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부여

백제의 천년고도를 만나다 충청남도 부여군 일대
궁남지
아이와 떠나는 여행은 아이에게는 물론 부모에게도 좋은 교감을 이룰 수 있는 선물입니다. 그만큼 아이와의 여행은 교육과 훈육의 목적이 아닌, 아이의 눈높이와 아이의 걸음을 따라 함께 놀이하며 소통하는 진정한 교감의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여행기는 아이와 부모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인정 속에서 여행하고, 더 나아가 바람직한 가족 문화를 구현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자 기획 되었습니다. 여행기 본문 속 미션과, 함께 첨부된 게임보드 등을 활용한다면 아이와 보다 즐거운 여행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탐방안내

탐방장소

충청남도 부여군 일대

탐방코스

궁남지(미션-활동미션! 아빠와 자전거를 타며, 서동의 사랑이야기를 들어보자),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 박물관, 정림사지 5층 석탑(미션-그림미션! 정림사지 박물관의 집입로 바닥에 있는 백제의 문양을 그려보자!), 부소산성, 태자골(미션-활동미션! 오늘은 백제의 왕자처럼 멋지게 걸어보자), 낙화암(미션-한자쓰기 미션! 낙화암 세글자의 한자를 따라 써보자!)
예상 소요 시간은 3시간
이번 여행은 부여의 세 군데 장소를 다니며 백제의 흔적을 만나는 코스로 이루어져있다. 장소 간의 이동거리와 아이의 체력을 고려하여 이동하도록 하자.
아이와 함께 이야기를 찾으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 여행의 속도라면 3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다. 아이의 시선과 속도에 맞추어 걷는 여유를 가져보자.

소요경비

· 국립부여박물관 : 무료관람
· 정림사지 박물관 : 어른 1,500원 / 청소년 900원 / 아이 700원
· 부소산성 : 어른 2,000원 / 청소년 1,100원 / 아이 1,000원
아빠와 딸
아빠와 딸

준비물

· 미션을 수행할 연필과 지우개
   (그림 미션과 한자쓰기 미션이 준비되어 있다.)
·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가벼운 옷차림

찾아오는 길

· 부여군청 사거리로 찾아가자!
   충남 부여군 부여읍 사비로 33(동남리 725)

· 대중 교통 이용 시 (서울 기준)
   ① 남부터미널 - 부여시외버스터미널 (약 2시간 소요)
   ② 동서울터미널 - 부여시외버스터미널 (약 2시간 40분 소요)

· 자가용 이용 시 (서울 기준)
   ① 서울 - 경부고속도로 - 천안JC - 천안논산고속도로 - 서공주JC - 공주서천고속도로 - 부여 IC - 부여군청
   ② 서울 - 서해안고속도로 - 당진JC - 당진고속도로 - 서공주JC - 공주서천고속도로 - 부여 IC - 부여군청
정림사지박물관 지도
※ 출처 : 정림사지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jeongnimsaji.or.kr/introduce/contactus.asp)
함께 보기
사회 교과서

우리 아이 교과서에 나와요!

5학년 1학기 사회
2. 하나된 겨레

(3) 삼국의 성립과 발전
고구려와 신라에 비하여, 백제는 알려져 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 서동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백제 이야기 답사를 통해 그 시대의 문화적 융성과 경제적 발전을 살펴보자.
얘들아 백제 여행 떠나볼래 책표지

관련 도서

얘들아 백제 여행 떠나볼래
권정언, 최춘자, 홍은경 지음 / 출판 살림어린이
"선생님 저자 되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책이다. 백제의 도읍지였던 서울, 공주, 부여에서, 백제 문화가 건너간 일본의 도시인 오사카, 나라, 교토의 이야기를 통해, 백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면서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안목을 갖추도록 이끈다.
타박타박 부여 나긋나긋 사비 책표지
타박타박 부여 나긋나긋 사비
김정현 지음 / 출판 비하인드
부여의 구석구석을 여행 다니며 사진을 통해 그 기억을 담아냈다. 아이와 떠나는 답사여행에 역사적 이야기 뿐 아니라, 사진 등의 비주얼도 함께 담아낼 수 있다면, 아이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알고가기

탐방 길라잡이

1. 진귀한 백제 문화의 체험

백제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은 상당수가 유실되거나 파손되었지만,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는 그 시대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다. 아이와 함께 부여를 둘러보며, 한반도를 넘어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백제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느껴보자.

