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그의 손만 거치면 명품이 된다

조선의 위대한 스승, 퇴계 이황
조선의 위대한 스승, 퇴계 이황

기생의 아들이 초고속 승진할 수 있었던 비결

광화문 광장에 자리한 세종대왕의 동상을 보고 있노라면 ‘포용’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농경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백성들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임금을 뽑자면 단연코 세종대왕일 것이다. 농사를 짓는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기 위해 해시계와 물시계 및 천문 관측 기구인 혼천의를 내놓았고,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한글 창제까지 하였으니 이만하면 시민들의 소유인 광화문 광장을 지킬 만하다.

‘포용’을 상징하는 세종대왕의 쭉 뻗은 손 앞에는 장영실이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앙부일구와 측우기, 혼천의 모형이 있다. 세종대왕이 많은 일을 하였으니 그 밑에 신하들도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지 않았을까? 장영실과 더불어 이천과 김조, 그리고 천문학자인 이순실 등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야근이 빈번했을 것이다. 크고 작은 비리로 파직됐던 인사들이 다시 직첩(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받아서 일했을 정도라고 하니 신하들의 노동량이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장영실 동상, 아산 장영실과학관 />

<장영실 동상, 아산 장영실과학관>

장영실이 특별한 이유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 덕분이다.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관노(관아에 소속된 종)의 운명을 짊어지고 출발한 그의 인생은 대호군, 지금의 군대 계급으로 따지면 대장 다음인 중장 수준까지 승진한다. 장영실을 논할 때 대부분은 조선의 위대한 과학자, 천민이라는 신분을 극복하고 초고속 승진까지 한 인물, 여기에 세종대왕의 신뢰를 얻어 면천(천민의 신분을 면하고 평민이 됨)이 된 위인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그 출생지부터 별로 남아 있지 않아서 우리가 잘 안다고 자부할 수는 없다. 특히나 ‘안여(임금이 타는 가마) 사건’ 이후에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 추측을 낳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익숙한 장영실이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생각지 못했던 상상력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암울하기보다 매우 즐거운 경험이 될 것으로 자신한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간의대(천문 관측대) 곁을 떠나지 못했던 장영실, 그리고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세종대왕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조선만의 달력을 개발하다

설화에 따르면 장영실은 어렸을 적부터 손재주가 좋아서 관아에 속해 있는 여러 장비들을 곧잘 수리하곤 했다. 보잘것없던 장비들이 장영실의 손만 거치면 명품이 되니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고향인 동래현(지금의 부산)에서는 무자위를 직접 개발해 가뭄을 해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렸을 적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으니, 이를 지켜보던 현령(작은 고을의 지방 행정 단위 현의 최고 벼슬)이 장영실을 조정에 추천하게 된다. 태종 이방원이 재위할 당시에는 각 지방을 다스리는 관찰사가 인재를 추천하는 ‘도천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천민이라는 신분을 극복하고, 궁궐까지 들어간 장영실은 이후에 세종대왕이 될 충녕 대군의 눈에도 들어왔을 것이다. 노비 신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술력을 갖춘 장영실이 비범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421년(세종 3년), 드디어 장영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세종대왕은 장영실과 더불어 윤사웅, 최천구를 중국 명나라로 파견을 보내 천문 관측 기구의 도면을 그려 올 것을 명한다. 흠경각에 설치된 명나라의 물시계와 혼천의의 특징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에서 전해오는 달력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농번기 시기를 놓치는 등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의 하늘을 기준으로 제작된 달력이었으니 백성들이 농사를 제 때 지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영실은 꿈에 그리던 중국 유학길에 오른 지 2년 만에 귀국해 관노의 신분을 벗었다. 궁중의 의복과 금은보화를 관리하는 상의원으로 근무하면서 이듬해 1424년, 물시계인 경점지기를 제작한다. 그리고 8년 뒤인 1432년, 천문 관측 기구인 간의를 처음으로 완성하고, 더 발전시켜 혼천의(1433년)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간의, 아산 장영실과학관 />

<간의, 아산 장영실과학관>

<혼천의, 국립고궁박물관 />

<혼천의, 국립고궁박물관>

충남 아산시에 위치한 장영실과학관을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천민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노력한 덕분에 지금으로 따지면 청와대까지 입성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우리 미래의 꿈나무들이 관심을 가질 만하다. 1층 출입문부터 들어서면 장영실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는 영상이 바로 재생되고, 어린이들의 지식욕을 자극할 체험 기구들을 만날 수 있다. 열기구부터 시작해서 기찻길까지, 여기에 대기권과 지구 온난화 현상에 대해서도 알차게 설명되어 있다. 왜 그토록 세종대왕과 장영실이 천문 관측 기구를 제작하려고 했는지 선행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 밖에 장영실과학관에는 특별한 교육 방법이 있다. 북두칠성과 샛별, 견우성과 직녀성, 좀생이별과 초생달, 삼태성의 설화 내용을 동화 형식으로 제작해 동영상으로 재생하고 있다. 간의를 눈앞에 두고 감상하는 이 설화들은 아이들 교육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장영실표 스마트 시계

