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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위의 패스포트

베토벤과 슈만의 흔적을 찾아서

 

베토벤과 슈만의 흔적을 찾아서
베토벤과 슈만의 흔적을 찾아서

2020년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생애 처음으로 연구년을 얻어 한 해 동안 본에서 보낼 수 있게 된 나는 베토벤의 음악을, 그의 고향에서 원 없이 들을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본대학은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잠시 법학을 공부한 곳이었다고도 하고, 본의 엔데니히(Endenich)라는 곳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이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니 이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한 해가 적잖이 흥미로울 것이었다.

사회학을 전공하던 학부 시절, 마냥 문학이 좋아 국문과 수업을 듣다 마침내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한 이래 외국이라고는 좀체 가본 적이 없었다. 늦은 공부를 따라가기에 늘 바빴고, 호기심이 많아 읽어야 할 책은 언제나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에 갈 기회를 얻었을 때 조금은 흥분해 있었더랬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와 헤르만 헤세의 책으로 어린 시절의 방황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고, 임마누엘 칸트를 읽으며 철학에 입문해서 마르틴 하이데거의 내맡김[Gelassenheit]으로 학위논문의 방법론을 삼았으니, 좀 늦었어도 독일행은 필연적이었던 셈이다. 아, 전혜린의 「회색빛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게 멋지게 묘사한 뮌헨의 슈바빙이라는 곳도 갈 수 있겠지.

뮌스터광장, 베토벤동상 뒷면
뮌스터광장, 베토벤동상 뒷면

본에 도착한 이튿날부터 무작정 걸었다. 언어가 서투니 제 몸을 괴롭히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슈타인벡(Steinweg) 44번지의 인터내셔널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부린 뒤 잠시 눈을 붙이고는 20대의 배낭여행자처럼 한 손에는 빵과 다른 한 손에는 지도를 들고서 하염없이 걸었다. (나중에 제대로 알게 되긴 했지만) 선제후의 궁전 가운데 하나인 파펠스도르프(Poppelsdorf) 궁전을 한참 지나니 지난밤에 내렸던 본 중앙역이 나왔고, 그곳을 건너 크게 솟은 성당을 따라 조금 더 걸으니 뮌스터플라츠(Münsterplatz)의 한쪽 편에 서 있는 베토벤 동상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많이 울컥했고, 그래서 한동안 주위를 서성였다. 마침 3월 초여서 하늘은 흐렸고 가는 비가 살짝 스쳤다. 프랑스 혁명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새로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분투한 베토벤, 예술가 시민으로서 힘겨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베토벤의 고향에 내가 왔구나. 더구나 그가 태어난 해를 크게 기념하는 해였으니 감동은 좀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좌) 베토벤 동상, (우) 칼 마르크스가 다녔던 본대학의 본관 전경
(좌) 베토벤 동상, (우) 칼 마르크스가 다녔던 본대학의 본관 전경

독일어를 제대로 할 리는 만무해서 의사소통이 쉽진 않았고, 흐린 날씨에 비가 자주 왔지만 처음으로 이국 생활을 하는 설렘과 흥분이 쉽게 가라앉을 수는 없었다. 베토벤 동상에서 다시 조금만 더 걸어 마르크트플라츠(Marktplatz, 시장 혹은 광장)를 지나면 마침내 그의 생가에 이른다. 베토벤하우스(Beethovenhaus). 이제 베토벤과 본격적인 만남의 시작이다. 바로 옆에 있는 예수이름교회(Namen-Jesu-Kirche)에서는 매주 베토벤의 종교 음악을 연주한다니 저녁이 있는 삶을 이곳에서 즐겨도 좋겠다.

베토벤 생가 베토벤하우스 입구
베토벤 생가 베토벤하우스 입구
예수이름교회
예수이름교회

한국보다는 좀 느리게였겠지만 독일도 봄이 오고 있었고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벚꽃이 비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한 날, 이제는 슈만하우스(Schumannhaus)로 이름 붙여진 슈만의 마지막 거처에 배달된 신문에는, 본이 속해 있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 주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가 나왔다는 기사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2층짜리 건물에, 바로 옆에선 새 건물을 짓느라 분주하고 어수선했지만 아기자기하게 책과 사진과 악보 같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는 슈만하우스의 2층은 묵직한 건반으로 유명한 뵈젠도르퍼(Bösendorfer) 피아노와 객석용 의자가 몇 놓여 있었다. 그리고 피아노 옆으로 난 창을 통해서 성 마리아 막달레나(St. Maria Magdalena) 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자주 정신을 잃긴 했겠지만 이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슈만도 이 창에서 벚꽃잎이 흩날리는 성당을 자주 내다보곤 했을 것이다.

