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아는 척 하지만, 모르는 『걸리버 여행기』

아는 척 하지만, 모르는『걸리버 여행기』
『걸리버 여행기』에 관한 우리의 어이없는 착각. 그 하나, 사실은 읽지 않았는데 읽은 적이 있다, 그것도 어릴 적에. 그 둘, 정확한 내용을 모르면서, 아니면 아주 일부만 알고 있으면서 마치 다 알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걸리버 여행기』는 어린이들이나 읽는 동화이다.
어디 이런 소설이 한 둘인가. 『어린왕자』도 그렇고, 『톰 소여의 모험』과 장발장이 주인공인 『레 미제라블』도 비슷하다. 너무 유명해서, 아니면 아이들 책장에 꽂인 만화나 동화 전집에서 너무나 제목을 자주 봐서. 아니면 여기저기서 반복적으로 만든 애니메이션과 영화 중 적어도 한 편은 봤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어린 시절 누구나 이런 동화쯤은 읽었을 것이란 사회적 인식 때문에 자신을 속이고 있거나.
부끄럽지만 나도 그 착각자들 중의 하나이다. 1960년대 가난한 시골 어린이는 교과서 말고는 책을 좀처럼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농민을 위한 성인 월간지 《새 농민》에 나오는 시나 소설을 이해도 못하면서 읽었을까. 어쩌다 부잣집 친구 집에 가면 있는 그 책들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커서 그 책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책이란 것도 다 읽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냥 ‘교양’으로 간추린 내용만 기억하고 지나갔다. 아직도 방 한구석에는 버리지 않은 아이의 그 책들이 놓여있지만.
『걸리버 여행기』로 국한해 보자. 지금 나에게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웅진닷컴에서 나온 ‘웅진비주얼 세계명작 시리즈’의 64쪽짜리 『걸리버 여행기』와 문학수첩이 완역본이라고 자랑하며 펴낸 400쪽 가까운 『걸리버 여행기』이다. 완역본이 주장하는 『걸리버 여행기』는 요약하면 이렇다. 동화가 아니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감옥에 갇힐 각오로 펴낸 정치사회소설을 평론가들이 멋대로 삭제해 동화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원본이 길고, 복잡하고, 깊게 느껴지는 건가.

우리의 착각대로라면 이런 주장은 맞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걸리버 여행기』는 환상과 모험이 가득한 동화이다. 『이상한 나라, 엘리스』와 사촌쯤 되는 주인공 걸리버가 소인국과 거인국에서 겪는 때론 신기하고, 때론 낯설고, 때론 익숙한 경험들. 솔직히 『걸리버 여행기』는 이 두 곳의 여행이 전부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아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동화로서의 목적은 달성되니까.

