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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도 거리를 가지고 있다

공포도‘거리’를 가지고 있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 vs 나카시마 데츠야의 《고백》
공포에는 거리가 있다. 거리에 따라 공포의 크기와 모습도 달라진다. 멀리, 아득하고 막연한 공포가 조금씩 다가올 때 고통도 조금씩 커진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로 변하는 순간, 공포는 죽음보다 비참한 결말을 만들어낸다.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고백』은 그 공포와 고통의 존재, 둘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거리 사이에서 인간들이 벌이는 비극적 이야기들을 펼쳐낸다. 『고백』은 방송에서 글쓰기를 시작한 가나에가 일본 '추리 소설' 신인상을 받은 단편 「성직자」의 뒷이야기를 장편으로 묶은 소설이다. 가나에의 추리소설은 공포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 공포를 맞이해야 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그들의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감정과 관계에 집중한다.
《고백》도 마찬가지다. 살인과 복수 사이에 긴 거리를 두고 한걸음씩 그것을 좁혀가는 과정에서의 공포를 때론 날카롭게, 때론 가슴 아프게 드러내고 있다. 그것도 겨우 열세 살 중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네 살 난 어린 여자아이가 학교 수영장에 빠져 죽은 사건이 발단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1학년을 마치고 봄방학에 들어가는 마지막 종례시간에 여교사 유코가 마치 남의 이야기 하듯 자신의 딸의 죽음 진상과 학생들 중에 있는 범인에 대한 복수를 고백하듯 조용히 말한다.
△ 영화 《고백》 포스터
학년을 마치는 날의 들뜬 분위기, 아이들의 소란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유코가 들려주는 아이의 죽음, 제자이고 미성년자여서 법조차 죄를 묻지 않는 두 범인에 대한 잔인한 복수의 전말은 냉정하면서도 잔인하다. 유코는 범인인 두 아이의 비뚤어진 심리와 갈등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그것이 불러일으킨 살인의 과정을 알아내서는 교사가 아닌 딸을 잃은 어머니로서 사적 응징을 가한 셈이다. 그리고 그는 학교를 그만둔다.

소설 『고백』에서 공포의 거리는 처음 유코가 살인의 전말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만들어져 있다. 처음 그 공포는 아주 멀리, 반 아이들이 "도대체 뭔 이야기야"라고 할 정도로 아득한 곳에 있지만, 유코의 고백을 들으면서 공포는 조금씩 거리를 좁혀온다. 그리고 그녀가 정확한 추리와 증거로 딸의 죽음을 타살로 결론 짓고는 비록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A, B라는 식으로 범인을 말했을 때 그 공포는 눈앞에까지 다가왔고, 마침내 그녀가 복수로 범인들의 급식우유에 에이즈에 걸린 사람의 피를 넣어 마시게 했다는 사실을 밝혔을 때 공포는 그들의 몸 속까지 파고 들게 했다.
그래 놓고는 또 다시 공포는 거리를 만든다. 피 섞인 우유를 마신 유아와 나오키에게 에이즈 감염이란 공포가 시작된다.
그러나 에이즈는 금방 죽는 병이 아니다. 발병까지는 5년에서 10년이란 시간이 있다. 그 시간만큼이나 죽음은 현실과 아직 많이 떨어져 있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죽음이란 결과보다는 그 결과까지 이어지는 긴 시간이다. 언제 발병이 되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그것이 두 사춘기 소년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소설은 두 소년은 물론 그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고백을 통해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게 보여준다.
『고백』이 매력있는 소설인 이유는 그들의 고백이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은 과거를 가지고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함께 가지고 간다. 살인에 얽힌 진상을 이야기하면서 각자의 상처와 그로 인한 고통과 비뚤어진 욕망과 자기파멸로 나아간다. 열세 살 아이들의 것이라고 깔보지 말라.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뒤틀림은 물론 일본 사회와 학교에 스며있는 모순과 허위의식, 폭력성과 소외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그것들을 살인 사건과 절묘하게 결합시킨다. 슈아의 친구가 된 여학생 미즈키가 유코에게 편지 쓰듯 고백하는 글에서는 슈아에 대한 아이들의 정신적 폭력과 슈야의 역공으로 학교에 만연한 폭력을, 새 담임선생의 위선적 행동을 통해 교사들의 교육의식을 비판한다. 에이즈 감염 공포로 학교에 나오지 않은 나오키와 그의 어머니의 독백으로는 열등의식과 그것에서 비롯된 복수심, 부모의 어긋난 자식사랑이 어떤 공포와 비극을 잉태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슈야의 고백은 어떤가. 그는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세상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한 소년이다. 그는 떠난 어머니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갈망한다. 그것을 위해 소년은 거꾸로 가는 시계, 열면 전기가 흐르는 지퍼를 발명했고, 그 지퍼로 아이를 죽일 생각을 했다. 이 선과 악의 극단적 양태는 겉으로는 정반대이지만 사실은 하나이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어머니가 곁에 있는 시절로 돌리거나, 세상의 관심을 끌어 어머니가 자기에게 오도록 하는 길이다. 그것을 위해 소년은 이중인격을 드러내는 것도,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무모하게 짓밟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영혼이 망가진 그는 영악하게 14세까지는 죄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회제도를 악용할 줄도 안다. 그러나 그 모두 불가능한 꿈일 뿐이다.
