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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대 영화

영화를 위한 소설은 없다 - 『더 로드』

영화를 위한 소설은 없다,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 힐코트의 영화 《더 로드》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그래,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이야”
“그리고 앞으로도요?”
“그래, 앞으로도”
소년은 확인하고 싶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아버지와 자신이 살아남아야 할 이유이기 때문이었다. 소년을 위협한 남자를 총으로 죽인 아버지는 자신들 말고는 모두 ‘나쁜 사람들’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목적은 오직 하나. 그 나쁜 사람들로부터 소년(아들)을 지키는 일이었다. “하느님이 나한테 시킨 일이야. 너한테 손대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죽일 거야, 알아들었니?”
『더 로드』의 ‘그날 이후’ 세상은 이미 인간 세상이 아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앙이 지구를 온통 잿빛으로 만들었다. 문명은 고사하고 식량과 물조차 바닥이 났다. 자연의 재앙은 필연적으로 인간들의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조차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했다. 최소한의 인간 경계마저 무너졌다. 오직 생존만을 위해 굶주린 인간들은 야수가 되었다. 한 톨의 식량, 한 모금의 물을 뺏으려, 빼앗기지 않으려 그들은 가차 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마침내 사람까지 잡아먹는다. 눈을 뜨고 있으나 포르투갈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같이 세상은 지옥이 됐다. 지옥이란 죽은 자들의 세상이 아니라, 어쩌면 이렇게 살아남은 자들의 세상인지도 모른다.
더 로드 영화 포스터
어떤 기적이나 구원이 없다면, 인간은 끝내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서로 잡아먹다가 마지막에 한 사람이 남고, 더 이상 배를 채울 다른 인간(식량)이 떨어져 그마저 죽으면 인류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한다는 코맥 매카시가 생각하는 세상은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이처럼 긴 터널 속에 멈춰버린 것처럼 캄캄하고 무섭고 절망적이다. 어둠 속을 더듬고, 넘어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죽음보다 더 비통한 패배를 맛보아야 하고, 오직 ‘생존’을 위해 손과 입에 인간의 피를 바른다. 『핏빛 자오선』이 그랬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그랬다.

『더 로드』의 세상도 그렇다. 암흑 너머로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이는 침침한 해의 자취, 반쯤 산 제물로 바쳐져 옷에서 연기를 피우며 새벽 보도에 앉아있는 사람들, 길을 따라 말뚝에 박혀 죽은 자들의 땅. 색깔을 지우고, 시간을 지우고, 인간의 이름을 지우고, 관계와 만남을 지우고, 인간성을 지운 세상이다.

