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천재의 대명사, 김시습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에 위치한 김시습의 조형물을 목도했다면 우연일 가능성이 높다. 그 규모도 작은데다 다른 위인들의 동상에 비해 장소도 애매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당현제2교 근방을 유심히 살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노원로24길을 산책하다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 조형물이 김시습을 형상화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우의 천재이자, 조선의 로맨티스트로 통하는 김시습이지만 방랑자 이미지가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시습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학자 홍유손이 지은 제문(죽은 사람에 대하여 애도의 뜻을 나타낸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독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세종대왕의 장려가 있을 정도로 신동이었고,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지어내 당시에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읽어볼 정도로 뛰어난 작가가 되어 있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이후에 방랑 생활을 하고, 거기에 광기 어린 행동도 서슴지 않아서 당대에는 혹독한 평가도 있었겠지만, 홍유손처럼 그의 진심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김시습의 죽음을 수양대군의 세상 탓으로 돌리면서도, 김시습이라면 저세상에서도 자적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속박 없이 마음껏 즐길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유람에 나서면서 종교와 역사, 예술 세계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유명한 명언처럼, 여행을 하면서 풍경을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작된 이 여정에서는 김시습을 바라봤던 시각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방랑자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간절한 꿈을 꾸며 살았는지, 고독한 천재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처럼 ‘꿈꾸다 죽은 늙은이’로 기억되길 바라며.
생육신을 대표하다
김시습을 평가할 때 ‘광인’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건, 그의 과감한 행동 때문이었다.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동조했던 인물들을 향해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단종 복위 운동을 밀고했던 정찬손에게는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시습은 하옥 당하거나 해를 입지 않았다. 17세의 어린 나이였던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김시습은 벽제(지위가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잡인의 통행을 금하던 일)의 통례도 무시했지만, 아무도 그를 건들지 않았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김시습에 대해 괴이한 행동을 한다고 평가했고, 율곡 이이는 승려의 행색을 했지만 유가의 선비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만큼 김시습의 행동이 당대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한성으로 달려가는 김시습을 상상해 보자. 그는 1456년(세조 2년) 6월에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신하가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체포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한성 앞까지 뛰어왔다. 그리고 저잣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여섯 신하의 시신 앞에 서야 했다. 잔인하게 고문을 당한 흔적이 있었으니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권력 앞에 저항하다 죽음을 당하였으니 오죽하였을까. 그렇게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을 때, 김시습이 홀로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서울 노량진에 묻어주었다. 과연 당시 김시습은 정신이 온전할 수 있었을까? 그가 방랑 생활을 하며 괴이한 행동을 했던 건 그만큼 자신에게 몰려들었던 고통을 잊고자 한 건 아니었을까?
본래 이 곳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하위지, 유성원, 그리고 이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처형된 김문기의 묘도 함께 묻어 있다. 사육신의 묘가 있는 사육신역사공원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노량진역과 노들역에서 가깝다. 거리로 따지면 노들역에서 출발하는 편이 사육신 묘를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노들역 이전에 한강대교를 거닐 것을 추천한다. 강변북로를 따라 자전거로 이동하는 것도 좋다. 사육신역사공원을 타고 흘러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사육신역사공원의 안내문 앞에 서게 된다. 함석현 선생의 ‘씨알의 소리’가 눈에 들어오면 그 엄숙한 분위기 앞에서 절로 고개를 떨구게 된다.
사육신의 묘가 있는 사육신역사공원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지만, 공원이 조성되면서 시민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사육신과 생육신의 대표로 불리는 김시습의 절개를 떠올리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해 보는 건 어떨까.
