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대학자 율곡 이이의 고뇌와 삶

대학자 율곡 이이의 고뇌와 삶
대학자 율곡 이이의 고뇌와 삶

피할 수 없는 숙명과 마주하다

1583년(선조 16년), 임금을 알현하기 위해 궁궐로 향하던 율곡 이이가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를 기회로 여긴 정치 세력들이 율곡 이이를 규탄하기 시작했다.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뇌물과 재물을 탐하는 무능한 신하라고 했다. 심지어 중이 되어 임금과 어버이까지 버렸다고 했으니, 이만하면 율곡 이이의 인생 자체를 부정하려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탄핵 움직임에 선조는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율곡 이이의 병을 돌보도록 지시하였고, 가장 악랄하게 비난했던 송응개는 파직시켰다.

흥미로운 점은 율곡 이이와 선조 사이에 직언과 사직이 반복됐다는 것이다. 율곡 이이의 직언은 해가 지날수록 더 과감해졌는데, 이를 부담으로 느낀 선조는 그의 요구를 회피하거나 거부했다. 선조에 실망한 율곡 이이는 사직을 하고 떠났고, 선조의 부름을 받아 다시 관직을 맡는 일이 반복된 것이다. 율곡 이이의 상소에는 선조를 나쁜 임금으로 묘사하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율곡 이이는 단 한 번도 유배를 간 적이 없었다. 임금을 향해 이런 혹독한 직언을 하는데도 선조는 오히려 그를 철저히 비호했다. 선조는 자신이 식견이 좁고, 사리에 어두워 율곡 이이라는 대학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에 자책하기도 했다.

<율곡 이이 초상화, 파주 이이 유적 내 율곡기념관 />

<율곡 이이 초상화, 파주 이이 유적 내 율곡기념관>

우리는 그동안 율곡 이이를 5,000원권 지폐 속의 인물, 신사임당의 아들, 아홉 번이나 장원한 공부 천재, 10만 양병설의 주인공 정도로 알고 있었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 더 나아가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의 유종(유학의 선비들이 우러러 보는 큰 학자)으로 아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10만 양병설이 나온 이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기 때문에 선견지명이 뛰어난 대학자로 부르기도 한다. 율곡 이이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먼저 율곡 이이가 태어난 강릉 오죽헌으로 떠날 필요가 있었다.

청년 율곡 이이의 강인한 의지를 확인하다

많은 사람들이 오죽헌을 율곡 이이의 고향으로 알고 있지만, 성장한 곳은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였다. 그래서 그의 호도 ‘율곡’으로 불렸다. 하지만 오죽헌도 율곡 이이의 생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직접 학문을 가르쳤던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던 율곡 이이는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1년 만에 이곳 강릉으로 돌아와 ‘자경문(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지어 승려 생활을 반성하고 유학에 전념하기로 한다. 그가 29세에 장원하고, 관직 생활을 시작한 지 4년이 지난 뒤에는 외할머니의 병을 간호하기 위해 다시 강릉을 찾는다. 이 당시에 율곡 이이는 선조를 향해 승려 생활을 솔직히 밝히며 벼슬을 사양하기도 했다. 이듬해 율곡 이이는 왕도정치의 이상을 담아낸 <동호문답>을 선조에게 바치고, 소통을 강조했다. 사실상 율곡 이이와 선조 사이에 직언과 사직이 반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선조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해 버렸고, 율곡 이이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는 임금의 태도에 실망했다. 결국 율곡 이이는 선조 곁으로 돌아온 지 1년도 안 되어 다시 외할머니가 있는 강릉으로 떠나 버렸다.

<강릉 오죽헌 전경 />

<강릉 오죽헌 전경>

오죽헌은 초당순두부마을과 더불어 꼭 들려야 하는 강릉의 핫플레이스다. 특히 5,000원권 지폐의 배경 그림을 촬영할 수 있는 포토 존이 마련되어 있어 인증 숏을 남기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하지만 이제는 오죽헌으로 가는 입구인 자경문부터 눈에 들어올 것이다. 매표소를 지나 율곡 이이의 동상을 거쳐 우측을 바라보면 먼발치에 자경문이 보인다. 율곡 이이가 지었던 자경문의 이름을 따서 ‘강릉 임영관 삼문’과 같은 모양으로 1976년에 건립된 것이다. 강릉 임영관 삼문은 고려시대 강릉 객사의 정문이다. 객사는 외국 사신이나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한 곳이었다.

