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의 풍경

근대적 부엌의 표상, <주(廚)에 대하야>

 

근대 예술의 풍경 : 근대적 부엌의 표상, 「주(廚)에 대하야」 근대 예술의 풍경 : 근대적 부엌의 표상, 「주(廚)에 대하야」

부엌의 역사는 길지만 오늘과 같이 변모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전통사회에서 부엌은 하인의 영역이었거나 서민 가정의 일상이었기에 사회적으로도 건축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오늘날의 부엌은 주택의 중심이라고도 불리며, 집 꾸미기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곳으로 꼽힌다. 집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관장했던 공간의 지위란 흥미로울 정도로 모순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 변화의 시작은 ‘근대’였다. 서양사회에서 부엌에 대한 관심은 대략 19세기 후반부터 관찰되기 시작하며, 20세기 초에는 이른바 ‘새로운 부엌(New Kitchen)’을 만들기 위한 이론적 연구도 활발했다. 이때 표면적으로 강조된 것은 ‘위생과 효율성’이었으나 근본적으로는 근대적 ‘가정성(Domesticity)’에 기인한다. 여기에는 근대 국민국가와 산업사회라는 배경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부모와 자녀의 애정으로 이루어진 핵가족, 사랑스런 어린이, 그리고 어진 어머니와 좋은 아내와 같은 가치들이 중요해졌고, 가사노동의 담당자로서 ‘주부’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국가와 사회가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할수록 생활을 담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특히 부엌은 가족이 먹을 음식을 관리하는 곳으로 위생적이고 과학적인 장소가 되어야 했으며, 주택 내 가장 기능적인 공간으로서 효율성을 표방했다.

  • 그림 1. 「주에 대하야」K씨 주택 부엌의 실내투시도(1). 식모방, 찬마루, 입식화덕 및 흡기기, 지하실 등을 볼 수 있다.
    그림 1. 「주에 대하야」K씨 주택 부엌의 실내투시도(1). 식모방, 찬마루, 입식화덕 및 흡기기, 지하실 등을 볼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현상은 비슷한 시기 동서양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1926~27년 오스트리아 여성 건축가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의 ‘프랑크푸르트 키친(Frankfurt Kitchen)’이 파급력을 높여가던 무렵, 비슷한 시기 한국사회에서도 ‘부엌개량론’이 전개되었다. 건축가, 의사, 교육자 등 여러 분야의 지식인들이 신문과 잡지 등에 부엌을 논의하는 글을 싣기 시작했는데, 1920~30년대에 집중되었던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부엌개량론’이라 부른다. 큰 범주에서는 주택개량론의 일부였으며, 식모폐지론과 온돌개량론과도 맞물려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한국 가정의 근대적 개조에 대한 사회적 기대도 함께 투영되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한국 부엌의 문제점에 대해 주로 아궁이의 그을음과 연기, 다락 설치로 인해 부엌 천장고가 낮아지는 문제, 그에 따른 어두운 조명환경과 습한 흙바닥, 마당과 장독대까지 걸쳐져있는 부엌의 불편한 작업 동선 등을 거론했다. 그중에서도 ‘아궁이’에 가장 많은 논의가 집중되었다. 취사와 난방을 겸하는 전통적인 부엌 구조가 불편하다 생각했고, 기본적으로 부엌에서 너무 넓은 면적을 차지해 수납과 작업공간이 비좁아진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나무를 땔감으로 쓰던 시절, 임산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아궁이 개량을 강권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개량(改良)’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부엌을 포함한 우리 고유의 주거공간을 ‘고쳐서 좋게 만들어야 할 대상’으로 상정했음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건축가 박길룡은 부엌개량론에 있어 가장 선구적인 활동가였다. 그는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건축기수(建築技手)로 활동했던 한인건축가였으며,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32년부터는 자신의 이름으로 사무소를 열고 작품활동을 펼치는 한편, 신문과 잡지를 통해 주택개량에 대한 여러 기고문을 발표했다. 이때 박길룡이 가장 강조한 부분이 바로 부엌이었다. “주택개량에서 부엌을 제외하는 행위는 개선의 근본 의의를 망각한 것이며 화가(花街)의 매춘부가 자기의 병독을 현대의 화장법으로 감추어보겠다는 것과 차이가 없다”라고 강조한 것에서도 그 뜻이 확고히 드러난다.

