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미의 장편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은 때가 12년 전이다. 당시 초등학생 아들이 여름방학 권장도서라며 사달라고 했다. 아이의 책을 사면 퇴근길에 늘 먼저 읽어본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읽으라는 책에 대한 궁금증과 불만 때문이었다. 명색이 신문사 문화부 기자인데 듣도 보도 못한 책이 있는가 하면, 도대체 초등학생에게는 가당치 않은 ‘수준 높은’ 책까지 떡 하니 올려놓아 아이들에게 독서기피증만 커지게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어느 쪽이었나 하면 아이가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갈 뻔한, 어른도 일어야 할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12년 동안 창작동화로는 드물게 별 거부감 없이 100만권 이상 팔리고,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도 실린 것을 보면 요즘처럼 책 하나에도 편가르기, 선입견, 이념대립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꽤나 좋은 작품으로 환영 받은 모양이다. 더구나 애니메이션으로까지 만들어졌다. 베스트셀러가 영화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인지도’가 높아 굳이 영화를 알리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대중적 공감이 있기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 독자는 기억과 느낌의 확인을 위해, 읽지 않은 사람들은 연대의식과 대리만족을 위해 영화를 본다.
모든 베스트셀러 소설이나 동화, 자서전이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조건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편성이다. 좋은 시나리오, 영화란 개인이 가진 독특한 경험을 갖고 선, 사랑, 모험, 우정, 가족, 효도, 우애, 정의, 의리 같은 변하지 않은 인간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상투적이라고 말하는 뻔한 소재의 작품,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반역적 영화까지도 표현만 다를 뿐 결국은 이런 것들에 대한 강조의 역설이다. 더구나 그 보편적, 절대적 가치가 지금 우리에게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라면. 그 이야기에 사람들은 더욱 아파하고, 반성하고, 공감한다.
그렇다면 『마당을 나온 암탉』은 어떤가. 영리할 정도로 이런 조건들을 거의 완벽하게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꿈과 그 꿈을 위한 모험,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 새로운 가족과 모성애, 희생과 용기가 있다. 동화의 기본 주제들이기도 이 보편적 가치들을 양계장을 나온 암탉이란 독특한 개인적 경험으로 풀어냈다. 동화는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이 소망인 암탉이 오리 알을 품어 오리 엄마가 된 입싹의 입을 통해 군데군데 이런 가치들을 반복해 강조해 놓았다.
"우리는 다르게 생겨서 서로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 있어. 나는 너를 존경해."
"서로 다르게 생겼어도 사랑할 수 있어."
"어리다는 것은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아가, 너도 이제 한 가지를 배웠구나. 같은 족속이라고 모두 사랑하는 것은 아니란다.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야."
"나는 왜 한 번도 날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미처 몰랐어! 날고 싶은 것. 그건 또 다른 소망이구나."
『마당을 나온 암탉』이 동화에서 걸어 나와 영화가 되면서 선택한 것은 애니메이션이다. 운명이다. 《치킨런》 같은 비슷한 소재와 주제의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이 모델이어서가 결코 아니다. 영화가 되기 위한 또 하나의 조건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소재, 이야기를 가진 소설이라 하더라도 표현수단이 불가능하다면 영화로 만들어 질 수 없다. 만약 애니메이션이란 장르가 없다면 어느 암탉, 어느 청둥오리, 어느 살쾡이가 스크린에 나와서 『마당을 나온 암탉』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할 것인가. 살아 움직이는 그림, 사람이 그들의 말을 대신해주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오성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서 이야기와 화면의 움직임은 빠르고, 원색을 강조한 색채는 밝고 화사하다. 원작에는 없는 입싹이 알을 품어서 탄생한 청둥오리 초록이가 파수꾼이 되기 위해 다른 오리들과 벌이는 상공에서의 비행시합 장면이야말로 이 둘의 결합의 결정체이다.
