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가 자라는 지역은 흔히 ‘커피 벨트’라고 불리는 적도 부근이다.
열대 기후이기는 하지만 고산지대의 선선한 곳에서 커피가 자라는데 비해
카카오 나무는 그야말로 기온이 높고 매우 습한 저지대,
즉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다.
1cm 정도의 아주 작은 꽃이 수정되어 열매가 되려면 모기나 깔따구 같은
작은 벌레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하고, 또 병충해에 약한 카카오 나무와 열매를 지켜주는
균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재배와 수확을 위해서는 열악한 환경이 필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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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롭고 황홀한 초콜릿의 원료가 자라는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땅. 우리가 초콜릿을 음미하며 즐길 수 있는 것은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카카오 빈 생산을 위해 땀 흘리는 산지의 숨은 마스터들, 즉 ‘농부’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소비환경을 알기 어려운 그들에게 좋은 카카오 원료를 개발할 수 있도록 쇼콜라티에와 연결하여 지속 가능한 초콜릿 소비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는 의식 있는 초콜릿 조력자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어떤 농업이든 다 그렇겠지만 카카오 역시 다양한 품종이 존재하기 때문에 각각의 특성을 이해한 가공 공정을 거치게 된다. 특히 발효 공정이 초콜릿의 맛을 좌우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농부들은 자신들이 직접 수확하고, 발효하고, 건조시킨 카카오 빈으로 만든 초콜릿을 맛보기는 어렵다. 덥고 습하며 인프라가 부족한 생산지에서는 초콜릿을 만들기도 쉽지 않고, 산지에서 유통되기엔 고가의 상품이기 때문에 초콜릿의 소비는 산지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런 막막한 환경에 모티베이션과 희망을 가져다 준 것이 바로 ‘빈투바(Bean to Bar)’이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빈투바. 앞서 7화에서 소개한 것처럼 보통의 경우에는 대형회사가 커버춰 초콜릿을 판매하고, 이 안정적인 원료를 사용하여 쇼콜라티에는 자신의 영감을 더해 작품을 만들어낸다. 반면, 빈투바는 산지에서 조달된 카카오 빈을 가지고 초콜릿을 만들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쇼콜라티에가 모두 알 수 있기 때문에 산지로의 빠른 피드백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대형 기업들은 보통 자사의 테이스터에 의해 카카오 빈을 블렌딩하여 안정적인 커버춰를 만들어 내는데, 이에 비해 빈투바 초콜릿을 만드는 과정에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매년 같은 양과 같은 질의 카카오를 얻을 수 있을 지의 문제가 순전히 자연에 달렸다는 점이다. 또한 어떤 카카오가 좋은 유전적 특성을 지녔다고 할 지라도, 제대로 가공하지 않으면 좋은 초콜릿을 얻을 수 없다. 특히 발효되기 전에는 초콜릿의 맛이 전혀 나지 않는다. 수확한 철과 조건에 따라 며칠간 발효를 시킬지도 결정해야 하고, 서로 다른 품종을 섞었을 때 혹은 과육이 많고 적음에 따라서도 향미가 크게 달라지게 되므로 ‘초콜릿의 완성도’에 맞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또, 발효가 끝난 카카오 빈은 펼쳐놓고 건조시켜야 하는데, 그 동안 통풍이 안 되면 발아해 버리기도 한다. 이처럼 발효와 건조는 매우 복잡한 공정이고, 초콜릿이 비싸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모든 단계에서 조력자는 필수적이다.
빈투바에 관심이 집중되고, 카카오 풍미를 겨루는 국제초콜릿어워드가 각광을 받게 되면서 이제 농부와 노동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농부’라는 이름으로 묵묵히 일해온 그들이 복잡한 공정에 영혼을 담아내는 기술자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카카오 빈 품종과 발효의 결과물을 완성된 초콜릿으로 되돌려줌으로써 보다 안정적이고 재현성 높은 제조 기술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막연했던 그들의 노동이 높은 가치를 가진 기술로 인정받게 됨은 물론, 더 나은 원료를 만들어내는 기술자적 고민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초콜릿 조력자 중 한 명인 국제 초콜릿 심사관 사츠타니 카나코는 생산자와 쇼콜라티에를 알리고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서로를 연결해주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산지의 농부들은 가공기술에 매진할 수 있도록, 또 쇼콜라티에는 멋진 기술로 작품을 만들어 판매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들 덕분에 생산지에서의 다양한 노력을 우리 같은 소비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산지들 대부분이 여전히 그렇지 못하다. 카카오 빈을 만드는 농부들은 본인의 이름을 걸고 오늘도 당당하게 노력하고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 일상에서 초콜릿을 오래 음미하고 즐길 수 있으려면 카카오 산지와 함께 하는 다양한 방식들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카카오는 양이 중요한 사업이었다. 소규모 생산자나 제조업체에게는 아직까지도 효율적인 사업 모델이 되지 못한다. 그 결과 농가는 늘 빈곤에 시달리고 대형 제조업체가 최대의 수익을 얻게 되는 구조가 이어져 온 것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초콜릿을 즐기며 생활할 수 있으려면 카카오 농가와 초콜릿 산업이 함께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커피와 마찬가지로 산지에서의 원가만 따지는 것이 아닌, 생산지 농부들의 땀과 노력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고, 초콜릿을 소비할 때 산지의 이야기를 함께 음미하는 의식 있는 소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소비자인 우리들이 ‘먹거리’에 대한 안전과 안심을 기준으로 소비행동을 취한다면, 초콜릿이 우리들에게 주는 행복은 미래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먹는 것이 바로 내가 된다고 했다. 좋은 음식을 소비할 수 있는 마음을 키울 때, 세상에는 영혼을 담는 기술자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윤선해
㈜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커피교과서>, <커피집>, <커피과학>, <커피세계사>,
<스페셜티커피 테이스팅>, <향의 과학> 등 번역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