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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줄 알아야 한다 -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버릴줄 알아야 한다,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일본소설 붐을 타고 『화차』가 처음 국내에 번역 소개된 것은 10년 전이다. 반응이 신통하지 않았다. 『인생을 바꾼 여자』로 바꾸어 다시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다시 원래 제목 『화차』로 되돌렸지만 소용없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작가의 지명도. 미야베 미유키는 무라카미 류나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다. 또 하나는 장르다. 미스터리, 추리물은 독자가 제한적이다. 일본소설의 국내 주 독자층이라고 할 수 있는 10, 20대 여성들이 선호하지 않는다. 추리소설을 하류대중문학쯤으로 여기고, 더구나 일본의 그것들은 서양 고전의 흉내 내기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거들떠보지 않는 풍토까지 가세했으니.
물론 최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 대한 열광을 보면, 전부 그렇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다른 이유가 있다. 색깔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1960년 도쿄에서 태어나 스물일곱 살이던 1987년, 단편 「우리들 이웃의 범죄」로 요미모노 추리소설 신인상을 받으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발표하는 작품들마다 상을 휩쓸면서 일본을 대표하는 미스터리 작가가 됐다.
성과 이름의 첫 글자를 따 '미미 여사'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그녀의 소설은 살인사건으로 시작해 추리와 용의자, 반전으로 이어지는 추리장르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녀의 소설은 다분히 일본적이다. 추리, 미스터리라고 해서 잘난 머리로 만들어낸 가짜 사건과 범인이 아니라 일본의 맛과 냄새, 삶 속에서 찾아낸 살아있는 이야기들이다. 소설의 시점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눠진다. 하나는 현재. 『화차』를 비롯해 『마술은 속삭인다』 『이유』 『모방범』 『이름 없는 독』 『누군가』 『드림버스터』 등이다. 일본인들이 겪는 사소한 일상에서의 사건들이다. 또 하나는 과거, 즉 에도시대(1603~1867)이다. 그녀의 고향이기도 한 에도(도쿄)의 후카가와를 배경으로 서민들의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때론 괴담과 미스터리를 섞어가며 그려간다. 「우리들 이웃의 범죄」를 비롯해 『하루살이』 『얼간이』 『괴이』 『흔들리는 바위』 『흑백』 『외딴집』 등이다.
영화포스터 - 화차
그녀의 현대물은 흥미와 추리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별난 사건', '별난 범인'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도 만날 수 있고, 누구나 범인이 될 수도 있는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늘 사회 속에 놓여있고,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화차』만 봐도 그렇다. 신용카드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한 개인파산과 그로 인한 고통과 비극,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한 여성이 저지른 살인을 누가 감히 '그녀만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연상시키는 시대물도 마찬가지다. 애도의 가난한 동네역사와 풍경,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 벌이는 미워할 수 없는 비극들을 꼼꼼하게 그려낸다. 하급무사가 느릿느릿 골목을 누비면서 사건을 해결하고, 대단한 것도 아닌 착하기 때문에 단지 다른 사람과 달리 한 두 가지 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소녀가 사건에 숨어있는 가슴 아픈 인간들의 사연들을 확인한다. 에도시대의 자잘한 이야기들을 계속 쓰고 싶어 하는 이유를 미야베 미유키는 “따뜻한 인간의 정이 있는 사회를 향한 동경”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우리에게도 작은 것도 함께 나누고 도와가며 살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그의 시대물은 재미있는 추리극이면서 휴먼 스토리이며, 과거이면서 현재이고, 향수이자 상실의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은 결국 인간의 이야기이다. 그것을 빈틈없는 추리 속에 잘게 쪼개 넣어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완성시킨다. 억지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역사와 풍속과 현실 속의 삶이기에 살아있는 생생한 '사실'이 된다. 때문에 고전적 추리물에 익숙하거나, 일본의 역사와 문화적 정서가 가진 독특한 맛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그저 '일본식 대중소설의 하나'로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딱 한번, 어느 작품이라도 좋다. 조그만 여유를 갖고 한번 읽어보라. 누구든 그 매력에 빠지고 말 것이다. 아니면 영화 《화차》를 보고 나서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영화 덕에 10년이 지나 다른 출판사에 의해 부활해 베스트셀러가 된 『화차』는 야마모토 슈고로상 수상작으로 미미 여사의 1993년 작품이다. 20년이나 지난, 그것도 시쳇말로 대단한 작가가 1990년대 초반, 신용카드와 신용대출이 가져온 일본의 심각한 신용불량자 문제를 고발했다. 더구나 국내에서 인기를 모은 다른 일본 추리물을 원작으로 한 일본영화들이 별 호응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화차』를 우리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도전이었다. 시대도 맞지 않고, 배경도 다르고, 정서도 틀리고, 객관적인 흥행 성공의 보장도 없었다.