오성윤 감독의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의 속도는 세계적인 흐름에 따르면서, 배경은 우리 고유의 이미지를 살렸다. 어찌 보면 이 상충하는 두 가지의 결합은 대중적 흥행이란 목적을 위해서다. 이미 디즈니를 중심으로 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에 길들여 있는 우리나라 아이들의 감각과 기호에 맞춘 것이다. 그림 역시 한국적 풍경을 배경으로 했지만 서양화와 동양화를 섞였다. 캐릭터들도 마찬가지다. 원색의 도형적인 이미지를 사용한 달수란 이름의 수달이나 새, 살쾡이의 모습이 그렇다. 국내 상영만이 아닌 해외시장까지 내다본 전략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원작이 가진 구도, 설정, 주제와 맥을 같이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계란만을 낳기 위해 품종이 개량되고 길들여진 양계장의 닭인 입싹 자체가 토종이 아니다. 그 국적불명의 늙은 닭이 알을 품어 보겠다며 마당을 나온다. 그 자체가 하나의 모험이다. 이런 이질적이 결합의 모험은 입싹이 청둥오리의 알을 품고, 그래서 태어난 초록이를 아들로 키우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런 운명 때문에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은 역동적이면서, 서정적이고, 한국만이 아닌 인류 보편적인 정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는 애니메이션이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는 한 필연이다.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원작이 가진 창의성, 동화이고 동물의 이야기지만 범인간적, 사회적 주제의식을 감안하고, 애니메이션이란 표현의 자유로움을 감안하면 굳이 변형이나 첨삭에 집착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은 정지된 동화의 삽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에 우선 충실했다. 단지 몇 가지만을 추가했을 뿐이다. 익살스럽고 수다스러우면서도 인정 넘치는 수달을 등장시켜 자칫 심각해지기 쉬운 작품 전체의 무게를 이따금 가볍게 하는 역할을 하게 했고, 클라이막스인 아기 청둥오리 초록이의 비상(飛翔)에 감동을 주기 위해 박쥐와 올빼미에게 날기를 배우는 과정을 넣었다. 이런 것들이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이 작품이 의도한대로 아이들이 영화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름대로 계산된 상업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뛰어난 영상미와 작화(作畵)를 자랑하던 많은 우리의 애니메이션이 나왔지만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철저한 반성인 셈이다.
때문에 《마당을 나온 암탉》은 동화와 달리 맛과 향에 충실한 기획상품처럼 느껴진다. 적어도 영화를 보는 순간만은 시각적으로는 아름답고, 이야기는 감동적이며, 리듬은 강약과 장단이 잘 조화돼 흥미를 잃지 않게 한다. 단순한 시각적 즐거움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3D입체 욕심을 내지 않고, 2D로 회화적 느낌을 살린 것도 어쩌면 원작의 문학성을 살려 보겠다는 의도다. 이런 것들은 청둥오리 나그네와 살쾡이의 싸움, 때론 고호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풍경, 곳곳에 집어넣은 입싹과 초록이의 대화, 그리고 마지막 초록이의 아름다운 비상에서 잘 드러난다. 액션은 마치 중국의 무예를 보는 듯하고, “나는 외롭지 않아 아주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거든. 눈을 감으면 그것들이 떠올라”라는 입싹의 말은 부모의 한없는 자식사랑을 드러낸다. 마치 할리우드 특수효과를 보는 듯한 빠르면서도 실사를 방불케 하는 초록이와 청둥오리 떼의 의 하늘 날기는 이 영화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공을 들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독특한 기법이나 문화적 감각만을 추구하지 않아 비록 예술적인 성과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작품이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든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다만 이야기에서 원작을 끝까지 따라갈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사실 동화『마당을 나온 암탉』을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것이 엔딩이었다. 동화를 읽으면서 가장 큰 불만이었기 때문이다. 입싹이 어린 새끼들을 위해 살쾡이에게 기꺼이 잡아먹힌다. 먼저 동화는 이렇다. ‘이제는 더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럴 까닭도 없고 기운도 없었다. 자, 나를 잡아먹어라. 그래서 아기의 배를 채워라.’영화도 비슷하다. 아들인 청둥오리 초록이를 떠나 보낸 뒤 살쾡이 앞에서 입싹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나를 먹어. 너의 아가들이 배고프지 않게."
좋게 보면 먹고 먹히는 자연의 섭리요, 불교에서 말하는 육신공양이다. 입싹의 한없는 자기희생, 죽어서도 이웃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숭고한 모습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싫었다. 타인에 대한 잔인한 살인도 자식사랑의 본능 앞에서는 용서되는 것인가. 아니면 용서될 수 없기에 희생자가 그것을 스스로 용인한 것일까. 지금까지 마당을 나온 암탉이 보여주었던 꿈과 용기, 사랑과 희생은 불변의 숭고한 가치들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선택만은 억지와 가식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도망치다 힘이 없이 잡혀 먹는 것이 ‘자연’이고 ‘보편’이 아닐까. 그래서 더욱 쓸쓸하고 애처롭다. 사실 그전까지 암탉의 행동은 의인화를 했지만 동물적 본능, 자연의 생리와도 무관하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와서는 부처가 됐다. 그래서 암탉이, 이 작품이 더욱 교훈적이고 감동적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아가, 너도 이제 한 가지를 배웠구나. 같은 족속이라고 모두 사랑하는 것은 아니란다.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야."
- 글
- 이대현(한국일보 논설위원 / 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 / 서울디지털대 초빙교수) 1959년생『우리에게 시네마천국은 없다』 『4세 소년, 극장에 가다』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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