슈만하우스 전경
슈만하우스 전경
슈만하우스 2층 뵈젠도르퍼
슈만하우스 2층 뵈젠도르퍼

3월 중순이 넘어서면서 독일도 이동에 제한이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 마땅히 있지도 않았던 나는 숙소에서 자주 음악을 들었고, 또 중고 자전거를 타고 시청 건물 옆 공동묘지로 가서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거기에는 슈만 부부의 묘지가 있었다. 스승의 딸을 사랑하였으나 정작 허락을 얻지 못해 오랫동안의 소송을 통해서야 겨우 결혼에 이른 로베르트 슈만. 클라라와 함께 많은 아이들을 낳고 행복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으나 예술가 특유의 우울과 강박으로 이곳(슈만의 생전에 슈만하우스는 정신과 의사의 진료소였다고 한다)까지 오게 된 것은 아닐까.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 40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의 옆에 묻혔다.

사실 2020년은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의 탄생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했다. 그래서 숙소에서 자주 머무는 동안, 그가 행복하게 지내던 시절,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시에 곡을 부친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을 듣곤 했다. 놀랄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인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Fritz Wunderlich)의 목소리로, “놀랄 만큼 아름다운 오월에(Im Wundershönen Monat Mai)”로 시작하는 이 연가곡을 들으며 따뜻한 계절이 와서 온갖 역병과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길 기도했다. 숙소에서 자전거로 1시간쯤 걸리는 야트막한 산 지벤게비어게(Siebengebirge)를 다녀올 때쯤이면 라인강변에서 햇볕 바라기를 하던 본의 거주자들 사이에도 하이네-슈만의 노래가 들렸다. 언제쯤 놀랍도록 아름다운 오월은 다시 올 것인가.

슈만 부부의 묘지
슈만 부부의 묘지

<시인의 사랑>과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곡들을 담은 분덜리히 음반의 마지막 곡은 슈베르트의 <음악에 부쳐(An die Musik)>이다. 외출과 이동이 부자연스럽던 이른 봄, 나는 자주 분덜리히의 분더바(wunderbar)한, 놀라운 목소리에 자주 감탄하며 음악을 듣곤 했다. 그러다 어느 아나운서의 마지막 날 방송을 들은 일이 떠올랐다. 대학 초년생 시절 잠 못 들던 숱한 밤의 소중한 벗이었던 아나운서가 정년을 맞는 마지막 날 방송에서 튼 곡도 이 곡이었지. “너 아름다운 예술이여, 나는 네가 해준 것에 대해 너에게 감사한다(Du holde Kunst, ich danke dir dafür).” 같은 프로그램으로 복귀했다 다시 은퇴한 지도 꽤 지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직접 만나 본 적도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이 글을 통해서나마 뒤늦게 감사를 표한다. 잠 못 들고 방황하던 시절의 오랜 벗이었던 그 아나운서에게. 그리고 음악과 시에도. 덕분에 한 시절 잘 건너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짐작하겠지만 어느 프로그램 이야기는 이미선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당신의 밤과 음악>을 두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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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왔고, 또 갑작스러운 소나기도 몇 차례 지나갔다. 그래도 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는 상황이 괜찮은 편이어서 이제는 음악회를 다녀봐야겠다 싶었다. 본에서 가까운 뒤셀도르프(Düsseldorf)는 주도이기도 하고, 하이네의 고향이며 동시에 슈만 부부의 행복했던 시절이 남아있는 또 다른 슈만하우스도 있다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생각이 조정권 시인에까지 닿았다. 10여 년 전, 친하게 지내던 장석원 시인이 조정권 선생을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한동안 한두 달에 한 번씩 만났더랬다. 직장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되어 그랬을까 선생은 젊은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그러다 하이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에 들렀을 때 하이네의 시비를 봤는데 거기에 이름과 생몰 연도만 쓰였더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얼마 후 시집 『고요로의 초대』에 「단 두 줄」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서 작품의 탄생을 살짝 엿본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독일까지 왔으니, 하이네의 고향인 뒤셀도르프에 곧 갈 작정이니 그 시비를 찾아봐야겠다 싶었다.

