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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대 영화

‘실화‘의 미덕과 한계 - 『한나를 위한 소나타』

‘실화’의 미덕과 한계 한나를 위한 소나타
실화보다 더 좋은 원작이 있을까. 영화가 원작에 의존하는 이유가 소재의 빈곤에 있다면, 사건과 인물과 이야기를 빌려오는 것이라면, '실화' 또한 소설이나 다큐멘터리, 다른 장르의 예술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그 자체로 중요한 '원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다른 장르로 옮겨지지 않은 '실화'야말로 영화로서는 더 반가운 일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현실에 뿌리는 두어야 하는 것이라면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실화'는 그만큼 가공이나 변형, 과장이 없는 순수한 재료가 돼 마음껏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요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호사를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요리사는 운명처럼 늘 '원재료의 맛을 살려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칫 자기 맘대로 양념했을 때, 원래의 맛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때문에 때론 영화가 뻑뻑하고, 헐렁하고, 사실과 허구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어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상태가 되고 만다. 아니면 자신이 없어 그나마 원작을 제대로 베끼지도 못하고 허덕대다 끝나고 만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원작이 있는 영화도 이럴진대, 하물며 '실화' 자체를 영화로 만들 때는 말해 무엇하랴. 현실은 소설처럼, 연극처럼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 반대로 소설과 연극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극적일 수 있다. 언어와 영상으로는 절대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사실' 도 인간사에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래서 『악마 같은 여인들』의 프랑스 소설가 쥘 아메데 바르베 도르비이가 '문학이 사회의 표현이라고들 했는데,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다. 문학은 사회를 전혀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 극단적 주장도 억지만은 아니다. 수많은 소설, 영화들이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이야기했지만,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유태인들의 '그 날'을,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그들의 절망과 절규를 온전히 담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반대도 부지기수다. 인생이란 영화나 소설, 연극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 그냥 그 시대,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고 굴러갈 뿐이다. '실화'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영웅이 아니다. 물론 연기를 하는 배우도 아니다. 관객들을 의식해 감정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행동을 멋있게 하려고 꾸미거나, 거짓말을 하지도 않는다.
소설은, 영화는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멋을 과장하고, 연기와 거짓말을 한다. 그래야 '작품'이 된다. 운명이다. 아무리 원작의 '있는 그대로'를 주장하는 소설이나 영화이라도 예외가 없다. 소설은 소설이고,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아무리 그 이야기가 '실화'라고 해도 소설이나 영화로 옮겨지면 사람들은 그것을 '100%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묘한 것은 사람들에게는 그 반대 심리도 있다. 소설이 지어낸 이야기, 영화가 과장한 이야기라고 말해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이유는 갖가지다. 모르고 있는 것일 뿐, 분명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라는 막연한 확신(개연성),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대리만족), 도르비이의 말처럼 “비극적이고 비참한 세상을 드러내도록 그려질 때 도덕적이라는 강박”(허위의식)이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지영의 『도가니』는 소설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소설의 모든 것이 '사실'은 아니다. 거기에는 작가의 상상도 있고, 과장도 있고, 변형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 《도가니》까지 몽땅 사실로 받아들였다. 영화도, 관객도 과장된 비극성이야말로 도덕성이라고 생각했다. 그 도덕성을 강조하기 위해 영화는 특수학교 교장과 교사의 폭력성을 확대했고, 관객들은 마치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처럼 분노와 슬픔으로 치를 떨었다.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의 힘이다.
어차피 '사실'도 그 순간이 지나면 있는 그대로 보존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야기로, 사진으로, 그림으로 변형하여 전해준다. 더구나 소설과 영화는 늘 "과장이 아니다. 전부도 아니다. 사실은 절반도 못 담았다"고 말하고 있으니, 더더욱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다.
영화《한나를 위한 소나타》의 장면
어느 글에선가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영화 한 편을 꼽으라면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다룬 《소피의 선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간에게 가장 잔인하고 비극적인 선택, 그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감히 누가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는 건방과 위선을 떨 수 있을까. 소피처럼 미쳐버리는 것밖에 무슨 다른 '선택'이 있을까. 어쩌면 소피의 그 모습에서 나는 과장이 아닌 '사실'을 봤는지 모른다.

