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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대 영화

어차피 ‘사실‘이 아니라면 - 『엑스페리먼트』

어차피'사실'이 아니라면...『엑스페리먼트』
'이것은 실화다.'

이 말이 소설 독자나 영화 관객에게 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까. 긴장? 냉정? 그것도 아니면 믿음?
영화는 판타지다. 영화를 현실로 착각하는 사람은, 이상한 범죄를 저질러놓고 "영화 보고 그대로 따라 했다"는 정신 나간 인간 말고는 없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현실을 담았다 해도 영화는 영화다. 소설도 대개는 마찬가지다. 영화와 소설 자체가 현실보다는 환상(판타지)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것이 '현실(실화)'이라고 선언한다. 이때부터 독자와 관객은 갈등한다. 이 말을, 나아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얼마나 믿어야 하나. 굳이 '사실'이라면, 그것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다른 전달 수단인 보고서나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왜 소설과 영화인가.
느긋하게 소설과 영화가 주는 판타지에 빠져보자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실화다'는 말은 그야말로 일종의 배신이다. 소설과 영화를 소설과 영화로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이란 말이 분명 '거짓말'임에도 불구하고 소설과 영화의 모든 것을 '사실'로 인식하도록 심리적으로 강요한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다큐멘터리조차 완전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사실의 선택 문제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이 카메라로 옮겨지는 순간, 사실에 온갖 허구의 고물이 묻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물며 소설과 영화는 말해 무엇하랴.
때론 소설과 영화란 그릇은, 사실을 강하고 자연스럽고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헛소리다. 강하고, 자연스럽고, 효과적이란 말 자체가 사실의 왜곡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은 그 자체도 그대로여야 하지만, 그 사실이 가진 전달의 힘도 그대로여야 한다. 소설이나 영화가 훨씬 정교해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한다 해도 그 역시 사실의 과장이나 왜곡이다. 결과와는 별개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이 '이것은 실화다'라고 말하는 그 실화는 실화가 아니다.
단지 실화를 재료로 삼았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실을 보다 깊숙이 통찰한 소설도, 그 소설의 겉만 핥고 지나간 영화도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다.
영화《엑스페리먼트》의 장면들
《엑스페리먼트》도 마찬가지다. 우선 하나의 '사실'이 있다. 1971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독특한 실험이 진행됐다. 바로 '모의 교도소 실험'이었다. 심리학과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대학 심리학연구소 건물 지하에 가짜 감옥을 만들고, 자원자 24명을 선발해 간수와 죄수 역을 맡겼다. 전혀 다른 상황이 주어졌을 때 인간의 행동양식이 어떻게 달라지며, 본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관찰하려던 이 실험은 그러나,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계획했던 2주를 채우지 못하고 6일 만에 중단됐다.
독일의 작가 마리오 지오다노가 이를 소설 《엑스페리먼트》에 담았다. 그는 솔직했다. “이 이야기는 사실을 '토대'로 했다. 이 소설을 준비하면서 나는 복종 심리, 독방 감금, 고문 그리고 세뇌에 대한 여러 논문들의 도움을 받았고 국제 엠네스티 연감의 도움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순수하게 지어낸 이야기다. 등장인물, 관점 그리고 있을지도 모를 사소한 실수 모두.”
소설 『엑스페리먼트』는 그래서 사실로부터 자유로웠고, 사실보다 더 깊고 크게 나아갈 수 있었다. 실험을 실시한 곳을 독일의 뒤셀도르프 대학으로 바꾸었고, 군과 결탁한 실험의 숨겨진 음모와 배경을 설정했고, 주인공인 사진기자 출신 타렉을 비롯한 실험에 참가한 21명에게 독특한 성격과 심리를 부여했다. 그가 열심히 찾아낸 지식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됐고, 그 상상력은 이야기에 현실감과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실험 대상이 된 인간들의 행동과 심리 변화가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며, 과학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처음에는 분명 가짜 역할임을 알고서도 점차 그 가짜를 현실인 양 착각해 죄수와 간수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생기고, 복종과 지배의 심리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급기야 간수가 된 베루스는 윤흥길의 소설 「완장」의 주인공이나 조정래의 『태박산맥』에서 염상구처럼 감춰졌던 야만성과 폭력성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마리오 지오다노는 사실을 뛰어넘어, 해박한 심리학 자료와 정교한 구성으로 소설 『엑스페리먼트』를 또 하나의 완벽한 허구의 실험보고서로 만든 셈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착각한다. 