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남한산성

시즌2 역사탐방 길라잡이 10편 전설의 보물 창고,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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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코스

탐방코스 순서
자화문(남문) 아빠와 함께 사진찍기 → 수어장대 조선시대 병사가 되어보자 → 우익문(서문) → 국청사 → 숭열전 → 침괘정 → 행궁 은혜갚은 느티나무 찾기
예상소요 시간 : 2시간 30분
수 시간에 걸쳐 남한산성 전체를 돌아다니는 것은 아이에게 무리일 것이다.
아이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코스로 구성했으니, 아이의 시선과 속도에 맞추며 이야기와 함께 여행을 하자

탐방길라잡이

경기도 광주와 하남, 성남에 걸쳐 자리 잡고 있는 남한산성은 오랜 세월 한강유역과 수도 서울을 수호해온 천혜의 요새다. 신라에 의해 처음 지어진 이래 한성백제시절에는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외적의 침입에 맞서 수도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특히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무대로 잘 알려져 있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을 수도로 삼고 최후의 항전을 펼쳤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무릎을 꿇었다.
딸 은하와 함께 답사할 장소로 남한산성을 고른 것은 그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다. 내 딸 은하는 올해로 여덟 살이 되었다.
이제 막 우리 역사에 대해 배우기 시작할 나이인 만큼, 남한산성을 둘러보며 이곳에 남아있는 조상들의 흔적을 직접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답사에 앞서 조사를 진행하던 중 색다른 사실을 되었다. 남한산성에는 역사적인 사실 만큼이나 풍부한 전설과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병자호란 이야기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은하도 남한산성에 전해지는 재미난 이야기들을 듣자 180도로 태도를 바꾸며 흥미를 보였다

남한산성 이야기 속으로

인조와 천마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왕실을 옮긴 뒤, 이곳을 거점 삼아 청나라 군대에 맞섰다. 청군은 빠른 속도로 한양을 점령한 뒤 남한 삼성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급해진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대신들은 공주나 강화로 왕실을 옮겨 적의 공격을 피할 것을 건의했다.
인조는 고심 끝에 강화로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어마(御馬)에 올라 탄 인조가 군신들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떠나려 할 때였다. 무슨 영문인지 말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마에 올라탄 인조 그림
군졸들이 아무리 재촉해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채찍으로 때려도 보고, 앞에서 말을 모는 자도 바꿔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난감해 하고 있던 차에 서울에서 급보가 날아왔다. 청군이 남한산성 지척까지 진군해 왔다는 것이다. 인조는 말이 꿈쩍도 하지 않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보고 강화로 가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인조가 어명을 내리고 말고삐를 돌리자, 어마는 쏜쌀같이 달려 다시 남한산성 안 임금이 머물던 전각으로 돌아갔다.
훗날 알려진 이야기는 이렇게. 청군은 인조가 남한산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피신할 것을 미리 짐작하고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병사들을 매복시켜 놓았다. 그러나 인조가 남한산성에 머무는 바람에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어마가 인조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남한산성 탐방하기