독일영화 《한나를 위한 소나타》(감독 마르쿠스 로젠뮐러)는 제2차 세계대전 나치치하의 유태인 이야기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성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등이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실화'다. 나치의 유태인 만행에 관한한 실화라고 새롭거나 특별할 것은 없다.
어린 소년, 소녀가 주인공이란 사실도 당시 그런 아이들이 150만 명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놀랄 일이 아니다. 150만 명 아이 어느 누구에겐들 이만한 사연과 비극과 감동이 없으랴.
유명하고, 안 하고, 특별한 재능이 있고, 없고를 따질 일인가. 적어도 죽음 앞에 선 인간은 모두 동일하다. 그것은 역으로 생명의 가치는 어떤 상황, 조건에서도 누구에게나 동일하다는 말도 된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만행은 물론 수많은 전쟁에서의 '정당성'을 가장한 살인이 '용서받지 못할 죄'인 이유이다.
《한나를 위한 소나타》는 원제('Wunderkinder')가 말하듯 1941년 봄 우크라이나를 무대로 러시아의 유태인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아브라샤(엘린 콜레브)와 피아니스트 라리사(이모겐 버렐) 남매와 그들에게 반한 독일 소녀 한나(마틸다 에너믹)의 우정과 음악에 대한 사랑을 그렸다. 한나의 회상 형식의 증언을 빌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한나를 위한 소나타》는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답게 아름다운 선율이 전쟁과 인종차별의 죄악, 이런 어른들의 어리석은 짓을 꾸짖기라도 하듯 '형제의 맹서'를 한 아이들의 순수한 우정을 더욱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전쟁의 광기는 결국 한나 가족의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브라샤 가족을 죽음으로 내몬다.
원작도 없이 '사실'을 곧바로 영상으로 옮겼으면서도 《한나를 위한 소나타》는 신기하리만치 영화의 요소들을 다 가지고 있다. 천재소년, 소녀들이 있고, 전쟁의 위협이 있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우정이 있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자존심도 있고, 전쟁을 비판하는 메시지와 그 추악한 전쟁 속에서 꽃피운 아름다운 유산(라리사의 악보)도 있다. 마치 영화를 위해 '사실들'이 준비라도 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이런 '선택'에도 불구하고 《한나를 위한 소나타》는 그리 극적이거나 진한 감동을 자극하는 영화가 아니다. 《어거스트 러쉬》처럼 극적인 결말도, 비록 '거짓'일망정 혀를 내두를 만큼의 멋진 연주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나 《소피의 선택》처럼 가족의 죽음으로 전쟁이 가져온 만행을 소리 높여 고발하고 비극성을 확장하지도 않는다. 아브라샤와 라리사를 영웅으로 미화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흔적이 지금도 뚜렷한 것도 아니다. 가족 중 혼자 살아난 아브라샤는 전쟁이 끝나고 천재 음악가가 아닌, 악기복원 전문가로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그저 그때 죽어간, 아니면 간신히 살아남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유태인 소년, 소녀 가운데 한 명이다. '실화'라서 더 실감나고 비극적이고, 음악이 있으니 더 아름다울 것이란 기대를 《한나를 위한 소나타》는 배반한 셈이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극적 과장과 사실적 기법으로 드러낸 영화를 생각하면 심심하다는 느낌까지 들고, 영화제작사가 '감동적'이라고 떠들어대는 자기자랑이 오히려 민망하다.
아마도 '사실'이 아닌 것을 만들어 내거나, '사실'을 과장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양심' 때문은 아닐까. 세상 모든 인간들의 삶이 영화처럼 극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삶이라도 누군가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추억해야 한다. 《한나를 위한 소나타》 역시 그런 것이다. 감동의 크기는 그들의 삶을 상상과 욕망이 아닌, 현실에 발을 딛고 조용히 들여다보는 각자의 몫이다.
영화《한나를 위한 소나타》의 장면들
2차 대전의 혼돈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음악으로 맺어진 소년, 소녀들은 서로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아름다운 우정을 지켜가지만, 이들의 상황은 점차 어려워지고 급기야 목숨을 건 공연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전쟁이란 상황 속에서 이들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까?
한나를 위한 소나타 책표지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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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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