2. 설화와 전설을 찾아서

백제는 신라, 고구려 못지않게 많은 수의 설화와 전설을 품고 있다. 서동요의 전설이 깃들어 있든 궁남지, 의자왕과 삼천궁녀가 몸을 던진 낙화암 등 부여 곳곳에 숨어있는 백제의 이야기들을 만나보자.

3. 가족과 함께 하는 고즈넉함

부여에는 부소산성, 궁남지, 능산리 고분군 등 가족과 함께 조용히 산책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적지들이 많이 있다. 바쁘고 시끄러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가족과 함께 여유 있는 마음으로 답사여행을 즐겨보자.

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법

1.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하자

설화와 전설은 이야기 속에 듣는 이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정림사지의 시간과 공간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생활을 그려보며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여행을 만들어보자.

2. 아이의 눈높이로 시간을 즐기자

부모의 설명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아이의 눈높이와 발견이다. 부모가 알려주는 새로운 사실과 이야기들도 재미있지만, 아이의 눈에 비치는 모습들을 함께 발견해보는 것도 부모에게 또다른 교육의 경험이 될 수 있다.

3. 이야기의 힘을 전해주자

서동은 아이들의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 선화 공주와의 사랑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의 내일도 행복한 이야기들을 쌓아감으로써 함께 그 행복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 이야기가 가진 힘을 전해주며, 답사여행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자.
서동요 이야기
백제 중흥을 꿈꾼 무왕의 사랑 이야기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마(薯)를 캐다 팔며 생계를 꾸려가는 아이라고 해서 서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단순한 장사치가 아니라 재주와 도량이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청년이었는데,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꾀를 내었다. 신라 서라벌로 가서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이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어 두고 서동(薯童)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이 서동요(薯童謠)는 신라 대궐에까지 퍼져 갔고, 선화공주는 왕의 미움을 사 귀양길을 떠나게 되었다. 왕후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겨 순금 한 말을 안겨주었다. 선화공주가 금을 안고 귀양길에 나서는데, 한 남자가 나타나 그녀의 호위를 자처했다. 알고 보니 그가  바로 서동이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고 부부가 되었다. 선화공주는 왕후가 준 순금을 내보이며, 이것만 있으면 평생 돈 걱정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서동이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러한 순금이 흙덩이처럼 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이름난 법사의 신통력을 빌어 금덩이를 신라의 궁궐에 옮겨놓았다. 진평왕은 서동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깨닫고 선화공주와의 혼인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서동은 이 일로 세상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백제 왕의 자리에 올랐다.
탐방하기
출발
이야기평양은 적막한 중에 번화가 드러나고 경주는 번화한 가운데 적막이 숨어 있는데, 백제의 부여는 때를 놓친 미인같이, 그악스러운 운명에 부대끼다가 못다 한 천재자(天才者)같이, 대하면 딱하고 섧고 눈물조차 피어오릅니다. (중략) 얌전하고 존존하고 또 아리땁기도 한 것이 부여입니다. 출처- 삼도고적순례(三都古跡巡禮), 육당 최남선
부여는 7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온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다. 백제의 26대왕, 성왕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사비(당시의 부여)로 천도를 단행하고, 사비성을 왕성으로 삼았다. 이후 부여는 123년 간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부여를 도읍지로 삼은 후, 백제는 성왕, 위덕왕, 무왕의 시대를 거치며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백제는 한강 일대로 영토를 확장하며 그 위세를 떨쳤고, 백제 문화의 르네상스를 열어 젖혔다.
안내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성왕
성왕은 백제의 제 26대 왕으로, 백제의 부흥기를 이끈 왕으로 유명하다. 성왕은 결단력 있고 지혜와 식견이 빼어났던 인물로, 서기 538년에 나라의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불교문화의 번성에 힘썼다. 백제의 불교미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던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성왕은 중국의 이름난 건축가와 승려들을 초빙해 사찰을 겁립하고, 불상을 제작하게 하였으며 일본에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다. 성왕은 서기 554년, 신라와의 전쟁 중에 사망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성왕이 신라군을 습격하던 중 복병을 만나 전사했다고 간략하게 쓰여 있으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보다 상세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554년 음력 12월, 성왕의 아들이자 태자인 창이 신라로 쳐들어가 요새를 쌓고 있었는데, 성왕은 이를 위로하기 위해 관산성으로 향했다. 신라군은 성왕이 창을 만나러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복병을 심어 기습공격을 가했다. 성왕은 휘하에 50명의 병사만을 거느리고 있던 터라 금세 붙잡혔고 적장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Point 01궁남지
궁남지 사진
부여 군청 사거리에서 사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짙게 우거진 버드나무와 광활한 연못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공원을 만나게 된다. "서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곳은 한국 최초의 인공정원으로 알려진 "궁남지"이다.