마지막까지 충정을 지키다
강원도 영월군의 청령포에 다다르면 강과 울창한 송림이 어우러진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2004년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을 만큼 뛰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하지만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면 마냥 기뻐할 수는 없다. 강으로 둘러싸인 이 작디작은 섬은 그 뒤로도 높은 산이 솟아 있어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있다. 청령포에 머문다는 건 사실상 고립된 것으로 봐야 한다. 19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월중도’를 보더라도 뱀의 꼬리가 휘감아 들어가는 듯한 묘사가 눈에 띈다.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에, 바로 이곳 청령포에 단종이 처음으로 유배를 왔다. 김시습은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고, 이듬해 1457년에 이곳을 찾았지만, 수양대군은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단종이 있는 청령포를 향해 먼발치에서 절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단종과 그를 추모하던 신하들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이지만, 현재 청령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청령포로 향하는 배를 타고 이동해 들어간 그곳에는 유독 옆으로 휘어진 소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단종이 머문 단종어소 주변에는 마치 절을 하는 듯한 모양의 소나무들이 에워싸고 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사육신과 김시습처럼 자연마저 단종을 향한 충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청령포에서는 관음송을 빼놓을 수 없다. 아마 대부분의 관광객들도 이 관음송 앞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할 것이다. 갈라진 가지 사이에 단종이 앉아 두려움을 달랬다고 전해지는 이 나무의 역사는 무려 약 600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도 높이지만, 마지막까지 치솟아 있는 나뭇가지들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기회의 땅 수락산에 터를 잡다
전국을 떠돌던 김시습에게도 기쁜 소식이 들렸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지 14년 만에 죽고, 어린 왕 성종이 즉위한 것이다. 당시 금오산에서 생애를 마감하려던 김시습은 37세의 나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서울로 올라왔다. 1471년(성종 2년), 따스한 봄기운을 받으며 상경한 것이다. 그는 지금의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에 있는 수락산에 터를 잡았다.
김시습에게 수락산은 기회의 땅이었다. 그는 상경한 뒤에 경전을 다시 공부하면서, 농사도 지었다. 주변의 권유로 다시 관직으로 나가겠다는 포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양대군의 세상과 그에 동조했던 관료들에게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는지, 이후로 수락산에서 10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불교와 유교 서적 등을 쌓아 놓고 독서를 즐겼다. 수레에 책을 가득 싣고 다녔다고 하니, 이만하면 이미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신에 김시습은 글을 통해 정치 사상을 펼쳐 나갔고, 더 나은 지식을 축적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철학과 생태 사상까지 파고들며, 뛰어난 학자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시습이 터를 잡은 수락산에는 유독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조선의 지성으로 불리는 서계 박세당은 김시습의 영당을 조성해 청절사로 발전시켰고, 기개와 절의의 상징으로 통하는 박태보는 김시습을 기리기 위해 석림사를 중창(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새로 짓다)하였다.
청절사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김시습이 생을 마감하면서 부여에 새로 영당을 짓게 되자, 이름만 남아 있게 됐다. 이후에는 박태보를 기리기 위해 노량진에 사당이 세워졌는데, 한국전쟁 때 훼손되어 1968년에 현재의 청절사 터에 세워졌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노강서원이다. 김시습과 그를 존경하던 박태보의 향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수락산은 김시습에게 기회의 땅이기도 했지만, 그를 흠모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수락산 등산 코스를 정해야 한다면, 7호선 장암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1번 출구로 나와 바로 보이는 횡단보도를 건너면, 노강서원과 석림사 안내문을 읽을 수 있다. 수락산 등산 코스 중에서는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른바 석림사 코스로 불리는데, 서계 박서당 사랑채와 노강서원, 석림사까지 만나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금오신화>가 즐거워지는 시간
김시습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금오신화>다. 최초의 한문 단편 소설집으로,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이 수록되어 있다. 제목부터 보면 알겠지만, 발음하기도 어려울 정도라서 학창 시절에 암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도 많지 않다.
<금오신화>를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강원도 강릉시에 위치한 김시습 기념관을 추천한다. 이곳에는 김시습과 관련된 서적들도 있지만, <금오신화>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애니메이션 상영이 준비되어 있다. 그 밖에 김시습과 관련된 짤막한 다큐멘터리도 상영하고 있어서 특히 학생들에게는 알찬 시간이 될 것이다. 비록 ‘이생규장전’과 ‘남염부주지’ 두 편만 상영하고 있지만, 이 두 작품만으로도 김시습의 기획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는 오로지 김시습 기념관에서만 제공하는 영상이다.
<금오신화>는 지금으로 따지면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파격적인 소재의 소설이었다. 귀신과 사랑을 나누거나, 부처와 윷놀이 내기를 하고, 하늘로 날아가 염라대왕에게 인정을 받는 등 현 시대에는 흔한 내용일 수 있지만 당대에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각 이야기에는 조선시대의 어두운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주인공과 사랑을 나누는 귀신이 알고 보니 홍건적이나 왜구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서민들의 삶을 그려낸 것이다.
