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영혼을 담는 기술자’들 중에 꼭 한번 소개하고 싶었던
마스터 블렌더가 바로 초콜릿을 만드는 쇼콜라티에였다.
원료와 소재의 특성을 잘 파악하여 적합한 가공법을 찾아내고, 정성스레 익혀서
마침내 새로운 맛과 향을 만들어 내는 윌리 웡카의 움파룸파 같은 최고의 기술자들.
초콜릿에 영혼을 불어 넣는 이름, 쇼콜라티에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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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을 때, 도쿄 롯본기의 한 영화관에서 관람 중이었는데, 그때의 황홀했던 경험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골든 티켓을 들고 공장 안으로 들어갈 때, 공장문이 열리는 순간 눈앞에는 초콜릿 강이 흐르고 동시에 영화관 안에는 바람을 타고 초콜릿 향이 풍겨져 나왔다. 흥미로움에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뇌가 열리는 듯 했고, 영화에 몰입하게 된 것은 물론, 그 향의 기억은 초콜릿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달콤하고 쌉싸름하면서 향기로운 삼박자가 이토록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음식이 또 있을까. 초콜릿 숍 쇼케이스 안의 검은 보석처럼 반짝 반짝 진열되어 있는 한 알, 한 알의 초콜릿들. 이는 ‘쇼콜라티에’라고 불리는 기술자들의 작품이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저렴하고 손쉽게 집어 올릴 수 있는 초콜릿 과자들과는 존재감도 다르지만 초콜릿을 만들 때 드는 노력과 시간과 정성에 비하면 가격 또한 비교적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양 많이’ 문화에서 제 값을 받기란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초콜릿을 작품이라 하니 정말로 화려한 직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 보인다), 그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요리사들처럼 혹은 조각가나 도예가 등의 예술가들처럼 힘든 수행의 시간이 필요하다. 목표가 초콜릿을 만드는 것이라 할지라도 원료인 커버춰나 카카오에 국한되지 않는 넓은 식견과 경험이 필요하며, 각각의 재료마다 다른 물성을 이해함은 물론, 독특한 재료들과의 페어링 등 끊임없는 탐구와 학습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특히, 프랄린의 매력은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에 더불어 여러 가지 재료들의 조화로 피어나는 창의적인 맛의 세계에 있다고들 한다. 초콜릿 혼자서 내는 맛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음식이기에 초콜릿 자체의 품질에 못지않게 함께 하는 재료들의 품질이 매우 중요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초콜릿을 매개로 다양한 맛과 형태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일단 초콜릿의 아주 독특한 물성을 제대로 파악해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때 단순히 ‘이것과 저것을 섞어서 A를 만든다’가 아니라 ‘왜 이렇게 섞는가?’ 또는 ‘왜 이것부터 섞는가? 왜 그 재료여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합당한 답을 찾아내면서 원리를 이해하고, 완성품을 위한 과정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기술자는 머리로 이해한 것을 무한 반복하여 현장에서 몸으로 숙련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우리나라 1세대 쇼콜라티에 고영주 선생은 말한 바 있다. 초콜릿만 알아서는 초콜릿을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간과 정성이 담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 그것을 만든 사람과 시간에 예를 갖추어 즐길 때 얻을 수 있는 감동은 상상 이상이다. 이를 모두 흡수하고 싶다면 오랫동안 음미하자. 마치 위스키처럼. 짧은 토막 기사 하나를 읽을 때와 장편소설을 읽을 때를 비교하면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깊이가 있는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준다. 영혼이 담긴 프랄린 한 조각은 절대로 기계로 찍어낼 수 없는 맛이다. 누가,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 잠시만이라도 생각한다면 작은 한 조각의 가치는 분명 내가 지불하는 금액 이상일 것이다.
쇼콜라티에가 사용하는 초콜릿 원료를 만드는 회사에도 마스터 블렌더는 존재한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처럼 초콜릿 회사들은 자신들만의 비밀스런 노하우로 여러 종류의 카카오 빈을 혼합하여 만드는데, 이 작업 역시 AI로 대체될 수 없는 마스터 블렌더만의 고유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매년 수확하는 카카오 맛이나 품질에 편차가 나지 않도록 보완 작업을 하는, 이 카카오 테이스터들의 평가와 선택을 통해서 제조사별로 다른 특유의 초콜릿(커버춰) 향미가 만들어지게 된다. 세상에는 똑같은 단맛도 똑같은 쓴맛도 존재하지 않듯이 카카오 함량이 같은 다크 초콜릿이라도 선택과 과정에 따라 품질이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진다. 위스키에도 원주가 되기 전까지의 여러 과정이 있었듯 초콜릿다운 향미가 전혀 없는 카카오 빈이 초콜릿의 원료가 되기까지는 카카오 포드 수집, 카카오 빈 발효, 건조 등의 복합적이고 어려운 공정을 거치게 된다. 카카오 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농부들과 그들에게 조력하고 있는 관계자들의 이야기 역시 한 편의 장편소설을 능가하는 깊이와 감동을 담고 있다.
윤선해
㈜후지로얄코리아 대표
<커피교과서>, <커피집>, <커피과학>, <커피세계사>,
<스페셜티커피 테이스팅>, <향의 과학> 등 번역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