영화 《화차》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건을 이어가는 커다란 줄기와 구성을 빼고는 과감한 변신과 '버리기'를 시도했다. 그것을 통해 영화는 속도를 높였고,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추리의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칫 구호로 비춰질 수 있는 소설이 끈질기게 추구한 사회고발의 냄새를 엷게 했다. 누구보다 강한 사회적 메시지야말로 영화를 만드는 목적이라고 소리쳐온 듯한 《낮은 목소리》의 변영주 감독임을 감안하면 의외면서도 한편으로는 현명하고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화차》는 독립영화가 아니라, 대중적 흥행을 거둬야 하는 상업영화다. 어설프게, 일본소설을, 그것도 20년도 더 지난 낡은 이야기를 현실에 맞지 않게 그대로 옮기면 졸작이 될게 뻔했다.
《화차》의 첫마디는 호기심의 유혹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사라졌다.' 더구나 결혼을 앞둔 여자다. 사람들은 궁금하다. 그녀는 누구이며, 도대체 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추측한다. 납치일까, 잠적일까, 실종일까? 배경은? 영화는 소설과 달리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일을 제3자(휴직 중인 형사로 먼 친척)에게 모두 맡기지 않았다. 남자주인공도 함께 참여시키는 설정을 했다. 그것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 일을 관찰자라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구경만 하지 말고 감정이입을 통해 동참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영화를 멜로적 느낌으로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소설보다 많은 대중을 상대해야 하는, 대중적이어야 하는 영화로는 적절한 전략이었다. 만약 영화가 소설과 같이 이성적 태도만을 가지고 사회적 문제의식만을 가지고 접근했다면 강선영(김민희)에 대한 연민과 동정도, 그것에서 스며있는 사회적 메시지도 관객들은 그저 '남의 일'로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감성적 접근법이야말로 영화 《화차》를 소설로부터 자유롭게, 소설보다 빠르게 달리도록 해 준 셈이다. 소설이 긴 시간 세키네 쇼코의 정체를 밝히는데 애를 먹는 것과 달리 박선영이 신용불량자이며, 사라진 약혼녀가 실제 박선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바로 알아내고는 그녀의 정체와 진짜 박선영이 누군지, 차경선으로 밝혀진 그녀는 왜 박선영을 사칭했는지, 그리고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하나하나 캐간다. 멜로적 분위기를 강조하는 설정의 변화와 미스터리의 핵심으로 바로 접근해 들어가는 방식은, 《화차》가 차분하고 냉정한 추리와 문제의식이 빛나는 소설의 단순한 영화화가 아닌 인간과 사랑의 슬픈 비극의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과 변신은 적중했고 성공했다.
비록 소설과의 시차가 20년이 넘지만 신용카드 남발, 과소비, 개인파산, 신용불량자 양산의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영화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설의 중요한 소재와 모티프가 된 신용불량과 그것으로 인해 벌어진 한 여자의 '타인으로 살기'를 버리지 않았다. 미미 여사가 수축해 놓은 치밀한 추리적 구성도 그대로 갖고 왔다. 그것이 없다면 영화는 어설픈 3류 추리극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인물과 상황, 배경과 정서만 꼼꼼하게 한국의 현재로 바꾸었다. 소설과 달리 어쩔 수 없이 신용불량자가 되는 사회적 구조와 환경을 전문적인 지식으로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정색을 하고 노골적으로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대신 진짜 강선영과 가짜 강선영의 과거 고통의 시간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메시지는 그것이 주는 여운으로 충분히 전달되었으니까.
영화 《화차》는 소설이 없었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었다. 우리 문단에 미야베 미유키 같은 섬세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시선의 추리작가, 『화차』나 『외딴집』 같은 그의 작품이 없다는 것이 부끄럽다. 그렇다고 소설 『화차』가 곧 영화 《화차》의 모든 것은 아니다. 영화는 분명 소설과 달리 우리 손으로 만든 새로운 색깔의 《화차》다. 과감히 버리고 섬세하게 바꿀 줄 알았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소설 『화차』를 쓰는 일만큼이나 가치 있는 작업이었음에 틀림없다. 영화 《화차》가 소설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또 다른 장르에서 《화차》가 된 것 만은 분명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소설과 영화는 결코 같을 수도 없지만, 같아서도 안 되기 때문에.
소설 『화차』가 곧 영화 《화차》의 모든 것은 아니다. 영화 《화차》가 소설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다. 사건을 이어가는 커다란 줄기와 구성을 빼고는 과감한 변신과 '버리기'를 시도했다.
화차 책표지
이대현(한국일보 논설위원 / 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 / 서울디지털대 초빙교수) 1959년생『우리에게 시네마천국은 없다』 『4세 소년, 극장에 가다』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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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6-09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