1. 지화문 (남문)
지화문 사진
미션
아빠와 함께 사진 찍기남한산성 곳곳에
"사진 찍기 좋은 장소" 팻말이 있다.
아빠와 함께 인증샷을 찍어보자!
남한산성 답사의 시작은 남문에서 시작된다. 아담한 정원처럼 꾸며진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니 숲 속에 자리 잡은 커다란 성문이 나타났다. 이 문은 지화문으로, 남한산성의 남문이자 동시에 정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지화문 앞에는 "사진 찍기 좋은 장소"라는 팻말이 있었다. 은하와 함께 서서 사진을 찍어보니 남한산성의 아름다운 풍경과 지화문의 자태가 화면 안에 쏙 들어왔다.
지화문 오른편에는 한 눈에 보기에도 수령이 오래되어 보이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이 나무는 3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온 보호수로, 남한산성 곳곳에서 이렇게 오래된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2-1. 암문
지화문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왼편으로 길게 이어지는 성곽길이 나타났다. 오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낡은 성벽과 그 아래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암문 사진
미션
아빠와 함께 전쟁놀이조선 시대의 병사들처럼
암문을 통과해보자!
아빠와 아이만의 암호를 정해도 좋다
성곽길을 따라가다 성 밖으로 이어지는 작은 출입문을 발견했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적의 눈길을 피해 몰래 드나들던 암문(暗門)이었다. 은하와 함께 쪼그려 앉아 좁은 암문을 통과해 보았다. 은하는 조선시대 병사라도 된 듯이, TV에서 본 사극 말투를 쓰며 장난을 걸어왔다. 암문을 드나들며 아이와 한바탕 재미나게 놀고 나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2-2 청량당
다시 성곽을 따라 부지런히 길을 나섰다. 암문을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니 서장대 방향을 가리키는 팻말이 등장했다. 길 우측으로 난 좁은 돌계단을 올라가자 서장대의 입구에 자리 잡은 청량당(淸凉堂)이 등장했다. 이곳은 남한산성 전체를 통틀어 가장 널리 알려진 "매바위 전설"의 주인공, 이회 장군과 그 가족을 모시는 사당이다.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의 동남쪽 축조공사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청량당
2-3 수어장대
청량당 옆으로 난 문을 통과하자 멋진 위용을 뽐내며 서 있는 2층짜리 목조건물이 보였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에 축조된 네 개의 장대(將臺) 중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수어장대이다. 장대란 장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지휘소를 말한다. 장수가 머무는 곳인 만큼 위엄 있고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평소 우리의 옛 건축물에 별 관심이 없던 은하도 건물이 멋지다며 좋아했다.
수어장대
수어장대 옆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걸린 작은 누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무망루라는 이름은 영조가 지은 것으로, 인조와 그의 아들 효종과 함께, 자신들이 겪은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는 뜻을 담고 있다.
무망루 맞은편에 서 있는 담벼락 한 귀퉁이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회 장군의 전설이 전해지는 매바위다. 지금은 그냥 평범한 바윗돌일 뿐이지만 과거에는 이 바위 위에 매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은하와 함께 바위를 둘러보며 매바위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재밌으면서도 오싹한 이야기라 그런지 아이의 호응이 좋았다.
매바위 전설
수어장대 앞마당 한쪽 모퉁이에는 "매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매바위로 불리어지게 된 데에는 남한산성의 축성책임을 맡았던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다. 이화 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산성 동 남쪽 지역의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하나하나 철저하게 점검을 하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만 정해진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회 장군에게 그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서장대 앞뜰에서 이회 장군은 참수를 당하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이회 장군의 목에서 매 한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장군의 말대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이회 장군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회 장군이 책임을 맡았던 지역의 성곽을 살펴보니, 아주 견고하게 쌓아져서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성곽 공사를 함에 있어서 부정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심혈을 다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매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매 발자국을 보고 참 신기한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원본출처 :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 홈페이지
3. 우익문(서문)
수어장대를 지나 15분 남짓 걸었을까? 지화문 보다는 아담한 크기의 우익문이 나타났다. 이 문은 남한산성의 서문에 해당하는데 성문 바깥으로는 험준하고 길이 험한 등산로가 이어져 있다. 은하와 함께 가기에는 무리인 것 같아 우리는 성문 위에서 경치를 구경하기로 했다.
우익문(서문)
성문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아까와 사뭇 달랐다. 주변이 온통 숲이고, 가파른 경사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곳 우익문은 병자호란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조선의 병사들은 남한산성에 진을 치고 수많은 청나라 군사에 맞서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바로 이 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빠져나갔고 청나라 태종의 앞에 엎드려 머리를 땅에 찧으며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어야 했다. 은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니 분통이 터지는지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우리 역사의 영광적인 순간만큼이나 중요한 곳이 굴욕을 맛본 패배의 순간이 아닐까? 그 역사에 화도 내보고,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억울해 해보는 것도 아이에게는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인조의 굴욕
남한산성에 진을 친 조선군과 청나라 군사의 대치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던 어느 날, 우익문 위로 불쑥 사다리가 올라왔다. 청나라 군사들이 운제(雲梯,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는 수레)를 이용해 성 내로 침입을 시도한 것이다. 때는 한밤중이었고, 조선 병사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이곳의 방위를 맡고 있던 수어사(守禦使) 이시백은 황급히 병사들을 깨워 적과 맞서도록 했다. 병사들은 청군을 향해 화포를 발사하는 한편, 사다리를 밀어 넘어뜨리면서 처절한 항전을 펼쳤다.
이 날, 청군은 서쪽의 우익문과 북쪽의 망월대(望月臺)를 동시에 치는 양동작전을 벌였다. 전쟁을 끝낼 속셈으로 대규모 공세를 퍼부은 것이다. 무려 세 차례의 교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동이 트고, 다시 해가 저물었다. 조선 병사들은 막대한 희생 끝에 간신히 청나라 군사의 공격을 막아 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청나라 군사는 전령을 통해 최후통첩을 전해왔다. 이미 성안의 물자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잇따른 교전으로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결국 인조는 청나라의 항복 권고를 받아들였다. 청나라의 태종은 자신을 만나러 올 때 완만하고 길이 잘 정비된 지화문이 아니라 거칠고 험한 우익문을 통해 나올 것을 요구했다. 굴욕감을 안겨주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요구였다.