궁남지를 만든 이는 "서동요" 설화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백제 제 30대왕, 무왕이다. "삼국사기"백제 무왕조 편을 보면 "무왕35년 3월에 궁남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쓰여 있다. "무왕 39년 봄 3월에는 왕과 왕비가 연못에 배를 띄웠다" 는 기록도 있는 것을 보면 무왕은 이곳에서 왕비와의 망중한을 즐기며 둘만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안내용의 아들, 서동과 궁남지
삼국유사 무왕 편에는 무왕이 용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쓰여 있다. 부여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무왕의 탄생설화 또한 이와 비슷하다. 서동의 어머니는 젊은 과부였는데 어느 날, 처음보는 정체불명의 청년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남몰래 청년과 밀회를 즐기던 과부는 덜컥 임신을 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청년이 어디에 살고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여느 때처럼 청년이 과부를 찾아왔고, 과부는 아버지의 계획대로 그의 옷에 몰래 실을 묶어 두었다. 다음 날, 청년이 떠나자 과부는 실을 쫓아갔고 어느 연못에 도착했다. 청년의 정체는 연못 속에 사는 어룡이었던 것이다. 과부가 어룡과의 관계로 낳은 아이는 훗날 백제의 30대 왕 무왕이 되었고, 어룡이 살던 연못은 궁남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미션포토존 미션
궁남지에서는 자전거 무인대여가 가능하다.
아빠와 함께 자전거를 타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들어보자.
서동의 길 사진
궁남지는 백제 멸망 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본래의 모습을 잃어갔다. 연못에 조금씩 흙이 차오르며 거대한 늪지대로 변해버린 것이다. 1960년대, 3년간의 복원공사를 통해 연못과 버드나무가 우거진 옛 모습을 되찾았고, 지금은 해마다 여름이면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부여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거듭났다.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한 궁남지는 다양한 수생식물과 곤충, 오리 등의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어 생태학습의 장소로서도 손색이 없다. 자녀와 함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이다.
Point 02국립 부여 박물관
국립 부여 박물관 사진
서동공원에서 서동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궁남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꺾어서 가면 국립부여박물관에 다다른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충청남도 서부 일대에서 출토된 유적, 유물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특히 선사시대와 백제시대의 유물들이 많다. 백제의 뛰어난 금속공예기술을 보여주는 국보 제 287호 백제금동대향로, 백제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국보 제 293호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등 국립부여박물관에는 백제 문화의 르네상스를 보여주는 진귀한 유물들이 가득하다.