<자경문, 강릉 오죽헌 />

<자경문, 강릉 오죽헌>

자경문의 내용을 보고 있자면, 율곡 이이가 얼마나 심지가 굳은 인물인지 알 수 있다. 20세의 청년 율곡 이이가 지은 이 글은 그가 세상을 떠난 49세까지의 인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아버지 이원수의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어 가난하게 살았던 점은 자경문의 ‘금욕’을 떠올리게 하며, 실망해 버린 임금을 향해 끊임없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점은 자경문의 ‘정심’과 ‘진성’으로 볼 수 있다. 정심은 놓아 버린 마음을 거두어 들여 바르게 하는 것을 뜻하며, 진성은 해야 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부 천재가 전하는 공부의 의미

강릉 오죽헌에는 율곡 이이의 친필이 담겨 있는 <격몽요결>과 유년기 시절에 쓰던 벼루가 보관되어 있다. <격몽요결>은 초학자들의 교육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중국의 유학자 주자가 지은 <소학>이 교육 지침서로 통했지만, <격몽요결>은 더 세부적인 행동 규범을 담아 총 10장으로 구성하였다.

그런데 <격몽요결>과 벼루가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인물이 또 한 명 있었다.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조선시대의 마지막 개혁 군주로 불렸던 정조였다. 정조는 직접 율곡 이이의 친필을 확인하고, 서문을 지어 율곡 이이를 제사하는 소현서원에 공개하기도 했다. 서문 중에 ‘율곡 이이와 100여 년의 시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표현이 특히 인상적이다. 은연 중에 율곡 이이의 글에서 시원한 기상을 감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책을 읽고 감동하는 것처럼 정조 역시 시대 차이를 인식하며 크게 감탄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이 서문이 신하 이병모의 대필이었다고 하지만, 정조가 율곡 이이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벼루 뒷면에는 정조가 직접 쓴 글이 음각되어 있다.

<<격몽요결 />과 율곡 이이가 유년기에 사용한 벼루, 강릉 오죽헌 내 어제각>

<<격몽요결>과 율곡 이이가 유년기에 사용한 벼루, 강릉 오죽헌 내 어제각>

<격몽요결>은 율곡 이이의 공부하는 방법이 적혀 있다는 점에서 관심이 쏠렸다. 마치 공부 비결이라도 적힌 것처럼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격몽요결>은 그 서두부터 학문이라는 것이 별다른 물건이나 일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는데 웃어른을 공경하거나 부모에게 효도하는 등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이 그대로 적혀 있다. 그 밖에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든가 자세를 바로 해야 한다는 등 요즘 시대에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이라서 엄친아를 꿈꾸는 학생들이 크게 실망할 수 있다.

그 대신에 <격몽요결>의 첫 번째 문을 여는 ‘입지’에서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쉽게 말해서 왜 공부를 하는지 먼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책에는 성인이 되려는 마음을 얘기하고 있어서 막연하게 들릴 수 있지만, 먼저 자신이 무엇이 되려는지 곰곰이 고민해 보라는 게 입지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실용적인 정치와 새로운 개혁을 요구하다

율곡 이이는 아홉 번이나 장원한 덕분에 거리의 아이들이 나와서 ‘구도장원공(아홉 번 장원한 분)’으로 불렀다. 당시 29세가 되던 해에 일곱 번 장원하고 관직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13세와 23세에도 장원하여 이를 합쳐서 구도장원공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좋은 면에서 ‘바른 생활맨’으로 불리지만, 한편으로는 고지식해서 탁상공론을 저지르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아홉 번 장원한 율곡 이이 모형, 파주 이이 유적 내 율곡기념관 />

<아홉 번 장원한 율곡 이이 모형, 파주 이이 유적 내 율곡기념관>

하지만 율곡 이이는 그 누구보다 실용적인 정치를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선조를 왕으로 맞이했던 율곡 이이는 경장, 즉 가야금의 느슨한 줄을 다시 팽팽하게 당겨 음을 조율하는 것처럼 새로운 개혁을 요구했다. 그 첫 포문을 연 것이 바로 <동호문답>이었는데, 중국과 조선의 역사를 다루면서 임금이 걸어야 할 길을 상세히 알리고 있다. 중국 역사에 있어 현명한 임금과 그렇지 못한 임금을 다양한 사례로 나열하고, 조선시대의 임금들에 대해서도 냉철한 평가를 남겼다. 그 밖에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는 여러 원인을 꼽으며 군정 개혁과 경제 개혁을 주장했다. 특히, 공물 방납 폐단의 대안으로 나온 수미법은 조선 후기의 대동법으로 발전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동호문답 />, 파주 이이 유적 내 율곡기념관>

<<동호문답>, 파주 이이 유적 내 율곡기념관>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교육제도였다. 율곡 이이는 늘 교화보다 백성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Well fed, well bred(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라는 서양 속담처럼 먼저 경제적으로 안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삶이 편안하지 않은 백성을 교화하려는 것은 그저 강요에 지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율곡 이이는 교육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선생의 자질과 권위를 드높여 주고, 학생에 대해서는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봤다.