경복궁을 방문했다면 꼭 국립고궁박물관을 찾을 것을 추천한다.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경복궁 일대는 많은 직장인들의 산책 경로로 알려졌지만, ‘박물관’까지 관심을 가지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입장료도 무료라서 쉽게 지나칠 수 있다. 이곳 국립고궁박물관에는 1434년(세종 16년), 제작된 자동 물시계 자격루가 복원되어 있다. <세종실록>을 참고하였으며 높이 6미터로 현실감 있게 복원하였기 때문에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다.

1424년, 명나라로 파견된 장영실이 귀국하고 처음으로 제작한 경점지기는 기존 물시계보다 정밀한 장치였지만, 자동화 라인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세 개의 항아리에서 가장 아래 단계인 파이프 모양의 긴 통으로 물을 흘려 보내고, 물이 차오름과 동시에 통 안에 있는 부표도 같이 떠오르면서 시간을 알려주는 원리였다. 하지만 24시간 동안 사람이 지켜봐야 했기 때문에 오류가 많았다. 시간을 잘못 알린 사람은 의금부에 감금되는 일도 있었다.

자격루는 부전이라는 잣대가 떠오르면서 구슬을 하나씩 건드려 떨어뜨린다. 작은 구슬이 떨어지면서 정해진 경로로 이동해 큰 구슬을 건드려 다시 한 번 낙하를 시도한다. 이 사이에는 수저 모양이 구슬을 받아서 작동하는데 마지막에는 시보 인형이 북과 징, 종을 두드리면서 멋지게 마무리한다. 인형이 직접 악기를 만지는 방식도 놀랍지만, 12지신을 가리키는 인형도 등장하니 이만하면 장영실표 스마트 시계로 불릴 만하다.

<2007년에 복원된 자격루, 국립고궁박물관 />

<2007년에 복원된 자격루, 국립고궁박물관>

글로 읽거나 말로 설명을 듣는 것보다 직접 그림으로 보는 게 이해가 빠르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자격루의 원리를 완전히 습득할 수 있도록 대형 슬라이드 쇼를 준비하였으며, 작은 디스플레이를 통해서도 동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특별한 설명 없이 자격루의 작동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은 하루의 시간을 열 둘로 나누어 자시(23시~01시)에서 시작해 해시(21시~23시)로 끝난다. 매 시가 시작될 때마다 자격루의 종이 울렸다. 자격루는 밤에 역할을 못하는 해시계 때문에 제작된 것으로 밤 시간(술시부터 해시)을 다섯 등분하여 경이라 부르고 북으로, 1경을 다시 다섯 등분하여 점이라 부르고 징으로 알렸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자격루는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밤에만 울렸던 북과 징 소리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신시(15시~17시) 4경 1점이라고 한다면 신시를 알리는 종 소리와 함께 원숭이 모형을 들고 있는 시보 인형이 떠오르고, 4경을 알리는 북 소리 네 번, 1점을 알리는 징 소리가 한 번 울린다.

장영실의 대표 과학 기술로 꼽히는 자격루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 물시계다. 그는 자격루를 만든 공로가 인정되어 정4품 호군으로 승진했다.

소통과 공감, 대중성까지 잡다

1437년(세종 19년)에 장영실이 개발한 앙부일구는 최초의 해시계는 아니다. 신라시대의 해시계가 유물로 남아 있으며, 고구려나 백제에도 해시계를 관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조선의 해시계는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한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양반들만이 읽을 수 있었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가뭄도 문제지만, 농경사회인데도 불구하고 시간과 계절을 알 수가 없으니 농사를 짓는데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충 농사철을 짐작하다가 낭패를 보는 일도 많았겠지만, 시간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 약속 시간 하나 잡는 것도 굉장히 불편했을 것이다.