국내의 대표적인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부여 답사에서 국립부여박물관을 들르지 않으면 백제 답사가 아니라 부여지방 풍광기행에 불과하다"라고 쓰기도 했다.
안내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 성왕 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이는 대형 향로다. 연꽃의 몸체 위에 봉황이 올라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전체가 금칠이 되어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를 자세히 살펴보면 몸체 곳곳에 불사조, 호랑이, 사슴 같은 동물과 상상 속의 신선들, 계곡과 폭포 같은 자연 경관이 조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X선 조사를 통해 매우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계되었음이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향을 피우면 연기가 봉황의 가슴 부위에서 솟아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백제인들이 단순히 예술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서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잘 보여준다.
백제금동대향로 사진
Point 03정림사지 5층 석탑
정림사지 5층 석탑 사진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계백로를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탁 트인 잔디밭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석탑하나를 만나게 된다. 정림사 터에 자리잡고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고려시대 불상이 모셔져 있는 전각 하나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건물도 보이지 않는 탁 트인 절터에 홀로 서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외로워 보인다.

국보 제 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현존하는 두 개의 백제 석탑 중 하나다. 무왕과 의자왕이 백제를 통치했던 7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의 목탑과 비슷한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매우 크고 웅장하면서도 온화한 분위기를 띄고 있는 석탑으로, 부드러움 속에 우아함을 갖춘 백제 불교미술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안내백제의 멸망과 정림사지 5층 석탑
정림사는 성왕이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는 정림사지 5층 석탑터만 남아있지만, 절의 규모나 위치로 볼 때 백제 불교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왕에서 의자왕이 이르기 까지, 1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 왔던 정림사도 백제의 멸망과 함께 화마에 휩싸였다. 소정방을 필두로 한 당나라 군대가 사비성을 함락하고 정림사를 짓밟은 것이다. 그 흔적은 정림사지 5층 석탑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탑신에 당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것을 기리기 위히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멸망한 백제의 한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석탑이기도 하다.
Point 04 정림사지 박물관
정림사지 박물관 사진
정림사지 5층 석탑 옆에 자리하고 있는 정림사지 박물관은 백제의 불교문화와 관련된 유적,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작은 규모의 박물관이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세워지기 까지의 과정이 모형으로 제현되어 있으며, 미니어처로 복원된 정림사의 원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 내에 카페가 마련되어 있어 잠시 지친 걸음을 달래며 쉬어가기에 좋다.
미션백제의 전통 문양 그리기
정림사지 박물관 진입로에는 바닥에 특이한 문양의 타일이 있다.
백제의 전통 문양을 따라 그려보자.
전통 문양 사진
Point 05부소산성
부소산성 사진
부여읍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는 부소산성(扶蘇山城)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를 지키던 최후의 보루였다. 애초에 진흙과 돌로 쌓은 성인데다 세월이 흐르면서 예전 모습을 잃어버려 산성 특유의 웅장한 위용은 찾아볼 수 없지만, 낙화암, 태자골, 고린사 등 백제의 흔적을 간직한 명소들은 여전하다.

