 아빠, 엄마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기원하면서 비석에다 대고 곱게 절을 했다. 그 모습이 귀엽고도 기특해서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땀 흘리는 비석의 신비
표충비는 일명 한비(汗碑), 땀 흘리는 비석이라 불린다. 나라의 중대한 사건이 있을 때 마다 비석 전체에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땀을 흘리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표충비의 물방울이 어떻게 생성되는 것인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비석 내부와 외부의 온도차 때문에 발생하는 결로현상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만 결로현상이 일어나는 까닭은 밝혀지지 않았다.

표충비는 고종 31년(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7일 전, 최초로 땀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1910년, 한일합방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땀을 흘렸는데 1919년 3.1운동 이 일어나기 3일 전에는 무려 5말 7되의 물을 쏟아 내었다고 한다. 대략 100리터가 넘는 양이다. 표충비는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 굵직굵직한 사건이 일어날 때에도 어김없이 땀을 흘렸다. 한국전쟁, 5.16 혁명은 물론이고, IMF 사태 전후에도 무려 세 차례나 땀을 흘렸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표충비가 땀을 흘리는 것은, 비석에 어려 있는 사명대사의 혼령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명대사가 후손들에게 국난이 닥칠 것을 경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떠도는 속설이라 치부해도 무방한 이야기지만, 표충비가 나라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4 대법사(大法寺)
표충비를 떠나 인접한 대법사로 향했다. 이 절은 신라시대의 승려,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사명대사는 한때 이 절에 10년 간 머무르면서 불도를 닦았다고 한다. 사명대사가 열반한 후, 그의 영정을 이 절에 모셨는데 그 당시 조정에서 표충사(表忠詞)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사명대사의 충정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이 절은 오랫동안 표충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가까운 단장면의 한 절에 영정을 빼앗기면서 이름을 대법사로 바꿔야 했다.
대법사
산 정상을 향해 꼬불꼬불 이어진 길을 따라 달리다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천왕문을 발견했다. 차에서 내려 은하와 함께 천왕문을 통과했다. 은하는 천왕문 안에 그려져 있는 사천왕이 신기한 듯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뜬 사천왕은 무섭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친근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천왕문을 지나 길을 따라 올라가자 아담한 대법사 경내가 펼쳐졌다. 재밌는 것은 어느 법당 앞에 홀로 높이 서 있는 모과나무였다. 절 뒤편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으나 경내에 나무라곤 이 모과나무 한 그루 뿐이었다. 알고 보니 이 나무는 사명대사의 지팡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사명대사가 이 자리에 지팡이를 꽂아놓았는데 거기에서 가지가 자라고 잎이 돋아나더니 모과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믿을 수 없는 설화 한 토막이었지만 표충비를 보고 오는 길이라 그런지 왠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모과나무에 실려 있는 사명대사의 영혼
1993년의 일이다. 대법사의 중축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사명대사가 심어놓은 지팡이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모과나무가 인부들의 골치를 썩혔다. 대웅전을 지으려는 위치 바로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부들은 대법사 측과 상의하여 무과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려 했다.

나무를 옮기기로 한 날 새벽,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적막한 산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닥치고, 어디선가 호랑이가 포효하는 것 같은 소리도 들렸다. 잠을 자던 한 스님이 놀라 밖으로 나가보니 어디선가 노성(怒聲)이 울려 퍼졌다.

“내가 사백년간 이 자리를 지켰는데 네 마음대로 하려느냐. 나는 절대 안 간다.”

목소리는 모과나무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스님이 나무를 향해 가보니 차가운 바람이 시익 불어왔다. 때는 8월. 한여름이었다. 스님은 이 목소리가 사명대사의 일침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공사를 철회했다고 한다. 덕분에 모과나무는 오래 전, 사명대사가 지팡이를 꽂은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5 사명대사 생가 터
사명대사가 태어난 생가 터와, 사명대사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사명대사 기념관은 대법사와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다. 생가 터와 기념관은 연달아 관람할 수 있도록 길이 이어져 있는데 우리는 우선 생가 터를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사명대사 생가 터
푸르게 이어진 잔디밭과 산책로가 마련된 저수지를 거쳐서, 사명대사 생가 터로 접어들었다. 낡은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이어져 있는 시골 풍경 속에 조선시대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은 오래 된 기와집이 들어서있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재미있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사랑채가 펼쳐졌고 그 뒤편에 안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각 방 안에는 그 당시 사용했던 가구와 지필묵, 침구 따위가 예전 모습 그대로 재연되어 있었다. 부엌에는 아궁이와 솥, 항아리 등이 놓여 있었고 창고로 쓰이던 곳에는 녹슨 농기구들이 모여 있었다. 은하는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 온 것처럼 신기해했다.

