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작은일에도 최선을 다한다면... 『역린』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역린』
분명 반대다. ‘원작 대 영화’가 작품의 시간 순서라면 말이다. ‘역린’은 영화가 먼저 나오고 소설이 나왔다. 물론 그 시간 차이란 게 불과 일주일이지만..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기간을 감안하면 영화가 한참 먼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소설을 구상하고 쓰는 시간을 감안하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작가(최성현)에게 물어본 적이 없으니, 영화가 개봉되기까지 일부러 소설을 써놓고는 출간을 늦추었는지, 시나리오를 쓰면서 소설 쓸 욕심이 생겼는지, ‘원소스 멀티유즈’로 소설과 영화를 동시에 염두에 두고 두 개를 함께 써나갔는지 알 수는 없다. 소설은 두 권이고, 영화는 그 소설의 두 번째 권만을 다루었으니, 시작은 소설이 먼저일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물론 이미 몇 차례 드라마 대본을 써본 적이 있으니 ‘영화’를 생각하면서 소설을 시작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관심도 없다. 다만 작가에게 “앞으로는 시나리오보다 소설을 쓰라”고 말하고 싶다. 단언컨대, ‘역린’은 시나리오보다 소설이 훨씬 좋다. 시나리오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 영화이며, 궁극적으로 감독에 의해 그 완성도가 좌우되는 예술이 영화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나의 이런 충고의 충동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영화[역린] 속 정조(현빈 분)
드라마와 만화와 소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는 최성현 작가를 난 잘 모른다. 다만 그가 남긴 작품들로 추측컨대, 이 재주 많은 젊은 이야기꾼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만들기에 능하고 치밀하며,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갖가지 그릇에 담을 줄도 아는 듯하다. 이야기에 힘도 있고, 매력도 있다. 그 힘과 매력은 아무래도 영화(시나리오)나 만화보다는 소설에서 더 빛을 발한다. 『역린』을 보면 숨길 수 없다. 소설이 먼저라면, 이미 수많은 작가들이 밟고 지나간 진부한 소재를 독특한 틀과 짧고 간결한 문장, 매력 넘치는 주변인물, 절제된 기교와 감정으로 새로운 이야기로 만든 것이 예사롭지 않다.

반대로 시나리오가 먼저라면 더 더욱 놀랍다. 영화로 만들어진, 소설 『역린』의 2권만 놓고 봐도 원작(시나리오)보다 훨씬 낫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칼날의 비장함과 예리함보다 소설이 보여주는 문장의 예리함과 긴장감, 울림이 더 깊다. 짜임새도 마찬가지다. 소설 『역린』에서 김훈을 닮은 듯한 그의 문장은 말하는 자의 마음을 조금의 망설임이나 숨김없이 드러내고, 듣는 자와 읽는 자에게 정확하고 깊이 있게 파고든다.
그의 문장은 뜸을 들이지 않는다. 짧은 일격으로 나무를 자르듯 첫 문장에서부터 곧장 날카롭게 이야기 속으로 파고든다. 소설의 첫 머리부터 그렇다. 사도세자 이선의 죽음을 그린 『역린』의 1권 「교룡으로 지다」는 ‘강은 사납고 위태로웠다’로 시작한다. 그 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어지는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바로 드러난다. 영화로 만들어진, 소설 제목 ‘역린’의 뜻을 풀어준 2권 「왕의 분노」의 제 1장도 마찬가지다. ‘비가 내린다. 애간장을 닳도록, 소원하는 비가 내린다’도 배경으로는 너무나 간결하면서도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역린》(감독 이재규)에서는 정조가 능수능란하게 다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상대를 일격에 쓰러뜨리는 작지만 날카롭고 정확하고 빠른 애기살은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와 인물들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정조(현빈)가 중심이구나 싶어 그를 따라가려 마음먹으면, 영화는 눈길을 갑수(정재영)와 을수(조정석)의 피보다 진한 우애로 돌린다. 그 시선의 흔들림에 맞춰 집중도 흩트려지고 주제도 흔들린다. 영화도 소설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같으며, 두 곳 모두 갑수의 입에서 나오는데 말이다.