(좌) 하이네 시비, (우) 시비 뒤편에 위치한 옛 세관 터
(좌) 하이네 시비, (우) 시비 뒤편에 위치한 옛 세관 터

그런데 뒤늦게서야 알았다. 아직 본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 무작정 걷기만 할 때 만났던 거대한 석상이 조정권 선생이 말한 하이네의 시비였던 것이다. 라인강변의 한 쪽 언덕에 둔덕을 좀 쌓아올린 옛 세관 터가 있었는데, 그 앞에 세워둔 거대한 석상에 “Heinrich Heine”라고만 쓰여 있어 조 선생의 시를 떠올렸더랬다. 그런데 그때 본 것이 바로 「단 두 줄」의 시비였다니. 나는 조 선생과 각별하게 지내기도 했고, 또 추모시를 쓰기도 한 이영광 시인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조 선생의 시에 나오는 하이네의 시비를 보았노라고. 그런데 시에서는 단 두 줄이라고 얘기했지만 정작 이 석상에는 단 한 줄만이 새겨져 있노라고. 생몰 연도 없이 다만 시인의 이름만이 새겨져 있노라고 말이다. 이영광 시인은 나와 메일로 나눈 이야기를 조정권 시인 추모 세미나에 글로 썼다. 그의 말처럼 단 두 줄이든, 단 한 줄이든 무슨 차이가 있을 리 없다. 다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먼저 간 이들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는다.

‘괴력의 정신 등반가’(조정권 시인 영전에 바치는 이영광 시인의 추모시 한 구절)이며 ‘국내 망명자’였던 조정권 선생은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 제대로 병문안 한번 간 적 없어 송구한 마음이 들던 찰나, 이국 땅에서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또 다른 시인이 생각났다. 철없던 어린 시절 마구 베끼고 싶었던 시인, 갑자기 독일로 사라져서 그 이유가 궁금했던 시인, 정작 독일에서는 새로 공부를 하고 학위까지 받았다는 그 시인은 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뮌스터라는 도시에서 몇 해 전 가을 숨을 거두었다. 어릴 때 열심히 흉내 냈던 까닭에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너 말고도 허수경 시인 따라하는 사람 많아, 하는 말을 듣게 했던 시인. 평론가가 되어 문단 말석에라도 자리를 얻었으니 언젠가 한 번은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선생님의 시를, 어릴 때부터 많이 좋아했어요,라고. 그런데 한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또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보지도 못했는데 시인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구나. 자신의 생을 허공에다 걸어두고 글을 썼으니 제 수명이 일찍 닳는 것도 몰랐던 걸까.

어릴 때 그렇게 열심히 읽었던 허수경 시인의 시는 이제 잘 읽지 않는다. 그녀의 시가 마음 아프기도 하지만 그 시절의 나도 마음 아프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디 도시의 그늘진 골목에 가서 / 비통하게 머리를 벽에 찧으며… / 다시” 갈 일도(「서늘한 점심상」, 『혼자 가는 먼 집』) 없어서, 아니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지벤게비어게에서 바라본 드라헨부르크성
지벤게비어게에서 바라본 드라헨부르크성

조정권 선생과 허수경 시인을 떠올리다 한 계절이 지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베를린에 들렀고, 마침 평화의 소녀상 철거 반대집회가 있어 참여했다. 마르크스의 고향 트리어에 갔고, 후설과 하이데거가 교수로 있던 프라이부르크에 갔다. 횔덜린의 도시 튀빙엔, 헤세의 마을 칼브, 바흐와 멘델스존의 도시 라이프치히에 갔고, 그리고 철학자의 길이 있는 대학 도시 하이델베르크에 갔다. 그리고, 그리고.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언젠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언제나 한 것보다는 하고 싶은 것들이 더 많고, 해야 할 것들이 더 많게 마련이니, 남은 일을 언젠가는 하겠다 생각하며 남은 날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그래서 앞으로 쓸 글에 미리 제목을 붙여본다. 시와 음악과 철학과 함께하는 독일 여행.

글, 사진 / 전병준

문학평론가, 인천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74년생

평론집 『떨림과 사귐의 기호들』, 연구서 『김수영과 김춘수, 적극적 수동성의 시학』,
『마르크스주의와 한국의 인문학』(공저), 『인문학, 정의와 윤리를 묻다』(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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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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