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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읽거느 새단장 기념 이벤트 2016.01-18~02.29광화문 읽거느 새단장 기념 이벤트 2016.01-18~02.29

역사탐방 길라잡이

서울 도심에서 만나는 허준과 동의보감

서울 도심에서 만나는 허준과 동의보감
서울 도심에서 만나는 허준과 동의보감

허준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1608년 2월,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쇠약했던 왕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까지 겪으며 정신적으로도 쇠약해져가고 있었다. 그가 눈을 감자 곧장 사대부들이 왕의 건강을 돌보던 어의에게 책임을 돌렸다. 사대부들은 임진왜란 당시 갖가지 핑계를 대며 선조의 피난길에 따르지 않았다. 선조는 피난길에 함께한 문무관 17인을 두고 “사대부가 너희보다 못하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여기서 ‘너희’는 천한 일이나 맡아 하던 ‘종’을 일컫는 것으로, 당시 선조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던 사대부들이 왕이 떠나자 당시 17인 중에 한 명이었던 어의의 처벌을 외쳤던 것이다.

다행히 그 어의는 비교적 가까운 지역인 의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71세의 나이에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계속 왕의 건강을 돌보게 된다. 복직과 함께 복원되었고, 내의원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의 배려 덕분이었다. 광해군은 이미 어린 시절 두창(천연두)으로 죽을 위기를 맞았다가 어의의 처방으로 살아났고, 중병을 앓을 때도 그의 뛰어난 의학 지식 덕분에 치료 받을 수 있었다.

<선조를 진료하는 허준 모형, 허준박물관 />

<선조를 진료하는 허준 모형, 허준박물관>

어의가 광해군의 신뢰를 얻은 이유는 단순히 병을 고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마마’로도 불렸던 두창은 신격화까지 되면서 그 어떤 것으로도 거스를 수 없는 미지의 존재와도 같았다. 두창을 치료하려고 나서면 저주라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선 나머지, 누구도 쉽게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한 어의는 자신의 실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감히 약으로 처방을 하려고 한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치료하겠다며 과감히 나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둘러싼 오해들이 있었다. 직접 스승을 해부해서 의학의 큰 깨달음을 얻었다든가 천민으로 태어나 신분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등 드라마적인 요소들이 섞이면서 잘못 알려진 점들이 많았다. 극적으로 여겨진 이야기들이 모두 허구로 밝혀진 점이 아쉬울 수 있지만, 그 어의가 지금까지 최고의 명의로 불린 건 명백히 의술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치료에 관해 그 누구보다 열정이 뛰어났을 뿐, 특별히 실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무려 14년에 걸쳐 <동의보감>을 편찬해 광해군에 바친 어의 허준, 그가 믿은 건 오로지 자신의 ‘실력’이었다.

허준이 전하는 건강 비결을 따라 걷다

허준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서울 강서구는 이미 허준의 고향 일대를 건강 로드맵으로 정하고, 테마 거리를 조성했다. 그 출발은 지하철 9호선 가양역 1번 출구에서부터 정확히 시작한다. 이미 지하철 출입구에서부터 허준테마거리 안내도를 걸어놓고, 허준박물관으로 향하는 길 곳곳에 건강 안내 문구까지 친절히 배치해 놓았다. 모두 <동의보감>이 전하는 건강 비결이다. ‘윗니와 아랫니를 씹듯이 자주 마주치면 이가 튼튼해진다.’라든지, ‘두 손바닥을 뜨겁게 비벼 눈을 눌러주면 눈이 좋아진다.’ 등 우리 생활 속에서 충분히 실천할 수 있는 간단한 문구들이다. 무엇보다 허준 캐릭터 조형물들이 함께 배치됐다는 점에서 아이들에게도 훌륭한 교육 현장이다.