우익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나선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을 만났다. 이날 인조는 청 태종의 발아래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 끝에 강화협정을 맺었다. 이 사건을 ‘삼전도의 굴욕’이라 부른다. 당시 청 태종은 자신의 위세를 떨칠 요량으로 병자호란의 개요를 기록한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세웠다. 이 비석은 과거 삼전도가 있었던 장소인 서울시 송파구 잠실동에 보존되어 있다.
4. 국청사
우익문을 지나자 갈림길을 마주하게 되었다. 성곽길을 계속 걸어가면 북문을 지나 동문에 이르게 되고, 샛길로 빠지면 국청사에 도달하게 된다. 이번에는 성을 반만 돌아보기로 한 터라 국청사로 향하는 샛길을 따라 내려갔다.
남한산성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국청사는 인조 2년(1624)년 중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어 절터만 남아 있다가 1968년에 재건되었다. 인조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중축하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는데, 성 안에 국청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을 함께 세웠다. 이 절들은 무기와 화약, 군량을 보관하는 비밀창고이자 승병(僧兵)들을 육성하는 요람으로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한 마디로 이 절은 조선의 비밀 군사기지였던 셈이다.
국청사
국청사 대웅전 옆에는 부처님의 석상이 놓여있는 커다란 우물이 하나 있다. 현재는 물이 말라버렸지만, 과거 이 우물에는 만병을 고치는 신성한 약수가 흘렀다고 한다.
국청사 맞은편에는 잠시 목을 축여 갈 수 있는 약수터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다. 은하는 이 약수터를 유난히 좋아했는데, 물이 나오는 곳에 다람쥐 석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은하는 이 다람쥐를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함께 셀카도 찍는 등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이와 함께 남한산성을 찾는다면 이 약수터를 꼭 들러보는 것이 좋겠다.
국청사의 신령스런 우물
병자호란을 겪은 뒤, 효종은 북벌 계획을 세워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7개의 사찰을 건립한 뒤 승병을 양성했다. 그 아홉 개의 사찰 중 하나가 국청사인데, 이 절에는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우물이 하나 있다.