그런 슈야를 유코는 잔인한 방식으로, 서서히 그리고 완벽하게 응징한다. 법은 정의가 아니다. 그녀에게 정의는 자신이고, 직접적인 되갚음이다. 평생 죄의 무게를 등에 지고 살아라. 그리고 네가 내게서 빼앗아간 소중한 생명과 똑같이 너에게 소중한 생명을 빼앗겠다. 그것도 내가 아닌 너의 손으로. 그 죄책감, 소중한 것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벌이다. 우유에 에이즈에 감염된 피를 섞었다는 거짓말로 공포를 만든 것도, 슈아가 학교 강당에 설치한 폭발물을 그의 어머니가 있는 대학연구실로 옮긴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고백》은 성직자와 전도자(유코), 순교자(미즈키), 구도자(나오키), 자애자(나오키의 어머니), 신봉자(슈아)란 수식을 붙였다. 지독한 역설이고 조롱이다. 과연 그들은 성직자이고 구도자이며 신봉자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용납할 수 있나? 유코의 복수는 정당한가? 결국 나오키를 정신착란자로 만들어 어머니를 죽이게 하고, 슈야로 하여금 미즈키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게 만들어 놓고는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어떤가요? 이것이 진정한 복수입니다. 진짜 지옥입니다. 당신의 갱생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지 않나요?"라고 말할 수 있나? 열세 살 소년들의 아무 가책 없고 영악한 살인도 섬뜩하지만, 그것을 벌하는 한 여교사의 차갑고 끈질기고 치밀한 복수도 섬뜩하기는 마찬가지다.
소설 『고백』은 이 둘의 모습을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인물로 엮었다. 각자의 고백형식이지만 굳이 소년과 선생, 아이와 어른의 깊이와 차이를 구분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설이기 때문이다. 비록 소년의 고백이라 할지라도 속은 어른의 생각, 작가의 언어로 채울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이 이 소설의 주제와 이야기를 깊게 했다. 그러나 영화는 그럴 수 없다. 소년은 소년다운 언어와 행동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리얼리티다. 나카시마 데츠야 감독의 《고백》은 그 점을 간과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쩔쩔맸다. 할 수 없이 선택한 것이 침묵과 느린 영상이다. 이미지로 언어와 정서를 대신한 셈이다. 그것이 소설의 살과 뼈를 헐겁게 했고, 고백을 통한 이야기의 연결을 끊기게 했으며, 인물들의 생동감을 떨어지게 했다. 가장 치명적 결함은 소설이 가진 공포의 거리를 없애버렸다. 소설을 읽은 사람들조차도 공포가 가진 시간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그보다는 아이들의 언어와 사고로 바꾸는 것이 나을 뻔했다. 어차피 《고백》은 소설이나 영화 모두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니까.
주제가 무겁다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나 소크라테스의 시와 철학적 언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한마디 툭 던지는 유치한 말, 이상한 행동에서도 얼마든지 선과 악, 죄와 벌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낼 수 있다.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는 소설이냐, 영화냐에 따라 달라야 한다. 그것을 모르거나, 무시하거나, 침묵으로 넘어가거나, 멋을 부리듯 추상적인 영상언어로 어정쩡하게 대신하면 《고백》에서 유코의 말처럼 "소중한 것도 함께" 사라진다. 영화 《고백》이 소설 『고백』처럼 멋진 작품이 될 수 없었던 이유이다. 보고 나면 원작을 읽고 싶은 영화가 있다. 원작을 먼저 읽고 봐야 하는 영화도 있다. 그렇다면 《고백》은 어느 쪽일까? "원작은 꼭 읽어라. 영화는 굳이 안 봐도 된다."
『고백』이 매력있는 소설인 이유는 그들의 고백이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은 과거를 가지고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함께 가지고 간다. 소설 『고백』은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인물로 엮었다.
그러나 나카시마 데츠야 감독의 《고백》은그 점을 간과했다. 가장 치명적 결함은 소설이 가진 공포의 거리를 없애버렸다. 소설을 읽은 사람들조차도 공포가 가진시간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고백 책표지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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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2-0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