아버지도, 소년도, 길에서 만난 노인도, 굶주린 폭도도, 갓난아기를 빼앗기고 정신이 나간 여자도 모두 이름이 없다. 색깔은 남자의 과거의 기억 속에서, 꿈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길에서 만난 노인은 “신도 없다”고 했다.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신도 살 수 없다. 그래서 살아남았으나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노인의 말대로 “마침내 모두가 사라지면 여기에는 죽음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거고,  죽음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어디에도 구원의 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이라도 살아있는 한 그는 그것이 끔찍하고 고통스럽겠지만 구원의 빛을 찾아 신과 함께 길을 떠돌 수밖에 없다. 소명이라고 착각해도 어쩔 수 없다. 운명이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인 불을 훔쳐 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이기에 ‘좋은 사람’이고,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둘은 좋은 사람이다.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소년은 인간 본래의 순수성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아들을 위해서는 누구든 죽이지만, 아들의 요구에 따라 노인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도둑을 용서해 줄 정도의 인간성은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짐승이 된 인간들은 모두 ‘나쁜 사람’이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는가. 『더 로드』는 묻는다. 소년의 아버지처럼 그들에게는 절절한 부정(父情)이 없는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생존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일까, 인간이 살수 없는, 인간이 인간일 수 없는 그래서 결국은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생지옥에서 인간과 신이 만들어놓은 선악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더 로드』는 냉혹하다. 어디에도 출구도 열어놓지 않았다. 남쪽 바닷가에 도착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죽고 소년 혼자 그들이 말하는 ‘또 다른 좋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것이 구원이고 그들이 사는 곳이 희망의 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그들 역시 잿빛 세상을 끝없이 떠돌아야 하고, 언제가 ‘나쁜 사람들’이 될지도 모른다. 소년이 “착한 사람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그냥 믿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마지막 희망, 구원조차 우리에게는 연민이나 위안이 결코 되지 못한다. 『핏빛 자오선』이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이미 지난 과거의 냉혹한 확인이 아닌, 미래의 우울한 상상에서조차 매카시는 낙관주의를 단호히 거부한다.
영화 더로드의 한장면
아예 처음부터 퇴로까지 차단해 버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왜 이런 잿빛 재앙으로 뒤덮였는지, 우리가 그런 세상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영화조차 “환한 빛이 쏟아지고, 세상은 흔들렸다”고만 말한다. 설사 알려주었다 해도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이미 산은 불타고 사람들은 미쳐버렸다. 인간이 가장 두려운 공포의 대상인 된 세상은 아내로 하여금 아이(소년)를 안는 것이, 남편의 만류로 할 수 없이 낳았지만 직접 죽여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여자는 스스로 들판으로 나가 다른 인간의 식량이 된다. 자신이 그런 인간이 되기 전에.
보이는 공포보다 보이지 않은 공포, 경험적 공포보다 상상의 공포가 때론 더 끔찍하고 암담하고 섬뜩하다. 경험적 공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얼마든지 피할 수 있으며 또한 일과성이라는 자기 합리화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가상의 공포는 실현 가능성이 적고 불확실하지만, 그 불확실성 때문에 오히려 더 불안하다.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처럼 상상의 공포는 시각적 이미지보다는 세밀한 언어적 묘사와 함축적인 대화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영상은 가상의 공포를 눈으로 “이럴 것”이라고 확인해 줄지는 몰라도, 그 시각적 확인이야말로 환상이란 안도감을 주며 상상과 불안의 날개를 접게 만들고, 비현실을 비현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소설의 빈 공간들은 상상력으로 채워지지만, 영상의 빈 공간은 아무런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금이 간 건물 벽처럼 상상과 리얼리티의 부조화만 드러낼 뿐이다. 《더 로드》도 그런 운명과 타성을 피해가지 못했다.
존 힐코트의 영화 《더 로드》는 소설에 순종했다. 단 한 걸음도 비켜나지 않으려 했으니 ‘맹종’이라고 해야 옳다. 길을 바꾸는 것은 고사하고 순서를 달리해 걷지 않았다. 오직 글을 그림으로 바꾸려고만 했다.  심지어 아버지(비고 모텐슨)와 소년(코디 스미스 맥피)의 대사까지도 그대로다. 소설에 갇혔다고 해야 맞다. 그 속에서 영화는 자신의 언어를 가지지 못했고, 소설이 가진 상징적인 언어들을 놓쳐 버렸다. 단조롭고 지루해 보이는 아버지와 소년의 여정,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고난과 동요와 불안, 그 사이에 놓인 빈 시간들을 메우는 둘의 대화와 상념들이 가지는 묵시론적 메시지, 결코 단순하지 않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심리와 정서, 99%의 절망 속에서 그래도 ‘가슴 속에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1%의 희망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소년의 운명 같은 것들을 표현할 영상언어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영화 《더 로드》는 단조로운 여정의 반복이지만 순간순간의 긴장이나 감동, 철학적인 통찰이 주는 소설의 깊이와 상상으로까지 걸어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순례를 끝내고 말았다.   장소만 별난 ‘패키지여행’ 같은 로드무비가 됐다. 그런 여행은 결국 몇 장의 기념사진으로만 기억 될 뿐 공포든, 불안이든, 감동이든 그것이 가슴 속에 남지 않는다. 『더 로드』는 매카시의 소설이 다 그렇듯 영화로 만들기에 더 없이 좋아 보인다. 미래, 인간, 생존과 구원의 문제를 강하고 냉혹한 시선, 현실적 거리로 끌어당긴 묘사로 그냥 따라 하기만 하면 한편의 좋은 영화가 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치명적 오류는 바로 그 매력과 착각에 있다. 글(소설)이 가진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을 해체하고 파괴할 영상언어가 필요하다. 소설과 달리 영화는 상상력 자체가 무기가 될 수 없다. 그것을 표현할 장치를 찾아내야 한다. 소설의 힘이 강하다고 그 힘에 의지하면 영화는 언제나 소설의 껍데기, 아류만 될 뿐이다.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읽고 싶은 욕구를 심어주기 보다는 이런 작품이라면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합리화와 어설픈 면죄부만 줄 뿐이다.  언제까지 소설이 가진 상상력의 자유로운 표현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영화의 숙명이고, 영화로 만들기에는 어려운 소설이라고 변명할 텐가. 세상에 영화를 위한 소설은 없다. 영원히.
이대현(한국일보 논설위원 / 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 / 서울디지털대 초빙교수) 1959년생 『우리에게 시네마천국은 없다』 『4세 소년, 극장에 가다』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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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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