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용사가 된 여자와 민족 오페라, 여성국극

근대 예술의 풍경 : 용사가 된 여자와 민족 오페라, 여성국극 근대 예술의 풍경 : 용사가 된 여자와 민족 오페라, 여성국극

여자가 남자 역을 연기하는 연극은, 사회적 공간에서의 여성 활동이 확대되는 근대에 출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판소리 창자 중심의 전통음악인들이 주도하는 창극계에서 활성화되었고, 여성국극이라고 불렸다. 여성국극은 전란 속에서 시작하고 성장했다. 여자가 남자 역할을 연기하는 관례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 시작되었고, ‘여성들만이 출연하는’ 여성국극 단체는 1948년 남북한 단독 정부 수립기에 출현했다. 여성국극은 한국전쟁 와중에 임시수도 부산에서 ‘재건’된 후 전후 복구기로 불리는 1950년대 내내 대중 공연계를 풍미했다. 그 양상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미군정기와 민족 오페라 1940년 전후 일제는 전시체제에 맞춰 문화예술계의 조직화를 서둘렀고,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에 속한 단체들은 조선의 남쪽과 북쪽, 압록강 건너 만주로 ‘순연’ 즉 순회공연을 다녔다. 1943년 북선 순연을 시작한 동일창극단은 ‘음악과 무용을 가미한 소위 신편 창극’이라 홍보하며 <춘향전>, <일목장군>, <김유신전> 등을 공연했는데, 이 단체의 공연 포스터에는 박귀희가 맡는 남성 역할이 특기되곤 했다. 이들 공연에서 박귀희는 이도령이 되어 춘향을 구하고, 일목장군이 되어 전쟁을 치렀다.

광복과 함께 시작된 미군정기, 전통예술인 단체인 국악원 산하에 창극단인 국극사가 창단되고, 창극은 국극으로 불렸다. 국가 정체성을 대표하는 국민극이 되고자 하는 의도가 십분 반영된 명명이었다. 남북한 통일 정부 수립이 난망해지던 1948년 무렵 국극은 ‘민족 오페라’라고 광고되었다. 국극사의 <선화공주>도 <만리장성>도, 1948년에 창단한 국극협단의 <고구려의 혼>도 다 ‘국극 민족 오페라’였다.

  • 근대 예술의 풍경 : <옥중화 /> 포스터 (국민신문, 1948.10.24.)
    <옥중화> 포스터 (국민신문, 1948.10.24.)
  • 근대 예술의 풍경 : <햇님과 달님 /> 포스터 (영남일보, 1949.4.14.)
    <햇님과 달님> 포스터 (영남일보, 1949.4.14.)

1948년 10월 무렵, 여성국악동호회가 ‘여성만이 출연하는 창극’을 기치로 내걸고 창단했다. <선화공주> 등 국극사의 몇몇 공연에서 남자 역을 연기했던 박귀희와 박녹주, 김소희 등 국악계 여성들이 결집했던 것. 첫 공연인 <옥중화>의 선전 포스터에 출연진 38명의 이름을 가나다 순서로 밝히며 ‘여성만이 출연하는 대호화판, 민족 오페라’라고 광고했다. 당시 신문은 “요새 와서 여자만의 국극이 탄생. 남자가 가열(加列)하지 않아도 여자만으로도 능히 할 수 있다는 자과자시(自誇自示)만은 좋으나 이러다간 여자만의 영화도 나올 것이고 그러다간 여자만의 세상이 될까봐 걱정”(예원까싶, 경향신문, 1948.10.28.)이라며 가십으로 다뤘다.

1949년 2월 <햇님과 달님> 공연으로 ‘민족 오페라’ 여성국극의 입지와 위세가 분명해졌다. 고대 중국 베이징을 배경으로 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중국의 침략을 받은 한반도 어느 왕가의 비화로 재창작해 ‘달님공주의 수수께끼를 풀어 사위가 된 햇님왕자가 첫날 밤을 치르지도 못한 채 전쟁터로 나가게 된 이야기’로 만든 이 공연에서 박귀희는 햇님왕자가 되고 김소희는 달님공주가 되었다. 오페라라는 서양 음악극 명칭으로 정체성을 표시해온 관례에 맞춤한 공연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 투영된 서양 텍스트를 각색한 이 <햇님과 달님>은 유엔한국위원단 환영 축하공연으로 진행되면서 서양인의 ‘감탄’을 얻어낸 민족예술이 되었다. 당시 유엔한국위원단 환영은 국가적 과제였다.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한 유엔총회에서 유엔위원단 설립을 논의했고, 1949년 초 유엔한국위원단이 입국했던 것. 공연을 본 유엔수석비서 베르트 하이머는 “한국의 오랜 역사의 전설을 극화한 것으로 그 내용과 가사는 우리로서 잘 깨닫지 못하였으나 그 창의 리듬이라든가 동양적인 정서를 표현한 극치의 예술에는 감탄을 금키 어려웠다. 더구나 고전적인 화려한 의상이라든가 연기는 구미각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예술이었다. 더구나 여자들만으로서 표현하는 우아하고도 고상함을 느끼었는데 이는 한국의 높은 문화 수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감명이 깊었다”(유엔단 환영의 창극회 성황 종막, 동아일보, 1949.2.20.)고 ‘이국적 정서 속에 도화경’을 본 소감을 피력했다.