임금까지 두렵게 한 명저의 탄생

율곡 이이의 경장은 <동호문답>으로 시작해서 <성학집요>로 집대성됐다. <동호문답>에도 선조가 개혁 의지가 없자 율곡 이이는 ‘만언봉사’라는 상소를 올린다. 군정을 개혁해야 한다든가 공물을 바치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이야기는 율곡 이이의 저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성학집요>에서는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세종대왕을 롤모델로 삼을 것을 조언하기도 했다. 이미 율곡 이이는 경연 장소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경연이란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고 국정을 협의하던 자리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선조는 율곡 이이의 방법이 너무 과격하다며 배격했고, 충정은 이해하지만 실천하기는 부담스럽다며 회피했다.

그런데 <성학집요> 앞에서는 선조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이 책을 두고 율곡 이이가 한 말이 아니라 성현이 한 말이라며 극찬한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영특하지 못해서 몸소 실천하지 못할까 두렵다고 했다. 물론 만언봉사라는 상소 앞에서도 율곡 이이와 같은 신하가 있어서 나라를 다스리는데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취지를 전하기도 했지만, <성학집요>는 임금도 두려워할 정도로 명저였던 것이다.


<<성학집요 />, 파주 이이 유적 내 율곡기념관>

<<성학집요>, 파주 이이 유적 내 율곡기념관>

<성학집요>가 나온 해에는 동인과 서인이 형성되면서 본격적으로 붕당 정치가 시작됐다. 율곡 이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인으로 지목되면서 동인으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아야 했다. 현기증이 일어났을 때도 감히 임금을 알현하지 않고 귀가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주도한 정치 세력도 동인이었다. 율곡 이이는 당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으로, 건강이 많이 악화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선조는 다시 벼슬을 내리려고 했고, 율곡 이이를 곁에 두려고 했다. 그의 개혁 의지는 따를 수 없었지만, 마치 성현이 하는 말처럼 청산유수였으니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신하였을 것이다.

대학자의 숨결을 따라 걷는 길

율곡 이이가 사직하고 자주 찾았던 그의 고향 파주에 유적지가 있다. ‘파주 이이 유적’으로 가는 길은 의외로 험한데, 몇 번의 샛길을 지나야 도착할 수 있다. 우리가 가끔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유적지를 안내하는 표지판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특별히 관심이 없으면 무심코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파주 이이 유적은 강릉 오죽헌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탁 트인 벌판 앞으로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대형 동상이 보이고, 그 옆에 율곡기념관이 위치해 있다. 현재 율곡기념관에는 구도장원공을 테마로 한 학습용 게임의 흔적이 남아 있다. 퀴즈를 풀 때마다 한 번씩 장원한다는 콘셉트인데 아쉽게도 코로나19 때문에 무대만 설치되어 있고,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율곡기념관은 율곡 이이의 일생을 간략하게 담아낸 족자들을 활용했다. 겉으로만 보면 다소 어수선해 보일 수 있지만 무대 소품으로 자연스럽게 탈바꿈했다.

<율곡기념관 전경, 파주 이이 유적 />

<율곡기념관 전경, 파주 이이 유적>

역사 속 위인들이 늘 그렇듯 율곡 이이도 후세에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명저로 꼽히는 <성학집요>는 조선 후기 임금들의 교재로 인정될 정도였다. 인조는 이 책을 읽고 크게 감탄하여 율곡 이이에게 영의정을 추증(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했다. 숙종과 영조, 그리고 순조 역시 경연의 교재로 사용했고, 정조는 직접 신하들에게 장려하기도 했다. 영조는 <성학집요>를 읽다가 만일 임진왜란 당시 율곡 이이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 보기도 했다. 우리가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위인을 떠올리면서 어떻게 대처했을까 하고 상상하는데,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임금들은 율곡 이이에게 최고의 벼슬을 주기 위해 사업을 벌였고, 각 서원에서는 율곡 이이의 학문을 기리기도 했다.

율곡 이이는 공부 천재나 엄친아, 선견지명이 있는 대학자로 많이 알려졌지만 임금을 상대로 끊임없이 개혁을 요구하며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받아야 할 것이다.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한 것도 아니었다. 붕당 정치라는 현실을 감안해 선조의 입장을 이해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의 절친이었던 성혼마저 임금을 포기하라고 충고했지만, 율곡 이이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나라의 위기를 눈앞에 두고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대학자의 진정한 용기를 보여준 것이다.

<율곡 이이 위폐가 있는 자운서원 내 문성사, 파주 이이 유적 />

<율곡 이이 위폐가 있는 자운서원 내 문성사, 파주 이이 유적>

파주 이이 유적 내에 있는 자운서원은 1615년(광해군 7년)에 율곡 이이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됐다. 문성사에는 율곡 이이의 위패(죽은 사람을 모시는 나무 패)를 모셔 놓았다. 문성사 앞에서 <선조수정실록>에 적힌 그의 평가를 떠올리며 율곡 이이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다시 한번 고민해 본다.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 비용은 친구들이 부담했으며, 처자들이 살 집이 없어 재물을 모아 조그만 집을 사 주었으나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장례식 날에는 거리마다 곡성이 진동하고, 시민들이 모두 나와 횃불을 밝혀 수십 리 밖에도 불빛이 환하게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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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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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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