이 집에서 사명대사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하니, 아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졌다. 속설에 따르면 이곳의 집터는 수백 년 간 이름을 날릴 장수(將帥)가 태어날 명당이라고 한다. 그 말이 맞다면,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태어난 것도 우연이 아닌 셈이다.
사명대사의 어린 시절
사명대사는 조선 중종 39년(1544년), 경남 밀양 무안면 고라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어머니인 서씨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누른 두건을 쓰고 온 몸이 금색으로 빛나는 신비스러운 인물이 서씨를 구름에 태우고 높은 누대위로 올라가는 꿈이었다. 누대 위에는 늙은 신선 하나가 걸터앉아 있었고 서씨는 허리를 굽혀 절을 했는데,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고 곧 사명대사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출가하기 전, 사명대사는 응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어릴 때부터 또래 아이들에 비해 의젓하고 영리했던 응규는 모래를 뭉쳐서 탑을 쌓고, 돌을 세워 부처를 만드는 등 범상치 않은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하루는 응규가 아이들과 밤을 주워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어떤 사내가 그물로 큰 자라를 잡는 모습을 보았다. 응규는 그것을 측은히 여겨 자기가 주운 밤을 사내에게 주고 대신 자라를 받아 연못에 다시 놓아주었다. 이를 본 아이들이 자신들의 밤을 모두 응규에게 모아 주었는데, 응규는 자신의 몫으로 취하는 대신 다시 아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출처 : 사명대사 기념관
6 사명대사 기념관
사명대사 생가 터에서 안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들어가자 사명대사 기념관이 나타났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사명대사와 관련된 모든 정보와 생전에 대사가 사용했던 유품들을 만날 수 있는 알찬 공간이었다. 사명대사를 중심으로 진행한 여행인 만큼,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명대사 기념관 사진
미션
사명대사 벽화찾기 기념관 앞뜰에는 곳곳에 사명대사와 관련된 벽화가 있다.벽화를 감상하며 사명대사의 이야기들을 다시 기억해보자!
기념관 안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의 활약상과, 전쟁의 진행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었고 대사가 생전에 사용했던 장삼, 당시 의승군이 썼던 병장기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은하가 흥미를 보인 건, 왜군과 강화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명대사의 활약상이었다. 화려한 도술을 선보이며 왜적들을 압도한 사명대사의 일화들이 재미있게 느껴진 모양이다.
사명대사의 신통력
왜구의 침략으로 온 조선이 전쟁의 화마에 휩싸여 있던 어느 날, 사명대사가 수신사의 역할을 맡아 일본에 건너가니, 왜구는 그의 도술을 실험하여 기를 꺾고자 하였다. 사명대사의 학문이 깊고 도가 높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온 왜구는 그가 가는 길목에다 비단 병풍을 늘어놓고, 그 위에 다양한 시를 적어 놓았다.

사명대사는 그 병풍에 쓴 글들을 걸어가면서 한번 훑어보고는 모두 기억해 두었다. 대사가 관사에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왜인 하나가 병풍에 쓰인 글에 대해서 물었다. 사명대사는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아까 본 글을 다 외워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왜인들은 다시 철마를 불에 달구어서 거기에 유정을 타게 하고 또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게 하였으나, 사명대사가 신통력으로 비를 내리게 해 불더미를 모두 식혀버렸다. 당황한 왜인들은 사명대사를 무쇠 풀무의 화방(火防) 속에 감금해 태워 죽이려고 했지만, 사명대사는 되려 수염에 고드름을 주렁주렁 매단 채 호통을 쳤다.

“너희 섬나라에 나무가 많다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찬 방에서 사람을 욕보이는가?”

크게 놀란 왜구의 왕과 휘하 왜인들은 사명대사를 생불이라 부르며 우르러 받들었다. 사명대사는 왜왕에게 조선과 왜구의 강화를 제안했고, 그의 신통력에 기가 꺾인 왜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사명대사는 포로로 잡혀 있던 조선인 3000여명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돌아왔다.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답사를 마치며...
기념관을 지나 뒤뜰로 나섰다. 꽃이 무성하게 피어있는 정원을 뒤로하고 사명대사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은하와 함께 사명대사의 동상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 둘러본 밀양의 풍경들을 마음속에 하나, 하나 되새겨 보았다.

왜적에 맞서 싸운 사명대사의 고향이자, 일본제국에 저항했던 의열단의 활동무대였던 밀양. 예전에는 밀양하면, 부산과 가까운 작은 도시로만 여겨졌었는데 이제 보니 조상들의 호국의지가 서려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었다.
숨겨진 밀양 이야기: 사명당과 서산대사의 도술대결
젊은 시절, 사명당은 평안도 묘향산에 자리를 잡고 도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자신의 도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는지 궁금했던 사명당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난 서산대사를 만나 실력을 겨뤄보기로 했다. 사명당이 올 것을 미리 예감한 서산대사는 제자를 보내 그를 맞이하도록 했다. 제자가 어느 스님인 줄 알고 모셔 오겠느냐 물으니, 서산대사는 계곡에 흐르는 물이 사명당을 따라 거꾸로 흘러 올 것이니 그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답했다.

