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안데르센 동화가 없었다면 디즈니 영화는? 반대로 디즈니란 영화사가 없었다면 안데르센 동화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오늘까지 이어올 수 있었을까? 안데르센 동화가 어른들의 추억과 환상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을까? 디즈니영화사는 자신들이 자랑하는 캐릭터이자 실제 디즈니가 더빙(음성 녹음)에 참여한 ‘미키마우스’로 탄생 100년을 자랑하고 있지만,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데르센도 마찬가지다. 그저 어린 시절, 한때 어머니가 머리맡에 앉아 읽어주던 자장가로 끝나는 ‘먼 나라 옛날 이야기’로만 기억됐을 것이다. 디즈니에게 안데르센은 위대한 ‘재료’이고, 안데르센에게 디즈니는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요리사’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디즈니와 안데르센의 ‘궁합’이 잘 맞은 이유가 ‘환상’ 때문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영상언어인 영화의 본질은 ‘판타지(환상)’이다. 현실에서 볼 수 없고, 이룰 수 없고, 가질 수 없고, 실현 불가능한 세상을 이야기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은 영화도 궁극적으로 그것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 중에서도 애니메이션은 실사영화와 달리 공간과 시간과 인물과 스토리를 무한 확장할 수 있는 장르다. 컴퓨터그래픽이 발달하면서 그것이 더욱 자유로워졌다.
동화는 어떤가. 마찬가지로 글로 된 예술장르에서 가장 자유롭다. 우리 인간들은 어린아이에게 ‘무한한 상상력’이란 특권을 부여했다. 아이들은 어떤 상상도 할 수 있으며, 어떤 환상도 품을 수 있다고. 어른들은 적어도 아이들이 아이들인 동안에는 그 상상력과 환상을 마음껏 펼치도록 해주고,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그래서 세상에는 수많은 동화들이 나라마다 저마다의 ‘환상’과 ‘상상력’을 뒤집어쓴 채 등장했고, 안데르센도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를 만들어냈다.
어린아이들의 꿈과 환상은 결코 추할 수 없다. 비극적이어서도 안 된다. 공주는 더 없이 아름답고, 아무리 불행한 일을 당해도 결국은 아주 멋있는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미래로 나아간다. 그래야만 아이들도 자신의 미래를 그렇게 생각하고 꿈꾸며 행복해 할 테니까. 이게 안데르센의 동화다. 이 무슨 억지인가.
"안데르센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 사람이 디즈니이다. 어린아이의 머릿속으로만 그려보던 답답한 상상력을 마치 눈앞에 살아있는 요정처럼 펼쳐 보인다."
그 안데르센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 사람이 디즈니다. 동화책 속에 정지된 화면(삽화)으로, 아니면 아예 그것조차 없어 어린아이의 머릿속으로만 그려보던 답답한 상상력을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눈앞에 마치 살아있는 요정처럼 펼쳐 보인다. 그뿐인가? 세상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아름다운 공주와 용기 있고 멋진 왕자들, 화려한 궁정과 자연, 게다가 현실에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온갖 인물과 자연의 파노라마와 아름다운 음악과 춤.
아이들은 디즈니의 세상 속에 살고 싶고 디즈니의 왕자와 공주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동화와 영화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며 자연스럽게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관을 받아들인다. 아이들은 가난한 백성보다는 귀족이나 왕족, 잘생기고 예쁜 얼굴을 가지는 것이 이 세상을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은연중에 배워왔다. 안데르센 동화와 그것을 더욱 ‘환상적’으로 변주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마냥 박수를 보낼 수 없는 이유이다. 인종우월의식, 외모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가치 부여, 선악의 단순한 이분법 등이 아이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다는 비판은 새롭지도 않다.
안데르센 동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만 그런 것은 아니다. 디즈니가 내놓은 수많은 다른 애니메이션들, 새로운 소재를 찾아 멀리 중국에까지 와서 이야기와 인물을 찾아내도 결국 예외가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화려한 첨단 기술로 그것을 보다 더 환상적으로 포장하느냐에 매달려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날, ‘옛날에 아름다운 공주님이 살고 있었는데, 공주님의 얼굴은 눈처럼 고왔으며’로 시작하는 동화책을 북북 찢고 나온 못생긴, 결코 외모 바꾸기를 거부하는 푸른 동물 슈렉과 피오나 공주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엄청난 통쾌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사실《슈렉》의 등장은 디즈니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꼭 아름다운 공주와 멋쟁이 왕자만이 디즈니애니메이션의 주인은 아니라는 사실, 그런 동화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더 아름답고 감동적인 애니메이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디즈니의 ‘길’을 바꾸는 자극제가 되었다. 더구나 일본 애니메이션은 ‘정서’가 다르다고 무시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바로 이웃에 있는 영화사의 ‘반란’과 ‘환호’에는 디즈니도 어쩔 수 없었다.’과 ‘공주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디즈니는 ‘안데르센 동화’에서 벗어나 변화하려고 몸부림쳤다. 그것은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이자, 새로운 시장에 대한 적응 전략이기도 했다. 디즈니는 왕궁을 벗어나 거리로, 가난한 동네로 발걸음을 옮겼고, 아름다운 영상과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디즈니의 전매특허인 ‘종합선물세트’도 과감히 버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르에 재빨리 올라타 영원한 친구인 안데르센을 과감히 자신의 것으로 고치기 시작했다.