거대한 성문을 지나 부소산성으로 들어서면 완만한 산책로가 눈앞에 펼쳐진다. 부소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부소산은 해발 100미터가 채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이다. 경사가 완만해 아이와 함께 둘러보기에 좋을 것이다.
삼충사 사진
입구를 통과해 조금 더 올라가다 보면 숲 속에 자리 잡은 아담한 사당 하나가 눈에 띈다. 백제의 삼충신이라 불리는 계백, 성충, 흥수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삼충사(三忠祠)다. 사당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의 걸려있는 세 충신의 초상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황산벌 전투의 주역 계백은 영화나 TV 드라마 속에도 자주 등장한다. 상대적으로 성충과 흥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들은 신라와 당나라의 침입을 예견하고 의자왕에게 마지막까지 충언한 백제의 진정한 충신이다.
안내황산벌 전투와 계백 장군의 최후
신라와 당나라의 18만 연합군이 사비성을 향해 진격해 오자 의자왕은 계백(階伯) 장군을 황산벌로 보내 적을 막도록 하였다. 계백은 "한 나라의 사람으로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상대하게 되니 국가의 존망을 가늠할 수가 없다. 내 처자가 적들에게 붙잡히어 노비가 되어 욕된 삶을 어어나가는 것은 차라리 쾌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말을 남기며 손수 처자식을 베고 전장에 나섰다.
계백은 5천 명의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 전투에 나서 기대 이상의 선전을 거두었고, 신라의 화랑 관창을 포로로 붙잡았다. 계백은 관창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기가 나서는 것을 보고 그를 풀어주었지만, 어린 관창은 돌아가지 않고 다시 백제 진영으로 뛰어 들어와 싸웠다. 다시 관창을 붙잡은 계백은 할 수 없이 소년의 목을 베어 신라 진영으로 돌려보냈고, 이에 격분한 신라군은 총공세를 펼쳐 계백 장군을 죽이고 백제군을 물리쳤다.
Point 06태자골
태자골 사진
삼충사를 지나면 본격적인 산책로가 펼쳐진다. 수목이 우거진 완만한 오속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부소산 중턱인데, 여기서 산책로가 크게 두 길로 갈린다. 동쪽 방향으로 난 길은 궁녀사와 태자골 산책길 군창지를 지나가고, 서쪽 방향으로 난 길은 낙화암과 고란사로 이어진다.

동쪽 길로 걷다 보면 "태자(太子)골 숲길"이라는 간판이 나타난다. 이 길은 부소산성의 여러 산책로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즈넉한 것으로 유명하다.

"태자골" 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길이 백제의 왕자들의 산책로였기 때문이다.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과 나무가지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백마강의 푸른 물결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청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왕자들의 산책로로서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길이다.
미션왕자처럼 걸어보기
태자골은 옛 백제 왕자들의 산책로였다.
오늘 만큼은 백제의 왕자가 되어 이 길을 지나보자!
태자골 사진
궁녀사 사진
태자골 숲길을 걷다 보면 삼천궁녀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궁녀사(宮女祠)"를 지나치게 된다. 작은 사당 안에는 당시 궁녀들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걸려 있다. 이 사당은 1966년에 세워진 것으로, 헌판은 김종필 전 총리가 직접 쓴 것이다.

궁녀사를 지나면 점점 경사가 생긴다. 완만한 길을 걷는 것 보다야 힘이 들지만 아스팔트나 벽돌이 아니라 고운 흙길이기 때문에 조금은 편안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태자골 숲길의 끄트머리에는 백제 왕자들이 목을 축였다는 "태자골 약수터"가 기다리고 있다. 메마른 목을 축이고 한 숨 돌리면서, 산책에 나선 백제 왕자가 된 기분을 만끽해보자.
Point 07낙화암
낙화암 사진
낙화암(落花岩)은 부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자, 부소산성 산책길의 백미다. 신라와 당나라의 공격에 백제가 패망의 길을 걷게 되자, 의자왕과 삼천궁녀가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 낙화암은 삼천명이 넘은 사람들이 몸을 던지기에는 장소가 협소하다. 낙화암이라는 지명을 들으면 거대한 바위를 연상하기 쉬운데, 실제 모습은 조금 다르다. 낙화암에 도착하면 날카롭고 거친 바윗돌들 위에 우뚝 서 있는 작은 정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 위에 오르면 낙화암의 가파른 절벽 아래로 유유히 흘러가는 백마강의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낙화암의 가장 큰 볼거리는 바로 백마강이다. 완만한 평야지대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넓고 푸른 백마강의 자태는 부소산성에서만 즐길 수 있는 절경이다.
미션낙화암 한자 쓰기
낙화암에는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나라를 사랑하는 여성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 마음을 기리며 낙화암 세 글자를 따라 써보자.
고란정 사진
낙화암 아래로 가파르게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절벽 아래 위치한 작은 절 하나가 보인다. 낙화암의 또 다른 명물 고란사(皐蘭寺)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백제의 왕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만든 정자가 절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란사가 유명한 이유는 절 뒤편에 마련되어 있는 "고란초(皐蘭草)약수" 때문이다.