아예 오락으로 나선 롭 레터맨 감독의 영화 <걸리버 여행기>도 마찬가지다. 뉴욕신문사 우편실 말단직원 걸리버(잭 블랙)는 소인국과 거인국에만 간다. 비틀스 음악과 영화 <타이타닉>과 <아바타>까지 패러디 한 이 영화는 동화의 시각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을 통해 영화는 소심하고, 열등감 투성이인 주인공 걸리버의 자신감 회복을 위한 ‘한바탕 쇼’를 펼친다.
걸리버 여행기_문학수첩
이런 선택을 탓할 순 없다. 영화는 애초 원작이 가진 구성이나 걸리버가 여행을 통해, 여행지의 모습과 그곳의 삶과 사회와 사건을 통해 스위프트가 말하고자 한 주제에는 관심이 없다. 걸리버가 어떻게 왜 그곳에 가게 됐는지에 대한 차이는 접어두자. 원작이 보여주는 소인국 ‘릴리퍼트’의 인재 등용의 기준이 당시(18세기) 영국을 그것을 풍자하고, 대범하고 스케일이 큰 거인국이 스위프트 자신의 조국인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소설이 가진 사회성이야 말해 무엇 하랴. 그보다는 지극히 걸리버 개인의 콤플렉스 극복기와 주변인물의 사랑 이야기가 훨씬 대중성과 흥행력이 있으니까. 개그맨 뺨치는 걸리버의 허풍과 그 속에 숨은 비애, 매리 공주와 그의 약혼자인 릴리퍼트의 실세인 에드워드 장군과 걸리버의 현실을 대변하는 듯한 평민 호레이쇼의 삼각관계, 호레이쇼를 동정하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짝사랑의 여인 달시와의 사랑의 성공이면 충분하고 행복하다. 걸리버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인간의 오만, 이성적 능력은 있는 동물이지만 결코 이성적이지 않은 인간에 대한 혐오와 분노까지 드러낼 이유도 없다. 21세기판 할리우드 가족 오락영화에서 무엇을 바라는가.
그러니 애초 영화는 걸리버가 여행한, 소인국과 거인국보다 훨씬 풍자적이고, 인간혐오의 세상과 이상적 존재를 상상한 다른 두 나라까지 갈 필요조차 없다. 그곳은 <걸리버 여행기> 속에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마치 <걸리버 여행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척 나타난다. 하늘 위에 떠 있는, 하늘을 떠다니는 성의 나라 라퓨타는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의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고, 말(馬)들의 나라 휴이넘에서 지구상의 가장 야만적인 인간과 비슷한 동물 야후는 인터넷 검색 엔진의 이름으로나 쓰고 있다.
우리가 굳이 지금에 『걸리버 여행기』를, 동화가 아닌 소설로 읽어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두 나라 때문일 것이다. 현실과 거리가 멀고, 실현 불가능한 이를테면 오이에서 햇빛을 뽑아내고, 배설물을 원래 음식으로 되돌리고, 거미에게 염색한 파리를 먹여 다양한 색깔을 실을 뽑아내는 연구를 하는 라퓨타는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다. 실제 17세기 영국왕립학회의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이 사는 라퓨타(영국)를 먹여 살리기 위해 땅의 섬 밸니바비(아일랜드)의 사람들은 식량을 모두 뺏겨 굶주리는 모습에서 스위프트의 풍자 속에 숨은 비애와 울분을 우리는 찾아야 한다.
휴이넘은 어떤가. 스위프트는 두 동물의 극명한 대비, 말들은 범죄 없고 모두 평등하게 교육받고 공평하게 나눠 갖는 말들과 교활하고 복수심이 많고 비겁하고 더러운 야후가 가진 다양한 직업의 속성을 통해 이상 사회와 동물보다 못한 인간세상을 조롱한다. 때문에 16년 동안 걸리버가 경험한 여행 체험은 달콤하고 행복한 판타지를 주지 않는다. 가장 추악하고 어두운 인간 세상에 대한 확인이다. 우리가 한번쯤 꿈꾸는, 절대 강자로서의 존재감을 누리는 소인국의 여행조차 즐겁고 행복하지 않다. 그러니 어떻게 모험과 상상의 동화가 되고, 가족이 한바탕 즐거운 환상의 여행으로 떠나는 영화가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걸리버 여행기>가 축소와 변형의 희생물이 된 것은 운명인지도 모른다. 다행이라면 이제는 동화 『걸리버 여행기』도 조금씩 라퓨타와 휴이넘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웅진비주얼 세계명작처럼.
그러나 영화까지 그러기를 바라는 것은 허망하다. 3D입체 영상 같은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스위프트가 라퓨타에서 풍자했듯 과학이란 놈이 점점 영화를 현실과 멀어지게 하고 거짓과 환영의 세계로 이끌고 갈 테니까. 마침내 소인국에서까지 아이언맨이 등장하는 세상을 만들어 버리고 말 테니까. 그나마 위안이라면 동화적 발상이라도, 할리우드와는 다른, 굳이 <걸리버 여행기>를 표방하지 않고도 우리에게 진짜 걸리버 여행을 시켜주는 <천공의 성, 라퓨타>같은 영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뚱뚱한 코믹배우 잭 블랙이 어설픈 원맨쇼로 명작을 망쳤다고 속상해 하지 말자. 그의 영화를 놓고 원작은 고사하고 반 토막이 된 동화와 비교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한심한 짓은 하지 말자.
대신 한 가지. 지금이라도 한번 아이들 방에 있는 동화 『걸리버 여행기』라도 한번 펼쳐보라. 만약 거기에 짧게나마 편집자 멋대로 각색하고 요약해 실어놓은 라퓨타와 휴이넘이 없다면 완역본을 구해 읽어보라. “이 나이에 새삼스럽게” 라며 창피해 하거나, “알고 있는데 뭘”이라고 말하지 마라. 자기기만이고 착각이다. 누군가 너의 책을 보고는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말하는 오만하고 위선적인 인간이다. 자기만 잘났다는 식의 스위프트의 인간혐오가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차라리 동화가, 영화가 낫다고 한다면, 영원히 우리는 어설픈 동화 속에 갇힌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속살은 모른 채, 그것의 냄새를 모르고 지나간다.
영화가 원작을 읽게 만들기도 한다. 원작이 궁금해서다. <걸리버 여행기>는 그것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동화책을 제대로 읽지 못한 궁핍의 유년기를 보낸 세대들이여! 한번쯤 솔직해지자. 우리가 제대로 걸리버와 함께 여행을 해본 적이 있었나. 잭 블랙의 연기만 따라가지 말고, 스위프트가 안내하는 300년 전의 인간 풍자의 세상을 한 번 만나라.
1960 걸리버 여행기, 1996 걸리버 여행기, 2010 걸리버 여행기
이대현(한국일보 논설위원 / 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 / 서울디지털대 초빙교수) 1959년생『우리에게 시네마천국은 없다』 『4세 소년, 극장에 가다』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등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14-07-16

소셜 댓글

SNS 로그인후 댓글을 작성하시면 해당 SNS와 동시에 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