특히 ‘남염부주지’에 등장하는 염라대왕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이 저승 세계의 임금은 인간 세상에 있을 때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도적을 토벌하였다고 한다. 죽은 뒤에도 재앙을 가져오는 악귀가 되어 도적을 죽일 것이라고 소원했지만, 이뤄지지 않아 이 흉악한 곳에 와서 우두머리가 됐다고 토로한다. 여기서 도적이라고 한다면 수양대군과 그의 추종 세력일 것이다. 이 세계가 ‘흉악한 곳’이라고 표현한 점도 흥미롭다.
이처럼 <금오신화>의 각 이야기들은 단순히 기존의 권선징악을 따르지 않고, 세상을 매몰차게 표현하고 있다. 사육신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고, 단종에게 접근조차 못했던 김시습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론일 것이다.
김시습 기념관은 다소 규모가 작아서 차도에서도 쉽게 놓칠 수 있다. 그 작은 진입로가 말해 주듯 상대적으로 다른 기념관들에 비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김시습을 이해하기 위한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다. 김시습을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한 스토리가 이 소규모의 기념관 안에 가득 담겨 있으니 초당순두부마을과 함께 꼭 들려야 할 곳이다.
김시습이 생을 마감한 마지막 안식처
조선 중기의 문학가 유몽인이 편찬한 설화집 <어우야담>을 보면 김시습에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김시습이 세상을 떠나고, 3년이 지났는데도 얼굴이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묻어달라고 했다. 승려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가매장했다가 화장하기 위해 3년 뒤에 가묘를 팠더니, 얼굴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였다고 한다. 승려들은 살아있는 부처로 여기고, 화장을 거행했다.
이 이야기는 <금오신화>의 ‘취유부벽정기’를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홍생이 부벽루에서 아름다운 선녀를 만나는데, 상사병을 앓다가 하늘로 따라갔다는 내용이다. 마지막에는 홍생의 시신 얼굴빛이 변하지 않아서 신선이 된 것으로 마무리된다.
여기까지 보면, 김시습이 그저 승려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 성리학 등 어느 하나가 진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불교에 깊은 애정을 보이면서도, 사회적 폐단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무조건적인 맹신은 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따졌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김시습 하면 삿갓과 지팡이, 승려를 떠올리겠지만, 그는 전국을 유람하며 뛰어난 학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집대성 중에 하나가 바로 <금오신화>일 것이다.
김시습이 생을 마감한 무량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만수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조선 인조(1623년~1649년)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시습이 무량사를 왜 여정의 마침표로 정했는지 확실치는 않다. 다만 일주문(사찰에 들어서는 첫 출입구)을 지나 천왕문(사천왕을 모신 건물, 일주문을 지나면 다음에 보이는 문)에 다다르면 어느 정도 그의 감정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천왕문에서부터 보이는 극락전은 압도를 당할 만큼 매우 웅장하다. 극락전으로 다가갈수록, 그 힘은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극락 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 그리고 양쪽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보인다. 그 규모 역시 극락전과 더불어 최고를 자랑한다. 세월의 무게를 그대로 간직한 덕분인지, 극락전은 마치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지금의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다시 지었으니, 김시습은 통일신라 때 지어진 극락전을 목도했을 것이다. 58세의 나이에 무량사를 찾은 김시습은 이제 삶의 무게라는 무게는 모두 간직한 초로의 노인이 되었다. 그 웅장한 극락전 앞에서 만감이 교차하지 않았을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방랑 생활을 접어도 될 만큼 무량사를 최고의 안식처로 정했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박세당의 시를 통해 김시습의 삶을 다시 한번 돌이켜본다.
칡덩굴은 섬돌을 묻고 풀은 길을 덮었다.
깊은 숲에 가을 저물어 행인 끊어지고
바위틈에 적막하게 은둔했던 유적을 보고
천고의 맑은 분을 그리며 서글퍼 하노라.
다음 스팟을 보시려면 위의 이미지 숫자 를 순서대로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