옛날, 경기도 광주에 이원령이라는 총각이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등에 종기가 나서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원령은 아버지의 병환을 호전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다녔다. 그러나 원령의 갖은 노력에도 병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어느 날, 원령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절에서 백일기도를 해야만 아버지의 종기가 나을 것이라고 했다. 원령은 그 다음 날 새벽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마을 뒷산에 있는 국청사에 올라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의 일이다. 때는 한밤중, 원령의 아버지가 극심한 갈증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물을 찾던 원령의 아버지는 금붕어가 들어있는 물그릇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들이마셨다. 얼마 전 원령이 국청사 우물에서 퍼 온 물이었다. 그런데 물을 마시자마자 그토록 낫지 않던 종기가 터지면서 피고름이 마구 쏟아지는 것이었다. 원령이 놀라서 살펴보니 아버지의 병환은 호전된 반면, 물속에 들어있던 금붕어는 별안간 색갈이 시커멓게 변한 것이었다. 원령과 아버지가 국청사 우물물을 길어다 금붕어를 넣어보니 거짓말처럼 원래의 황금빛을 회복했다. 원령의 아버지가 국청사 우물로 종기를 고쳤다는 소문이 퍼지자, 각처에서 많은 환자들이 이 우물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원령은 실존인물로 광주이씨를 중흥시킨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원본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 문화원형백과
5-1. 효자정
국청사 아래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울창한 숲 속에 각양각색의 산새들이 쉴 새 없이 지저귀며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은하는 처음 보는 산새들이 신기한지 한참 동안 숲 속을 들여다보았다. 아파트 숲에서 자란 은하에게는 이 모든 것이 낯설고 흥미롭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숲길을 지나가 오른편으로 커다란 우물가가 나타났다. 이 우물의 이름은 효자정(孝子井)으로, 조선시대 어느 효자가 이곳에서 받아 온 우물물로 병든 부모님을 고쳤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효자정 사진
미션
아빠와 우물 마시기서로에게 효자정 우물물을 떠먹여주자!
러브샷을 하듯이 동시에 마시는 것이 포인트!
5-2. 숭열전
효자정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니 우측으로 길게 이어지는 좁은 산길이 보였다. 관문처럼 서 있는 솟대를 지나 길을 따라가자 태극 문양이 새겨진 세 개의 문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문 너머에 있는 사당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위패를 모신 숭열전이다. 한참 조선시대 이야기를 듣던 은하는 갑자기 백제 시조와 관련된 사당이 등장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숭열전은 인조가 자신의 꿈에 나타나 위험을 경고했던 온조왕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당이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자 은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숭열전
6. 침괘정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남한산성 로터리에 있는 침괘정을 향해 올랐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자 아담한 건물 정자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침괘정은 남한산성을 중축하던 당시 함께 지어진 것인데, 한성백제시절 이 터에 온조왕의 왕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물론 진위 여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침괘정
침괘정은 남한산성 로터리 부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 서서 바라보는 주변 풍경이 꽤 볼만했는데, 가까운 곳에 행궁이 자리 잡고 있어 궁궐 풍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경복궁처럼 규모가 큰 궁궐만 보았던 은하는 작고 아담한 행궁이 신기했는지, 한 번 들어가 보자고 졸라댔다.
7. 행궁
남한산성의 백미를 꼽자면, 행궁이다. 행궁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을 뜻한다.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수원 화성에 있는 세 개의 행궁이 대표적이다. 남한산성의 행궁은 다른 두 행궁에는 없는 정무시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한 특징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인조는 전쟁을 염두 해 두고 남한산성을 중축했기 때문에 행궁 또한, 유사시 한양에 있는 궁궐 대신 사용할 목적으로 지었다.
효자정 사진
미션
은혜 갚은 느티나무 찾기행궁 안팎으로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많이 있다. 이 중에. 이야기에 나오는 은혜 갚은 느티나무를 찾아보자!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漢南樓)를 지나 외삼문(外三門)과 중문(中門)을 통과하자 비로소 궁궐이 모습을 드러냈다. 협소한 부지 안에 왕의 거처는 물론, 문무백관들의 숙소와 정치, 행정기관, 제단까지 배치하다 보니 길이 미로처럼 복잡했고 수많은 문과 계단을 거쳐 가야 했다. 은하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곳은 왕의 침소로 사용되었던 내행전(內行殿)이었다.
인조가 사용했던 의자와 가구 등이 재연되어 있어 당시 풍경을 좀 더 생생하게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은혜 갚은 느티나무
옛날 옛적, 산성안 마을에서는 수시로 장날이 열렸다. 그 날도 장이 열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적였으나, 행궁 뒤뜰에 있는 마을에서 제일 큰 느티나무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한 젊은이가 느티나무 주변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젊은이가 잠에서 깨자 나무는 자신을 ‘못난이 느티나무’라고 소개했다. 비쩍 마른데다 잎 새도 듬성듬성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시험에 떨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던 젊은이는 나무의 처지에 크게 공감했다. 그 또한 가족과 친구들을 볼 면목이 없어 우울해 하고 있던 차였다. 젊은이는 느타나무 아래에 거처를 마련해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며 지냈다. 그러는 동안 젊은이와 느티나무는 서로를 의지하며 깊은 우정을 쌓았다.
어느 날, 젊은이가 일을 하러 간 사이에 행궁을 지키던 병졸들이 느티나무를 베기 위해 도끼를 들고 찾아왔다. 나무의 비명소리를 듣고 젊은이가 달려오는 바람에 참사는 피할 수 있었지만, 이미 도끼날이 나무를 파고 든 뒤였다. 그때 마침 인조 임금이 행궁 안을 시찰하던 중 이 광경을 목격했다. 인조는 나무를 구해달라는 젊은이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병졸들을 물렸다. 도끼에 맞은 탓에 느티나무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해 여름, 도처에 가뭄이 이어졌다. 땅이 쩍쩍 갈라지는데 비 한 방울 오지 않자 마을 사람들은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인조는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아 괴로워하며 느티나무 앞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렸다.
며칠이 지났을까, 갑자기 하늘에서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조와 마을사람들은 신성한 느티나무가 비를 내려 인조로부터 입은 은혜에 보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돌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마을 사람들은 느티나무에 제사를 지냈고, 신기하게도 병자가 하나씩 줄어들었다. 그 후, 느티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어 지금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답사를 마치며...
은하와 함께 행궁 뒤뜰을 거닐며 남한산성 답사를 마무리했다.
오래된 느티나무에 나란히 등을 기대어 앉아, 멀리 우뚝 솟은 남한산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잊어버렸던 여유가 되살아난 듯 마음이 한층 풍요로워졌다.