정치권도 그렇지만, 직장과 가정 내에서도 ‘소통’은 중요하다. 서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에세이와 인문학 책들 대부분도 ‘소통’을 전제로 하여 ‘공감’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조선이 농경사회인데도 불구하고 해시계가 양반들만의 소유였다는 건 그만큼 백성들과의 ‘소통’이 부족했고, 결론적으로 ‘공감’의 부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장영실이 제작한 앙부일구는 그런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세종대왕은 천평일구, 정남일구, 현주일구 등 다양한 해시계를 내놓았지만, 대중성 면에서는 앙부일구가 단연 최고였다. 마치 가마솥(부)이 하늘을 우러러(앙) 본다고 해서 해 그림자(일구)를 붙여 앙부일구로 불렸다. 그 모양부터 범상치 않아 보였으니 백성들에게도 큰 화제였을 것이다.

<앙부일구, 아산 장영실과학관 />

<앙부일구, 아산 장영실과학관>

앙부일구의 작동 원리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싶다면 아산 장영실과학관이 제격이다. 앙부일구 모형 앞에 설치된 디스플레이 화면에서 원하는 시간을 터치할 수 있고, 그 시간에 맞춰 앙부일구의 영침이 작동한다. 중심에 있는 영침의 그림자가 시간과 절기에 따라 이동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침은 그림자 위치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기 위해 항상 북극성을 바라보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7개의 세로선이 보이는데 묘시(06시)부터 유시(18시), 그러니까 태양이 뜨고 지는 낮 동안의 시간을 의미한다. 13개의 가로선은 우리가 흔히 아는 절기를 의미하는데 태양의 고도에 따라 높낮이가 변화되는 원리를 활용해 계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앙부일구 시간 읽기 체험, 국립고궁박물관 />

<앙부일구 시간 읽기 체험, 국립고궁박물관>

앙부일구를 좀 더 스마트하게 체험해 보고 싶다면, 국립고궁박물관을 추천한다. 이곳에는 1714년(숙종 39년) 즈음에 제작된 앙부일구와 더불어 1899년, 대한제국의 전통까지 이어받은 앙부일구까지 만날 수 있다. 시간 읽기 체험에서는 태블릿 PC 화면을 건드리듯이 유연하게 시간대를 조절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영침의 이동을 확인할 수 있다.

앙부일구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12지신을 상징하는 동물들을 그려 넣었다는 점이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한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소통’이자 ‘공감’의 힘인 것이다. 세종대왕은 천문기들을 궁중에 설치한 기존의 틀을 깨 버리고, 유동인구가 많았던 혜정교와 종로 남쪽 거리에 설치했다. 앙부일구를 최초의 해시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더 정확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 해시계로 불려야 한다.

직접 찾아가는 기상청

농경사회는 시간과 계절도 중요하지만 강우량을 파악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했다. 가뭄도 문제지만, 하천이 범람하는 홍수도 예방해야 했다. 당시 조선은 늘 중국이 중심에 서야 하는 사대주의에 빠져 농법마저 중국의 책에 의존하고 있었다. 날씨와 토양 등 조선의 기준과 맞지 않는 농법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혼란만 가중시켰다. 세종대왕도 가뭄과 홍수로 인해 늘 고심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가뭄으로 인해 임금이 스스로 반찬을 줄이기도 하였고, 범의 머리를 한강의 양진으로 던져 기우제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어쩌면 비과학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만큼 가뭄으로 인한 고통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종대왕은 1429년, 정초와 변효문 등을 통해 조선의 풍토에 맞는 <농사직설>을 편찬하였다. 시기상 장영실이 중국에서 귀국하고 경점지기를 개발한 이후이며, 간의와 혼천의를 제작한 이전이다. 이미 세종대왕은 농경사회를 지탱하는 백성들, 더 나아가 조선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과학 르네상스를 이끌기 위한 준비를 마쳤던 셈이다.

하지만 강우량을 알 수 없다면 모두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젖어있는 땅을 호미나 쟁기로 파서 확인하는 ‘우택’이라는 것이 있었다. 비가 온 뒤에 땅을 파서 그 깊이를 통해 빗물의 양을 알아본다는 것인데 얼핏 들어도 부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양의 종류가 지역마다 다른 것도 문제지만, 시기와 위치까지 고려하지 않는 아주 낡은 방식이었다.