  • 근대 예술의 풍경 : <황금돼지 /> 포스터 (자유민보, 1949.11.22.)
    <황금돼지> 포스터 (자유민보, 1949.11.22.)
  • 근대 예술의 풍경 : <황금돼지 /> 포스터 (국도신문, 1950.2.11.)
    <황금돼지> 포스터 (국도신문, 1950.2.11.)

<햇님과 달님>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곧 새로운 여성국극단이 등장했고, 군대가 공연을 주최하기도 했다. 박초월, 한애순, 임춘앵, 김경수, 조농월, 조농선 등이 결성한 여성국극동지사의 첫 공연 <황금돼지>의 포스터에는 ‘미국의원들의 초대공연에 빛난 민족 오페라 햇님과 달님 후편’이라는 점과 함께 ‘주최-육군부산지역 보급창, 후원-부산헌병대’가 밝혀져 있다. 이 무렵 ‘제3여단 작전과 보도부’는 여성국 악동호회의 대구 공연을 주최했다. 전후 복구기와 여성국극 한국전쟁이 다소 소강상태에 놓인 1952년 전후,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재건’된 여성국극은 환도하는 정부를 따라 서울로 입성하며 공연계를 장악했다. 여성국악동호회는 부산에서 <가야금>, <원앙새>를 공연했고, 박귀희가 물러난 후에는 햇님국극단이라는 이름으로 <쌍동이왕자>, <바보온달>, <은토끼>, <노방초>, <금수레> 등을 공연했다.

  • 근대 예술의 풍경 : 1953년 ‘임춘앵과 그 일행’이 공연한 <춘향전 />의 부용당 장면, 김진진과 임춘앵
    1953년 ‘임춘앵과 그 일행’이 공연한 <춘향전>의 부용당 장면, 김진진과 임춘앵

1950년대 여성국극의 간판스타는 임춘앵이었다. 1952년 임춘앵은 부산시 대교로에 임춘앵무용국악연구소를 차리고 연구생을 모집했고, 여성국극동지사 이름으로 <공주궁의 비밀>, <황금돼지>, <반달>, <청실홍실> 등을 공연했다. 1953년 서울로 올라온 후에는 ‘임춘앵과 그 일행’ 이름으로 <바우와 진주목거리>, <산호팔찌>, <백호여장부> 등을 공연했다. 그리고 1955년에는 대한국악원 산하 여성국악단으로 개명하고 <무영탑>, <구슬공주>, <낙화유정>, <콩쥐팥쥐>, <견우와 직녀>, <연정칠백리>, <여장부>, <먼동은 튼다>, <흑진주> 등을 공연했다.

이외 무수한 여성국극 단체가 부침했다. 우리국악단, 새한국극단, 낭자국극단, 화랑국극단, 삼성국극단, 신라여성국극단, 송죽국극단, 여성국극협회, 시범국극단 등 셀 수 없이 많은 단체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공연을 이어갔다. 1957년 임춘앵의 조카인 김경수와 김진진이 각자 이름의 가운데 자를 따서 만든 여성국극단 ‘진경’은 <사랑탑>, <꽃이 지기 전에>, <별하나> 등을 공연했고, 김경수의 남자 역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 ‘용사가 된 여자’를 향한 환호 이처럼 여성국극은 전쟁의 배후지에서 등장하고 피난지에서 재건되어 번성했다. 그리고 여성국극은 저 먼 과거의 이국적인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전쟁 상황을 서사적 배경으로 설정하는 식으로, 이 번성 환경을 반영했다. 국가 간 전쟁이건 내전이건, 1940~50년대 관객에게 전쟁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여성국극은 화려하고 이국적인 복장과 무대장치, 전통 악기 연주와 춤을 통한 현란한 감정 표현으로 스펙터클한 체험을 선사했다. 전쟁을 현실감의 매개로 사용하면서 현실의 곤궁함을 잊는 환영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여성국극의 남자 주인공들은 용사이고 영웅이다. 이들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사랑과 권력과 질서를 동시에 회복한다. 여성국극에서는 이 영웅적인 용사를 여자 배우가 재현한다. 여성국극을 보러 온 여성 관객은 영웅적인 용사 역할을 연기하는 여자 배우에게 열광하며 영웅적 능력을 대리 경험하고 전복적인 성애적 잠재력을 표출했다. 여자 배우들만 등장하는 무대에서 여자 배우가 남자역을 연기하는 것은, 여성 관객이 극장을 메운 채 환호작약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젠더 정체성 혼란을 시사하는 위험한 변화였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기, 민족예술의 재현 주체를 다투는 현장에는 젠더 정체성을 둘러싼 긴장도 도사리고 있었다.

글 / 백현미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64년생
저서 『한국창극사연구』, 『한국연극사와 전통담론』, 『근대극장의 여자들』, 공역서 『드라마, 메타드라마, 지각』, 『미국 뮤지컬과 국가정체성의 형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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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12-1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