제자가 마중을 나가 보니, 한 스님의 행보를 따라 계곡물이 거꾸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바로 사명당이었다. 제자로부터 서산대사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명당은 상대방의 도술이 보통이 아님을 깨달았다. 서산대사를 만난 사명당은 그를 시험해 보고자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도술로 잡아 손아귀에 넣었다.
“스님, 제가 이 새를 죽이겠습니까? 살리겠습니까?”
사명당이 물었다. 마침, 서산대사는 방을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스님, 제가 방 밖으로 나가겠습니까? 아니면 방 안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이번에는 서산대사가 물었다. 사명당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당황했다. 서산대사는 그를 보고 웃으며, 스님이 어찌 살생을 하겠느냐고 말했다. 사명당은 그 말에 놀라 새를 놓아주었다.
잠시 후, 서산대사가 물고기가 든 어항을 내놓으며 요기나 하자고 제안했다. 사명당이 놀라서 살생을 할 수 없다 답하니, 서산대사는 먹어서 배를 채운 후 다시 토해내서 살려놓으면 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어항 속의 물고기를 먹고, 나란히 도로 토해냈다. 사명당이 토한 물고기는 죽어있는 반면, 서산대사가 토해놓은 물고기는 다시 살아서 어항 속으로 돌아갔다.

연달아 쓴 맛을 본 사명당은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도술을 선보여 승부를 결정짓고자 했다. 그는 계란 여러개를 꺼내 방바닥에서부터 하나씩 위로 쌓아나갔다. 그런데 서산대사는 이를 보더니 계란을 허공에서부터 방바닥으로 하나씩 쌓아 내려갔다.

서산대사는 완전히 기가질린 사명당을 본체 만체 하며, 제자에게 갑지기 점심상을 들이라고 명했다. 국수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명당이 보니 그릇에 든 것은 국수가 아니라 쇠로 만든 바늘이었다. 서산대사는 아랑곳 하지 않고 바늘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사명당은 이 모습을 보고 자신이 도저히 서산대사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자리에 엎드려 절하며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역사탐방 게임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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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미션
1.아빠와 함께 고고학자 되기
박물관 내 화석전시관에는 현미경으로 직접 화석을 관찰할 수 있는 코너가 있다. 아빠와 함게 고고학자가 되어 화석을 관찰해보자!

3.아빠와 함게 소원 빌기
밀양의 표충비는 영험한 신물(伸物)로 알려져 있다. 아빠와 함게 소중한 소원들을 기억에 남겨보자!

6.사명대사 벽화 찾기
기념관 앞뜰에는 곳곳에 사명대사와 관련된 벽화가 있다. 벽화를 감상하며 사명대사의 이야기들을 다시 기억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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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자가용 이용시 (서울 출발)

경부고속도로 - 대전 JC - 동대구 JCT - 동대구 IC - 신대구부산고속도로 - 밀양 IC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 대전 JC - 동대구 JCT - 동대구 IC - 신대구부산고속도로 - 밀양 IC
출처: 밀양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http://tour.miryang.go.kr/sub/05_04.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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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3대 신비
  • 사명대사비석 사진사명대사 비석에 흐르는 땀
    사명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인 표충비는, 나라를 위하는 사명대사의 마음을 닮았는지 국가의 큰 사건이 있을 때를 전후하여 땀방울이 맺히는 신비로운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 얼음골 사진여름에 얼음이 어는 얼음골
    천황산 북쪽 중턱 해발 600m 지점에 있는 얼음골 계곡은 무더위 속에서도 얼음이 얼고, 처서가 지날 무렵 얼음이 녹는 신비한 이상기온을 나타내는 지점이다.
  • 만어사 사진종소리가 나는 만어사의 경석
    만어사 앞에 깔려있는 고기 형상의 돌들은 모두 경쇠소리(종소리)가 난다호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는 동해의 고기와 용이 돌로 변해서 생긴 돌들이라고 한다.

탐방 추천 도서

  • 밀양 - 벌레이야기 밀양 - 벌레이야기
    이청준 지음 / 열림원 출판
    사회적이고도 묵직한 소재를 다룬 이창동 감독의 <밀양>의 원작 소설로, 삽화가 최규석의 선 굵은 삽화가 더해져 강렬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실제로 밀양에는 이 작품을 주제로 한 관광코스도 있다.
  • 사명대사 일본 탐정기 사명대사 일본 탐정기
    박덕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출판
    조선을 지키기 위한 사명대사의 여정을 그린 소설로, 왜란 중에는 나라를 지킨 의승장이자 외교가였던 사명대사 유정의 전설적인 활약을 살펴볼 수 있다.
· 글/사진  / 강민석
· 그림      / 홍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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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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