  • 그림 2. 「주에 대하야」중 K씨 주택 부엌의 실내투시도(2). 개수대와 식기장, 그리고 채광과 환기를 위한 유리창 등을 제안했다. 식기장을 창가에 배치한 것은 일광 소독에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림 2. 「주에 대하야」중 K씨 주택 부엌의 실내투시도(2). 개수대와 식기장,
    그리고 채광과 환기를 위한 유리창 등을 제안했다. 식기장을 창가에 배치한 것은 일광 소독에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표적 사례로 그가 1932년 8월 동아일보에 총 6회에 걸쳐 연재한 「주에 대하야」를 살펴보고자 한다. 처음 1, 2회는 경성지방과 함흥지방의 전통부엌을 분석했는데, ‘정지간’이라 부르는 함흥지방의 부엌은 ‘편리하지만 원시적 형식’이라 했고 경성지방의 부엌은 ‘편리하지도 못한 원시적 형식’이라 평가했다. 3, 4회는 부엌 설계의 중요성과 계획의 주안점을 다루었으며, 부엌의 방향, 출입구와 창호, 구조와 마감, 천정고와 부뚜막의 높이, 설비 등의 항목으로 나눠 상세히 설명했다. 예를 들면 부엌은 남향이 좋고, 면적은 15평 주택 기준으로 3평 정도가 적당하며, 유리창을 크게 두어 환기와 채광에 유리하게 할 것 등이었다. 마당과 식모방, 그리고 식당으로 쓰일 내실(內室)로의 연결성을 위해 출입구는 세 개소를 제안했다.

5회부터는 ‘K씨 주택’이 등장하는데, 주인 부부와 두 명의 자녀, 식모를 포함한 5인의 주거공간으로 ‘조선식에 양식과 일본식을 조금 가미한’ 열칸 반짜리 주택이었다. 앞서 1~4회에 걸친 주장의 요점을 종합해 이 주택의 부엌으로 제시한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식의 부엌 사용방식을 크게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위생과 능률 면에서의 개량안을 수립하려한 노력이 엿보인다. 생선을 굽거나 찌개를 끓이는 용도로 쓸 입식화덕 위에는 환기를 위해 상부에 흡기기(吸氣器)를 설치할 것도 제안했다. 부엌의 기능적 독립성과 능률적 동선 계획을 강조한 점은 근대건축의 기능주의적 관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개수대였다. 박길룡은 개수대야말로 ‘부엌의 크기를 불문하고 반드시 갖추어야 될’ 필수적인 설비라 강조했다. 그림을 보면 오늘날 싱크대의 모습과 유사하지만, 박길룡이 “일본말로는 ‘나가시[流し]’라 하고 영어로는 싱크(Sink)라고 하는 것이니 우리 조선말로는 적당한 명칭이 없다”라 설명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생소한 것이었다. 다만 그림 속의 개수대는 1920년대부터 일본에서 유행했던 ‘스즈키식고등취사대(鈴木式高等炊事台)’를 한국 실정에 맞게 절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박길룡은 1933년 저서 『재래식 주가개선에 대하야. 제1편』에서 「주에 대하야」를 정리해 다시 발표하게 된다.

  • 근대 예술의 풍경 : 그림 3. 「주에 대하야」중 K씨 부엌의 평면도. (가)~(라)의 이름으로 각 부의 명칭과 기능을 설명했다. (출처: 박길룡, <재래식 주가개선에 대하야. 제1편 />, 1933)
    그림 3. 「주에 대하야」중 K씨 부엌의 평면도. (가)~(라)의 이름으로 각 부의 명칭과 기능을 설명했다.
    (출처: 박길룡, <재래식 주가개선에 대하야. 제1편>, 1933)

「주에 대하야」는 20세기 초 한국 사회가 그렸던 근대적 부엌의 표상이었다. 그 요점은 ‘능률과 입식화’였는데, ‘입식으로 일한다’는 것은 부뚜막 아궁이 앞에서 쪼그리고 앉거나 구부정한 자세로 일하지 않게 됨을 뜻한다. 바로 개수대와 입식화덕이 물과 불 사용의 입식화를 위한 필수적 장치였다. 입식화에 대한 박길룡의 관점은 더욱 확고해져, 일례로 1930년대 중반 이후의 기고문에서는 부엌에서 완전히 아궁이를 없애는 것으로 바꾸는 변화를 볼 수 있다. 1936년 《女性》의 「새살림의 부엌은 이렇게 했으면」에 실은 글이나 이듬해 출간한 『재래식주가개선에 대하야. 제2편』을 통해, 부엌에는 전부 입식화덕만 설치하고 난방은 모두 각 방마다 불을 땔 수 있는 함실아궁이로 바꿀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즉 아궁이의 취사와 난방 기능을 분리하자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과히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20세기 초의 다양한 부엌 논의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부엌 개량을 추진하지 못한 채 담론상의 전개에 머물렀다. 박길룡의 부엌개량안도 결국 실현되지 못한 계획안으로 남았거나, 일부 상류층 주택에만 설치되는데 그쳤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식민지 상황이라는 시대적 한계와 취사·난방을 분리하는 기술적 제약을 우선적인 이유로 들 수 있다. 부엌개량론이 조선총독부하 생활개선운동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부엌 개량에 관한 사회적 논의의 기저에는 순수한 의미의 부엌의 편리성보다 국민의 근대적 생활 개조를 촉구하는 의도가 혼재될 수밖에 없었다. 근대기 부엌을 둘러싼 우리의 동상이몽이었다.


글 / 도연정
건축사 연구자, 건축연구소 후암연재 대표, 1976년생
저서 『근대부엌의 탄생과 이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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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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