<허준이 전하는 건강 비결, 허준테마거리 />

<허준이 전하는 건강 비결, 허준테마거리>

<허준테마거리 약도 및 안내 조형물, 허준테마거리 />

<허준테마거리 약도 및 안내 조형물, 허준테마거리>

허준박물관을 경험하고 허준테마거리를 다시 거닐다 보면 새삼스레 넓은 들판이 떠오른다. 허준박물관의 약초원에는 <동의보감>에 기록된 약초 100여 종이 심어져 있다. 약초 내음을 마음껏 즐기고 돌아본 허준테마거리는 자연스럽게 전방이 탁 트인 들판이 오버랩된다. 서울 시내에 위치했다고 하지만, 우거진 숲이 비교적 많이 보이고, 근방에는 한강공원을 배경으로 한 산책로가 길게 늘어서 있어 ‘치유의 숲’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허준 동상, 허준테마거리 />

<허준 동상, 허준테마거리>

허준테마거리를 단순히 눈요깃거리나 역사의 흐름 정도로 이해할 수는 없다. 허준 캐릭터 조형물 사이로 보이는 문구들은 하나 같이 곱씹어 볼 만한 건강 비결들이다. 물론 누구에게는 흔한 문구들로 보여서 심심해 보일 수 있지만, 지금까지 자신의 몸조리에 매우 소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배와 발을 따뜻하게 한다든가, 신맛이 간에 좋다는 등 다들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면서 정작 잘 지키지 않는 것들이 많이 보인다. 허준테마거리를 거닐며 건강에 대해 고민해 보고, 그 정점에 있는 허준박물관에 들어서면 깨닫는 점도 많을 것이다.

신도 이겨낸 허준의 두창 치료제

허준을 둘러싼 오해가 많다 보니 정작 진짜 업적이 가려지는 경우가 있다. 허준 하면 <동의보감>만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두창(천연두)에 대응해 의학적 대책을 정리한 <언해두창집요>도 허준의 큰 성과 중 하나였다. 그렇다 보니 허준박물관에서 유독 <언해두창집요>가 눈에 띄었다. 당시 두창은 전 세계적으로도 무서운 질병이었기에 어느 누구도 약을 쓰지 말아야 하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마땅한 치료 방법이 없다 보니 그저 운명으로 받아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결국 무속적인 인식까지 생겨 버렸다. 누구라도 치료에 관심이라도 가졌다 하면 이른바 ‘두창신’에 도전하는 일이 되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두창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알 수 있다. 치료가 된다고 하더라도 딱지가 떨어진 지점에 자국이 남으면서 몰골이 흉해졌으며, 눈이 멀기도 했다.

상상만 하도 끔찍하겠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두창처럼 치사율까지 높았다면 어땠을까? 두창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유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치사율까지 높은 전염병이 아주 오랫동안 퍼져 있었던 셈이다. 다행히 코로나19는 1년이 지나서야 백신이 조금씩 보급되고 있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이러한 전염병이 그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언해두창집요 />, 허준박물관>

<<언해두창집요>, 허준박물관>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두고 피난길에 오른 탓에 이미지가 안 좋지만, 의학에 관해서는 관심이 많았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은 탓인지, 허준에게 의서를 편찬하는 지시 내용을 보면 상당히 구체적이다. 물론 <동의보감>이 대표적이지만, <언해두창집요>에서도 그 절박함이 묻어난다. 무엇보다 허준이 자신의 아들인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이미 선조는 다른 왕자를 두창으로 떠나보낸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을 것이다. 선조는 허준에게 <언해두창집요>의 편찬을 지시하면서 약을 쓰도록 한 이유를 꼭 적도록 하였고, 간행하여 널리 퍼뜨릴 것을 분명히 하였다. 허준은 지시에 따라 두창에 왜 약재가 필요한지 상세히 적었다. 어떻게 보면 당시 백성들에게는 두창신에게 도전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역대 왕들이 금기시했기 때문에 선조에게도 큰 용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언해두창집요>가 특별한 이유는 허준이 자신의 실력을 믿고 금기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선조의 아끼지 않은 지원도 있었다. 어쩌면 ‘두창신’에 도전한다는 거창한 인식보다 자신의 의술을 믿고, 모험을 걸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한 그날이 바로 허준 일생에 있어 가장 극적인 터닝 포인트였다.