1442년(세종 24년), 드디어 강우량을 확인할 수 있는 측우기가 문종의 기획으로 제작되었다. 장영실이 제작했다는 그 어떠한 기록도 없지만, 당시 과학 기술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제작에 도움을 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측우기는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우량계다. 놀라운 점은 빗물을 받아 양을 측정하는 현재의 방식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한양뿐만 아니라 전국 지방에 측우기를 설치하여 모든 백성들이 강우량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측우기는 과학적인 성취뿐만 아니라 백성들 곁에 조금 더 다가가는 애민정신의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국립기상박물관 />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국립기상박물관>

안타깝게도 세종대왕 시절에 제작된 측우기는 전란으로 인해 유실돼 남아 있지 않다. 1837년(헌종 3년)에 제작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가 국내에 남은 측우기 중 유일하다. 하지만 세종대왕 시절에 제작된 측우기의 규격을 따랐기 때문에 그 원리를 파악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높이와 지름이 각각 약 31.2cm와 14.5cm라는 건 그동안 수많은 수수구(빗물을 받는 입구)가 교체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입구가 너무 넓거나 좁아도 안 되고, 높낮이까지 고려했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국립기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자랑하는 최고의 보물이다. 서대문역 부근, 비교적 높은 언덕에 위치한 국립기상박물관은 인터넷을 통해 예약하면 측우기뿐만 아니라 한국의 기상 관련 역사까지 현장 해설과 함께 유익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국립고궁박물관 />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국립고궁박물관>

아마 많은 사람들은 측우기를 떠올릴 때 이를 지탱하는 측우대까지는 인지하지 못 할 것이다. 측우대는 크기도 다양했고, 화강암이나 대리암 등 석재 재료도 달랐기 때문에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관상감 측우대(1441년 세종23년 추정)는 궁궐 내에서 발견된 덕분인지 사이즈가 더 크고, 1782년(정조 6년)에 제작된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그 의의를 확인할 수 있는 명문을 볼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복사본과 함께하고 있다. 정조는 최초로 측우기를 제작한 세종대왕과 이를 따라 창덕궁, 경희궁 등에 측우기를 설치한 영조를 언급하며 두 성군의 애민정신에 감복했다.

아산에서 영원히 이름난 신하가 되다

이제 <세종실록> 이후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장영실의 모습을 상상할 차례가 됐다. 20여 년 동안 세종대왕 곁에서 과학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장영실은 1442년(세종 24년), 안여 사건으로 인해 곤장 80대를 맞은 이후에 그 어떠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장영실이 바로 사망했다거나, 당시 병환이 깊어진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버렸다는 등 여러 추측이 있었다. 같이 안여를 제작하는데 관여한 임효돈과 최효남도 처벌을 받았는데, 오로지 조순생만이 화를 피했다는 것도 수수께끼로 남았다. 조순생과 박강은 관리 책임자로서 불경죄에 해당될 수 있었으나 세종대왕은 유독 조순생은 처벌하지 않으려 했다. 신하들의 계속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조순생은 그저 박강과 다르다고 답변한 세종대왕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장영실 포토 존, 아산 장영실과학관 />

<장영실 포토 존, 아산 장영실과학관>

장영실의 드라마틱한 삶 덕분에 그의 마지막도 극적일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만일에 장영실이 바로 사망했다거나, <세종실록>에 적혀진 대로 관복까지 벗고, 처벌이 진행됐다면 그에 따른 후속 기록도 남아 있어야 마땅하다. 무려 20여 년 동안 최고의 과학 기술을 개발하고, 초고속 승진까지 한 인물, 여기에 세종대왕의 총애까지 받은 인물이니 당시에는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어느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어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조정 내에 그를 시기하는 신하들이 있었고, 중국 명나라조차 경계하였으니 세종대왕과 조순생의 협력 하에 장영실을 안전하게 보호했다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장영실의 고향은 지금의 부산인 동래현으로, 그 부근에는 장영실 과학동산뿐만 아니라 동래읍성 역사관까지 만날 수 있다.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 장영실의 과학 기술도 체험할 수 있다. 장영실의 유적지로서 역사 탐방의 중요한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장영실의 본관인 아산은 다른 의미로서 뜻깊은 곳이다. <세종실록> 이후로 장영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줄, “장영실은 아산의 명신(이름난 신하)이다.”라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이로써 장영실이 안여 사건 이후로 자신의 본관인 아산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장영실의 가묘와 추모비가 아산에 위치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장영실은 안여 사건 당시, 이제는 은퇴해서 노후 준비를 해야 할 정도로 초로에 접어든 상태였다. 늘 곁에 두면서 야근을 시켰던 세종대왕도 이제는 장영실을 자유롭게 놓아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산 장영실과학관 전경 />

<아산 장영실과학관 전경>

아산 장영실과학관은 그런 면에 있어서 즐거운 상상력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물, 바람, 금속, 빛, 우주로 나누어 장영실과 관련된 테마를 자연스럽게 이어주고 있다. 아이들의 교육 장소로도 훌륭하지만 성인들의 이해를 돕기에도 충분하다.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천민이 임금의 곁에서 과학 기술을 선도했다. 안여 사건으로 그의 마지막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후대 역시 높이 평가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장영실, 그는 아산에서 영원히 이름난 신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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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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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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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