정조의 하명을 받은 그가 경연에 참가한 노론의 대신들 앞에서 그들에게 망신을 주며 암송한 『중용』의 스물 세 번째 장이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이내 겉에 배어나오고, 겉에 배어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이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이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만물을 생육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와 정조. 조선 왕조에서 이들 3대의 이야기보다 극적이고, 흥미롭고, 가슴 아프고, 화수분처럼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갖고 있고, 또 역사성을 갖는 것도 없다. 그 속에는 크게는 조선왕조, 작게는 이금(영조) 일가의 파란과 굴곡, 비극과 희망이 어떤 소설보다 극적으로 담겨있다. 그리고 그 극적인 이야기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역사가 단순히 지난 일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이들 3대의 이야기야말로 지금도 살아있어야 마땅하다. 350년이 지난 우리의 역사는 아직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그들의 존재를 기억해야 하는 반복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에서,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모양과 색깔과 상상을 달리하면서 쉼 없이 반복된다. 어떤 소설은 영조의 탕평책을, 어떤 영화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을, 어떤 드라마는 정조의 좌절한 개혁에 눈을 맞춘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그 기록에 상상과 시각을 불어넣은 현재의 해석이다. 그 해석에 따라 인물들의 존재가치도 달라진다. 이들 3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정조를 매력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현재의 세상이다. 매력적이지만 그의 짧은 삶은 더 안타깝고, 그의 아버지의 죽음 또한 정치적 희생으로 가슴 아프게 재생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역사에서 사도세자의 죽음만큼 기이한 것도 없다. 일국의 왕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왕인 아버지(영조)가. 그러지도 않았지만, 설사 아들이 노골적으로 왕의 자리를 탐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노론의 기세에 눌려 자신의 존재마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뒤주는 곡식을 보관하는 곳이다. 곡식은 생명을 의미한다. 그것을 보관하는 곳에서 장차 국왕이 될 세자가 아버지의 강요로 굶어 죽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흑의 좁은 공간,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8일을 갇혀있다 시체가 된 아들. 아들은 그 긴 시간 어떤 생각을 했으며, 아비는 그 길고 긴 시간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비가 선택한 것은 무엇이고, 아들이 받아들인 것은 무엇인가. 아비가 미친 건가, 아들이 미친 건가.
역사는 이들의 통곡과 피맺힌 절규와 원망과 죄책감과 혼란을 절대 기록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비와 아들의 가슴 속에 묻혔고, 역사 속에 묻혔다. 그것들을 다시 불러낼 수 있는 것은 소설이고, 영화이고, 드라마다. ‘사실’이 아닌 상상력이라도 상관없다. 역사는 소설과 영화에서 언제든 상상력에 의해 다시 쓸 수 있으니까. 사실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 3대의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다. 아무리 영화와 소설이 상상력으로 역사를 쓸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 역시 역사적 기록에 발을 디딘 채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역린』이 선택한 것은 ‘정조의 하루’이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에 오른 뒤 1년이 지난 어느 하루. 바로 노론에 의해 정조의 암살 시도가 있었던 어느 하루를 시간 단위로 쪼개, 죽이려는 자(을수)와 죽음을 피하려는 자(정조), 죽이는 자의 편에 선 사람들(정순왕후, 광백, 안국래, 고수애)과 죽음을 막으려는 편에 선 사람들(홍국영, 갑수, 혜경궁)의 이야기를 숨 가쁘게 펼쳐간다. 잠시도 머뭇거릴 틈이 없다. 그래서 『역린』은 애기살처럼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휘두르지 않고 곧바로 찔러 들어간다.
그 위태롭고 위험함 속에서 사도세자도, 정조도, 훗날 정조를 암살하려 내시가 되어 어릴 때 궁에 들어온 갑수도 누군가를 살리고 싶어 한다. 을수는 월혜를, 월혜는 복빙을 살리고 싶어한다. 갑수가 마음을 돌려 정조의 충신이 된 것도, 몸으로 을수의 칼을 막아 정조를 살린 것도 그에게서 동생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역린』은 『중용』의 말을 빌려 사람은 누구나 높낮이 없이 작은 것에도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더구나 그것이 누군가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일이라면.
역사의 이면을 모르던 독자들도 흥미롭게 이야기를 읽어나갈 수 있도록 작가적 상상력을 통해 역사적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각 인물에 강렬한 개성을 부여했다. 정유역변의 모의에서부터 살수인 ‘을수’는 어떻게 이 역변에 가담하게 되었고, 왜 임금을 꼭 죽였어야 했으며 상선 안국래와 상책 ‘갑수’의 관계는 무엇인지 등 영화에서는 만날 수 없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아냈다.
역린 책표지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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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8-0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