선조의 의지와 허준의 의술이 만든 ‘조선의 백신’

의서라고 한다면 대부분 질병을 중심으로 기록됐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동의보감>은 달랐다. 허준은 몸 안의 세계인 내경편, 몸 겉의 세계인 외형편, 병의 세계인 잡병편, 약물의 세계인 탕액편, 침구의 세계인 침구편으로 나누었다. 그동안은 질병 하나를 가지고 의서를 뒤졌다면, <동의보감>은 몸을 중심으로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체계적인 의서로 각광받았다. 물론 지금으로 봤을 때 이러한 분류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겠지만, 몸을 중심으로 작성되다 보니 미리 예방을 권유하는 ‘양생’이 강조되어 있어 특별히 주목받았다.

여기서 의서를 향한 선조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동의보감>은 시중에 떠도는 중국 의서들의 요점을 추리고, 국산 약명으로 적도록 하여 백성들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수양’을 우선으로 하는 약물 치료를 강조했다. 대부분은 이런 접근이 모두 허준 덕분에 이룬 것으로 생각하지만, 모두 선조의 지시에 따라 진행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진행할 최고의 의술가로 허준이 낙점된 것이다.

<<동의보감 /> 초간본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 허준박물관>

<<동의보감> 초간본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 허준박물관>

<동의보감>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이 바로 ‘수양’에 있다. 몸과 마음을 갈고닦는 것이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선조의 강력한 확신이 드러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선조는 이미 대학자 율곡 이이로부터 수양의 중요성을 배웠고, 임진왜란 이후에 좀처럼 낫지 않는 자신의 병세에 ‘수양’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았을 지도 모른다. 수양으로 병세 없이 장수할 수 있다고 하니, 오늘로 따지면 선조의 의지와 허준의 의술이 담긴 조선의 백신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의보감 />을 집필하는 허준 모형, 허준박물관>

<<동의보감>을 집필하는 허준 모형, 허준박물관>

허준은 선조의 지시에 따라 내로라 하는 의술가인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과 함께 <동의보감> 집필을 시작했다. 하지만 정유재란으로 인해 이 대규모의 프로젝트 팀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후에 선조의 지시에 따라 허준 홀로 집필하게 된다. 선조가 허준의 전문성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에 <동의보감>은 선조가 승하한 이후에 무산되는가 했지만, 유배 생활을 기회로 여긴 허준의 집념으로 결국 편찬에 성공하게 된다.

전염병 치료의 모범이 되다

허준박물관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보물은 바로 <신찬벽온방>과 <구급간이방>이다. 문화재청의 보물 지정서와 함께 보관되어 있는 만큼 특별한 의서다. 불리는 이름이 다양할 정도로 전염병이 창궐했던 조선시대에는 주술적인 인식이 강했다. 국가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전염병이 무서워서 귀신의 넋을 풀어주거나, 주문을 외우는 등 비과학적인 행위를 도맡아 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전염병 의서에도 주술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허준의 <신찬벽온방>에서는 좀 더 과학적이고 정통적인 처방을 채움으로써 주술적인 내용이 많이 사라졌다. 기존에 나왔던 <간이벽온방>은 여전히 주술적 내용이 많았고, 내용이 부실해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약의 채취나 처방 모두 일반 백성들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 나온 <본문온역이해방>은 처방을 두 배로 늘려 근본적인 대책에 조금씩 접근하고 있었다.