은하는 남한산성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 꼭 지키라고 신신당부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으리라 다짐했다.
숨겨진 남한산성 이야기: 매화낙터 전설
조선시대, 한양에 임도령이라는 청년이 살았다. 임도령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았는데, 집안 형편 때문에 글도 배우지 못하고 매일 끼니걱정을 하며 날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어느 이른 봄날, 임도령은 광주에 산다는 친척집에서 쌀을 얻어오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하던 그는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날은 저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임도령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여정을 이어가기 힘든 상황이었다.그때 저 멀리 불빛 하나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임도령은 간신히 몸을 움직여 빛을 향해 걸어갔고, 자그마한 집 한 채를 만났다. 그 집에는 아름다운 모습을 한 묘령의 처녀가 혼자 살고 있었다. 자신을 용녀(龍女)라고 소개한 처녀는 임도령의 딱한 사연을 듣고 가엽게 여겨, 그에게 하루 머물고 갈 것을 제안했다.
처녀 혼자 있는 집에 들어서자니 낯이 뜨거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임도령은 용녀가 건네는 술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젊은 남녀 사이에 술잔이 오가다 보니 자연스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임도령은 용녀가 권하는 술을 먹고 정신이 몽롱해 졌으며, 얼떨결에 그녀와 동침하게 되었다.
아침이 되자, 임도령은 용녀의 집을 떠나 다시 길을 나섰다. 얼마 못가, 용녀가 그리워진 그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는데 집도 용녀고 간 곳이 없고 한 그루의 고목나무가 비스듬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옆에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이 서 있었는데 바로 용녀였다.
“나는 원래 5백년 묵은 암구렁이요. 남자인 당신의 힘을 빌어, 이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소.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덕이오. 아무쪼록 평안하게 사시기를...”
용녀는 말을 마치더니 용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갔다. 잠시 후, 하늘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잠시 후 비늘 세 개가 떨어질 것이니, 그 비늘이 떨어진 자리에 가문의 묘자리를 쓰라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하면 자손 중에 반드시 훌륭한 장수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용녀의 말 대로 하늘에서 비늘 세 개가 떨어지더니 매화나무 세 그루로 변했다. 임도령은 매화나무 아래로 아버지의 산소를 이장했는데, 이후 임도령의 집안에서 병자호란 때 활약한 명장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 이 묘자리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있는 우익문 바깥쪽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매화낙터로, 정확한 위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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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역사탐방을 하며 미션을 수행할 수 있도록 게임보드를 제공해 드립니다.

남한산성
1.자화문, 2.수어장대, 3.우익문, 4.국청사, 5.숭열전, 6.침괘정, 7.행궁
1.아빠와 함께 사진 찍기 남한산성 곳곳에 사진찍기 좋은 장소 팻말이 있다. 함께 인증샷을 찍어보자
2.아빠와 함께 전쟁놀이 조선 시대의 병사들처럼 암문을 통과해보자! 아빠와 아이만의 암호를 정해도 좋다.
5.아빠와 우물 마시기 서로에게 효자정 우물물을 떠먹여주자! 러브샷을 하듯이 동시에 마시는 것이 포인트~!
7.은혜 갚은 느티나무 찾기 행궁 안팎에는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많이 있다. 이 중에서, 이야기에 나오는 은혜 갚은 느티나무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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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소개

남한산성이 위치한 경기도 광주는 지역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도자기 등을 소재로 다음과 같은 축제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광주 왕실도자기 축제 (5월 경)
조선시대 왕실에 올리던 도자기를 생산하던 광주의 명성을 이어가는 축제. 특별기획전시, 전시, 판매, 도자체험, 축하공연 등이 마련되어 있다.
세계도자비엔날레 (5월 경)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를 대상으로 한 도자기 축제. 역사성은 물론이고, 도자기에 대한 현대적인 시각과 해석 등을 볼 수 있다.
남한산성문화제 (10월 경)
조선의 수도인 한성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인 광주의 역사성을 기념하는 축제.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관람하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찾아가는 길 | 남한산성 남문으로 찾아가자

약도 아래 텍스트 참조
자가용 이용시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 남문주차장)
지하철 이용시
지하철 8호선 산성역 하차 후 2번 출구
→ 9번 버스 탑승
→ 남문매표소 정류장 하차

탐방 추천 도서

  • 남한산성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출판
    병자호란으로 인해 47일 간 남한산성에 머물게 된 인조 앞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다툼을 배경으로, 당시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 남한산성과 팔도사찰 남한산성과 팔도사찰
    전보삼 지음 / 대한불교진흥원 출판
    조선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위치적 특성에 맞게, 불교라는 종교를 뛰어넘는 호국과 애국의 의미가 가득한 남한산성의 사찰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 글/사진  │강민석
· 그림      │홍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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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4-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