《겨울왕국》(감독 크리스 벅, 제니퍼 리) 역시 그 몸부림의 하나이자, 모험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몸부림과 모험은 전세계 디즈니 애니메이션 팬들의 박수를 받았다. 《겨울왕국》은 제목을 바꾼 것에서 보듯, 주인공의 이름에서부터 배경과 스토리, 분위기까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완전히 개작했다. 오누이처럼 사이좋은 친구 카이와 게르다는 엘사와 안나 자매가 됐다.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고 안나의 가슴에 박혀 생명을 위협하는 얼음조각도, 악마가 신과 천사를 놀려주려고 만든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흉측하게 보이는 거울’의 조각들이 아니라 엘사의 마법에서 나오게 했다.
이런 설정은 ‘알고 보면 아름다운 남녀의 로맨스’인 디즈니의 이야기 구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안나를 첫눈에 반하게 만든 사기꾼 왕자 한스와 우직한 얼음배달 청년 크리스토프가 있지만, 주인공은 아니다. 물론 엘사와 안나는 백설공주나 인어공주처럼 아름답지도 않다. 오히려 안나를 말괄량이 이미지로 만들어 서민적 친근감을 느끼도록 했다.
춤과 음악은 어떤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단골메뉴인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군무와 합창은 없다. 누구보다 지금 세계 영화시장에서 강자로 군림하는 장르가 무엇인지를 아는 디즈니는 영화 전체를 하나의 ‘뮤지컬’로 만들었다. 그리고 엘사와 안나에게 진짜 뮤지컬 영화 못지않게 공을 들인 《Let it go》, 《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 같은 노래들을 선사한다. 물론 노래하는 형식(이중창, 번갈아 가며 부르기)과 캐릭터들의 움직임, 영상이나 무대도 뮤지컬의 기법이다.
"사랑엔 놀라운 힘이 있다.사랑을 베풀면, 변화시킬 수 있다. 누구나 부족하다.필요한 것은 사랑이고 해결방법은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은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가치관도 바꾸었다. 안나가 사기꾼 한스 왕자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하겠다고 하자, 엘사는 완강히 반대하며 이렇게 말한다. “방금 처음 만난 남자와 결혼은 안 된다”고. 과거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인어공주나 백설공주 모두 처음 본 남자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신분보다는 얼마나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크피스토프처럼.
물론 《겨울왕국》도 주제는 사랑이다. 영화는 돌 요정인 ‘트롤’들의 합창을 빌려 말한다. “사랑엔 놀라운 힘이 있다. 사랑을 베풀면, 변화시킬 수 있다. 누구나 부족하다. 필요한 것은 사랑이고 해결방법은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은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디즈니의 그 사랑은 이제 남녀가 아닌 가족(자매)에게로 향한다. 얼음궁전에서 엘사를 나오게 하는 것도, 얼음으로 얼어붙은 안나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은 결국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눈물이다. 너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진정한 사랑이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고 세상을 녹이리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메시지인가.
디즈니는 이렇게 새로운 모험과 영리한 세상읽기로 또 다시 1세기를 멋지게 비상하는 꿈을 꾸고 있다. 마치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100년 전, 흑백의 미키마우스가 스크린을 북 찢고 나와 3D입체의 화려한 컬러로 변신해 스크린을 종횡무진 누비듯. 《겨울왕국》이야말로 어쩌면 그 신호탄인지도 모른다. 디즈니는 끝없이 변화할 것이고, 미키마우스처럼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디즈니가 안데르센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거꾸로 《눈의 여왕》의 어느 작은 도시, 평범한 이웃 소년과 소녀를 궁전과 공주 자매로 바꾼 것을 보면 여전히 ‘왕자병’과 ‘공주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 글
- 이대현(한국일보 논설위원 / 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 / 서울디지털대 초빙교수) 1959년생『우리에게 시네마천국은 없다』 『4세 소년, 극장에 가다』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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