<<신찬벽온방 />과 보물 지정서, 허준박물관>

<<신찬벽온방>과 보물 지정서, 허준박물관>

<<구급간이방 />과 보물 지정서, 허준박물관>

<<구급간이방>과 보물 지정서, 허준박물관>

허준의 <신찬벽온방>이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동의보감>에 적힌 내용보다 더 진일보했다는 점이다. <신찬벽온방>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기를 더 유심히 살핀 흔적이 있다. 왜 하필 이 시기에 전염병이 유행하는지, 탐구하고 숙고하다 보니 편집 순서도 바뀌었다. 명나라 이천의 <의학입문>을 참고한 대목도 흥미롭다. 피부에 침투하는 깊이에 따라 전염병을 분류한 것인데, 몸 겉에 머문 것을 표증, 몸 속에 머문 것을 이증, 그 가운데에 머문 것을 반표반리증으로 나눠서 각각 땀으로 발산하고, 배설로 쓸어내며, 뭉친 곳을 잘 풀어주는 처방을 내린 것이다. 허준은 여기에 몇 가지 처방을 추가하고, 더욱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덕분에 허준의 <신찬벽온방>은 이후 오랫동안 전염병 치료의 모범이 되었다.

반면, <구급간이방>은 약초와 관련된 용어와 병명 등을 한글로 기록한 희귀 의서로 통한다. 한글로 기록된 덕분에 국어 음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허준을 생각하며 걷는 도심 속 힐링 명소

허준박물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약초원을 지나 출구를 나서면 자연스럽게 허가바위와 연결되어 있다. 설화에 따르면 허가바위는 양천 허씨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고, 허준이 직접 <동의보감>을 집필한 장소로도 전해진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덕분인지, 허가바위는 서늘한 기운과 함께 묵직한 느낌이 있어 바라볼수록 절로 숙연해지는 곳이다.

그 기운을 받아 허준박물관 출구로 다시 돌아가 좌측으로 50m 정도 걷다 보면, 바로 허준근린공원으로 가는 입구가 보인다. 강서구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명소로, 광주바위라는 최고의 절경이 맞이해주는 곳이다. 경기도 광주에 있던 바위가 떠내려와 양천(강서 지역의 옛 지명) 관아에서 싸리비를 조세로 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광주바위 전경, 허준근린공원 />

<광주바위 전경, 허준근린공원>

서울 시내에서 이런 경치를 볼 수 있다는 건 좀처럼 쉽지 않다. 9호선 가양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한 허준의 건강 비결부터 이어진 강서구의 건강 로드맵은 생각보다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친절한 안내도와 함께 산책로까지 조성되어 있으니, 이만하면 서울 시민들이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핫 플레이스라고 할 수 있다.

허준은 서자로 태어나 당하관 정3품 통훈대부의 한계를 넘어서 정1품 보국승록대부로 추증(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됐다. 지금으로 보면 보건복지부 서기관으로 시작해 장관까지 승진하며 대우받았던 셈이다. 그에 관해 잘못 알려진 것 중에 하나가 과거에 급제하여 어의가 됐다는 것인데, 실은 <미암일기>로 유명한 유희춘이 이조판서에게 추천하는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진다. 양예수, 안덕수, 손사균 등 유명한 명의들과 함께 유희춘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그의 의술이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허준이 유희춘의 얼굴에 난 종기를 직접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 동상, 허준근린공원 />

<허준 동상, 허준근린공원>

의학 학습 과정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지만, 허준은 자신의 실력만 믿고 전진한 매우 뛰어난 의학자였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을 때, 직접 자신의 약재를 들고 왕자를 치료하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배포가 큰 남자였을 것이다. 의술에서도 그렇지만 이러한 배짱 덕분에 선조와 광해군의 무한 신뢰를 얻은 게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동의보감 신형편에 나온 허준의 메시지를 통해 진정한 건강 비결이 무엇인지 고민해 본다.

“질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마음을 치료해야 한다. 마음속에 있는 의심, 생각, 망념, 불평 불만, 일체의 모든 사람과 자신 간에 쌓인 후회와 평생 동안의 과오 등을 곧바로 떨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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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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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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