고란초는 벼랑의 바위틈 사이에 돋아나는 귀한 약초다. 이 절의 약수는 고란초가 돋아난 벼랑을 따라 흘러내려 온 것으로, 약초의 효능을 고스란히 품고있어 백제의 왕들이 즐겨 마셨다고 한다.
안내고란 약수 이야기
부여에는 고란초 약수에 관한 설화 하나가 전해져 온다. 아득한 옛날, 한 마을에 금술 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불행히도 아이가 없었다. 할머니는 다시 한 번 회춘하여 아이를 갖기를 소망했는데, 어느 날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고란사 바위틈에 영험한 약수가 흘러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물을 마시면 한 잔에 삼 년씩 젊어진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그날 새벽 할아버지를 보내 약수를 마시게 하였는데, 밤이 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할머니가 약수터로 찾아가 보니 할아버지는 온데간데 없고, 갓난아기 하나가 할아버지의 옷을 입고 있었다. 할머니가 실수로 한잔에 삼 년씩 젊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바람에 무분별하게 약수를 마셔 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할머니는 갓난아기가 되어버린 할아버지를 데려와 지극정성으로 길렀는데, 훗날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숨겨진 부여 이야기
백마강의 전설
백마강의 연안은 부소산을 중심으로 천정대, 낙화암, 조룡대, 파진산 등 위아래로 경승지가 펼쳐져 있으며, 부여 낙화암의 삼천궁녀와 부여에 있는 백제시대의 유적지가 유명하다. 백마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의 무용담이 얽혀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려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에 쳐들어 갔는데 당나라에서는 소정방이라는 장수가 백마강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는 쉽게 얻어낸 승리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노를 재촉하였다. 그런데 모든 배들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멈추었다. 소정방은 매우 놀랐다.

"왜 갑자기 멈추느냐! 빨리 가지 못할까!"

그러나 그 상황은 군사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는 제자리였다. 소정방은 이 상황에 대해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백제 토박이 백성 중 한 노인을 잡아 캐묻는다.

"듣거라 이 배들이 왜 꼼짝도 않는 것이냐!"
"이 백마강엔 백제 임금인 의자왕의 부친인 무왕마마가 용으로 변신해 배를 잡고 있는 것이오."
"뭐라고? 그렇다면 대책도 알고 있겠지! 어서 말하여라. 말을 하면 온갖 재물보화를 주겠다."

하지만 그 노인은 대안을 말해주기는커녕, 냉큼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라 말했다. 화가 난 소정방은 노인을 처형하고 다른 백제인을 대령하라 소리쳤다. 백제의 신하였던 또 다른 포로는 재물을 준다는 말에 대응책을 알려주었다.

"무왕 임금은 평소에 백마를 좋아하셨지요. 백마를 미끼로 낚시를 하면 될 줄로 압니다."

그럴듯하게 여긴 소정방은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과연 그렇게 백마를 묶은 큰 낚시대로 낚시를 하자 용이 걸려 들었고, 용은 소정방과의 계속되는 힘겨루기 끝에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숨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당의 배들은 다시 계속 진격하였고 용이 떨어져 죽은 곳을 "용전"이라 하며 소정방이 용을 낚던 곳을 "조룡대"라한다. 이 조룡대에는 자국이 있는데 용을 낚던 밧줄 자국과 힘을 쓰던 소정방의 두 무릎 자국이라고 전해진다.
출처 : 국토교통부, 금강 홍수통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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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올댓스토리
· 글/사진  │강민석
· 그림      │홍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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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2-2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