분명 '순수 지어낸 이야기'라는 작가의 강조를 의심까지 한다. 소설에 나온 인물, 이야기는 사실이며, 작가가 그것을 감추려 오히려 거짓말로 가짜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착각과 의심이 독자를 긴장시킨다. 단순히 소설이 전개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 숨어있는 인간과 사회적 환경의 상호관계, 등장인물들의 상징성, 나아가 실험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권력 구조까지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영악하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사실을 그대로 소설로 담는 순간, 사실은 허구가 되고, 그것을 허구로 재조립할 때에만 생생하고 정밀한 새로운 사실로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2001년 소설 『엑스페리먼트』가 나오자마자, 그 해 독일 올리버 히르쉬비겔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소설에 충실했다. 등장인물도, 사건도 소설을 따랐다. 단순한 인간 본성의 탐구를 넘어 나치시대의 인간심리까지 은유한 영화는 그러나, 소설이 가진 깊이를 담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섬세한 연출력과 구성의 부족이었다.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의 변화와 그에 따른 추악한 본성까지 고발하려 했지만 설득력이 부족했다. 설득력이 부족하니 자연히 '이 이야기는 실화다'라고 강조해도 관객들에게는 허구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나았다. 2010년 할리우드 판 《엑스페리먼트》는 아예 소설의 거추장스러운 설정마저 벗어 던졌다.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를 연출한 폴 세어링 감독은 실험 그 자체인 '사건'에만 주목했다. 등장인물들이 실험에 참가하게 된 이유나 과정도 생략된다. 오로지 돈만을 위해 모두 실험에 참가했고, 혹시나 실험이 중단돼 돈을 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한다. 주인공 트래비스(애이드리언 브로디) 역시 살인과 폭력, 폐쇄공포증에 대한 자기의 반성과 시험에서가 아니라 여행 경비를 위해서, 간수가 돼 잔인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배리스(포레스트 휘태커) 역시 어머니의 치료비와 집세를 위해 실험에 참가한다. 물론 연구자의 연구목적이나 배경, 심리도 생략됐다. 결국 이 영화의 목적은 한가지다. 중요한 것은 배경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였다.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군인 출신으로 또 하나의 실험 모델이 돼 반강제로 참가한,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앞으로 전개될 현상을 간파하는 슈타인호프 같은 인물도 없다. 유일하게 입체적으로 살아있는 인물이라면 원작에서 베루스에 해당하는 베리스 정도다. 심리 변화에 따른 행동 변화나 행동 변화에 따른 심리 변화에 대한 관찰도 섬세하지 않다. 영화는 심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다. 점점 가공의 현실에서 자아도취에 빠지는 베리스의 폭력과 인격 모독, 그에 반항하는 주인공 트래비스의 대결에 영화는 초점을 맞춘 다음 할리우드 영화답게 활극을 펼치며 트래비스를 영웅으로 만든다. 처음 영화를 시작하면서 보여주는 지상의 모든 종들이 서로를 공격하는 끔찍한 몽타주, 트래비스의 애인인 베이가 펼치는 반전 운동, 마치 마취에서 깨어난 듯 모두가 허탈하게 버스로 돌아가면서 “이래도 우리가 원숭이보다 진화가 앞선 것 같소?”란 질문과 “네, 적어도 해결책이라도 찾았잖소”라는 대답이 '진실'의 울림을 갖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폴 셰어링 감독은 애초 소설의 깊은 심리학적 장치들을 영화에 담는 다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듯하다. 어쩌면 그것들이야말로 '사실'이 아닌 소설이 지어낸 허구이며, 소설에 유일한 '사실'은 실험자들이 보여준 행동양식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사실이라고 말하는 행동 자체도 하나의 상상이나 과장, 단편에 불과하지만.
소설 『엑스페리먼트』도 두 편의 영화 《엑스페리먼트》도 어차피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사실을 벗어난 '가짜'만도 아니다.1971년 미국의 한 대학에서 명백하게 있었던 사건(실험)이었다. 둘 다 어차피 착각이라면, 적어도 이 별나면서도 인간 심리의 날카롭고 섬뜩한 분석은 영화보다는 소설로 착각하는 것이 좋다. 적어도 인간 내면에 보다 깊숙이 걸어 들어가, 영화보다 훨씬 많은 '사실'들을 확인하고 돌아올 수 있으니까. 소설 『엑스페리먼트』가 허구이면서도 인간 심리와 행동 분석의 중요한 역사적 보고서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니다.
1971년 피험자의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6일만에 의문을 남긴 채 급작스럽게 종료된 '스탠포드 대학교 모의 교도소 실험'을 바탕으로, 그 비밀과 진실을 파헤치는 스릴러 소설 『엑스페리먼트 』.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사실'이 아닌 소설과 영화. 과연 이 실화를 소설과 영화에서는 어떻게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을까?
엑스페리먼트 책표지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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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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