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문장으로 조선을 울리다

조선의 위대한 스승, 퇴계 이황
조선의 위대한 스승, 퇴계 이황

강릉의 정기가 흐르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교산 허균은 ‘학산초담’을 통해 자신의 누이인 허난설헌이 강릉의 정기를 받았다고 전했다. 그와 함께 매월당 김시습의 본관도 강릉이며, 율곡 이이의 고향 역시 강릉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허균의 표현을 빌리자면 강릉은 산천의 정기가 있어서 이인(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의 애일당 뒷산을 호로 정할 정도로 고향인 강릉을 사랑했다. 그 뒷산이 교산으로 불렸던 이유는 늙은 교룡이 기어가는 듯한 모양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교룡은 때를 만나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한 이무기로, 바위 밑바닥에 숨어 있다가 1501년(연산군 7년)에 바위를 두 동강 내고 사라져 버렸다. 후세 사람들은 깨진 바위에 구멍이 뚫린 것이 문과 같다고 하여 ‘교문암’으로 호칭했다. 당시 차별 받던 서얼들의 애통함과 맞닿아 보였는지 허균은 자신의 호를 교산으로 정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애일당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애일당기’에 따르면 허균이 태어나고 자란 애일당은 작은 물줄기가 백병산에서 나와 수백 집을 사이에 놓고 흐르고 있었다. 이 작은 물줄기를 빙 둘러 수십 리에 달하는 거리에 이를 정도로 많은 주민들이 거주했다는 것이다. 애일당은 현재 민가 몇 채만 남아 있어서 허균이 직접 지은 ‘애일당기’를 통해 상상할 수밖에 없다.

<허균과 허난설헌 영정, 초당동 고택 /> <허균과 허난설헌 영정, 초당동 고택 />

<허균과 허난설헌 영정, 초당동 고택>

다행히도 지난 2007년, 강릉에서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를 기리는 기념공원을 개관했다. 비록 애일당과 거리는 있지만, 허난설헌의 생가 터로 알려진 초당동 고택과 허씨 일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기념관까지 건립되었다. 소나무와 밤나무, 살구나무 등 운치 있어 보이는 풍경과 함께하고 있어 강릉의 정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아버지 초당 허엽이 두부를 만들 때 사용했다는 우물 터가 말해주듯이 바로 근방에는 초당 순두부 마을도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강릉의 정기와 무관하게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비극과 마주해야 했다. 허균은 당대 최고의 학문가이자 개혁가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능지처참을 당하였으며, 최고의 여류 시인이었던 허난설헌 역시 성리학적 유교 질서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고 27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오히려 조선보다도 중국에서 먼저 그 능력을 높이 평가했으니 비운의 천재로 불릴 만하다.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먼저 허균과 허난설헌이라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태어날 수 있었던 그 계기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대문장가 집안의 탄생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을 들어서면, 허난설헌 동상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입구가 넓게 열려 있기 때문에 기념관과 함께 허난설헌의 생가 터부터 보이겠지만,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허난설헌 동상이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허씨 5문장 비석이 들어서 있다. 허균과 허난설헌 외에 아버지 허엽과 그의 첫째 아들 허성, 둘째 아들 허봉이 허씨 5문장으로 불리었다.

아버지 허엽은 자녀들에게 글공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길 정도로 개방적인 성향의 중신이었다. 1575년, 당쟁이 시작됐을 때 동인을 주도하였지만, 청렴결백한 성격 덕분에 당시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여러 요직을 겸하면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학문에도 대담히 도전하며 담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 그의 품행 덕분에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 역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다. 특히 허엽의 둘째 아들 허봉의 역할이 컸다. 허균에게는 스승이기도 했던 형, 허난설헌에게는 학문과 함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했던 소중한 오빠였다. 허봉의 절친한 친구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운 허난설헌은 무려 여덟 살에 처음으로 시를 지었다. 허균은 ‘학산초담’을 통해 “누이(허난설헌)의 시문은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표현했다.

<허씨 5문장 비석,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

<허씨 5문장 비석,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허균은 스스로를 ‘불여세합’, 즉 세상과 화합할 수 없다고 빗대었다.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세상과 화합할 수 없다고 믿었다. 당시 16세기 말 조선은 남존여비가 존재하던 시기로,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고착화 되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처참할 정도였다. 부덕(부녀자의 아름다운 덕행)이나 부공(집 안에서 부녀자가 길쌈이나 바느질 따위의 일)을 중시하는 역할에만 그쳤던 시절이었다. 비록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평생 국문 소설을 읽거나, 규방 가사를 짓는 정도였다.

하지만 허엽은 둘째 부인 강릉 김씨 사이에서 낳은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평등하게 가르쳤다. 남녀 구분하지 않고, 가르친 덕분에 허난설헌은 창의적인 여류 시인이 될 수 있었다.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으로부터 글공부를 배우기도 했다. 허엽의 개방적이고 평등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여느 양반 집안의 자녀들처럼 평범한 삶을 보냈을 것이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다

돌이켜보면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의 비극은 손곡 이달과의 만남부터 시작됐을 지도 모른다. 당시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도 때문에 서얼의 차별이 극심했다. 서얼은 ‘서자’와 ‘얼자’를 말하는데, ‘서자’는 어머니가 양민, ‘얼자’는 어머니가 천민인 아들을 뜻한다. 아버지가 양반이더라도 어머니가 양민이거나 천민이면 그 아들은 양반이 될 수 없어서 벼슬길에 오를 수가 없었다. 허균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적자(본처가 낳은 아들)’였지만 주변에는 서양갑과 심우영 등 서얼 출신들의 친구들이 있었다. 적서(적자와 서자) 차별을 눈앞에서 지켜본 허균은 조선 신분제도의 모순과, 소모적이기만 한 당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스승이었던 이달 역시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에 허난설헌과 함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허균은 <홍길동전>을 통해 적서 차별을 만들어낸 조선의 봉건사회를 비판했다. 양반 아버지와 노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벼슬길이 막힌 홍길동은 가출을 결심하고 의적 활동을 감행한다. 허균이 현실에서 느꼈던 서얼 출신답게 홍길동은 여느 인재 못지않게 유교 경전과 천문, 지리에 능통했고, 둔갑술까지 능해서 아버지의 첫 번째 첩 초낭이 보낸 자객들을 물리치기도 한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버린 초낭이 가족을 꼬드겨 자신을 죽이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홍길동은 이후에 활빈당을 조직해 지방 수령들의 재물을 탈취하고, 이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국에서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도적들이 생겨난 끝에 그들이 꿈꿨던 이상 사회 율도국이 발견되면서 마무리된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전경 />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전경>

<홍길동전>의 원본은 지금까지 확인할 수 없지만, 다행히도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안에서 <홍길동전>의 필사본을 볼 수 있다. 그 옆에는 1930년대에 연극배우들의 목소리로 제작된 <홍길동전> 음반과 1950년대에 출간된 만화책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뜻밖의 희귀품도 경험할 수 있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은 비교적 작은 규모지만, 허씨 5문장가에 대한 내용만큼은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먼저 입구에서부터 홍길동을 주제로 한 만화책과 그림들이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그 옆으로는 허씨 5문장가의 인상적인 시들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고, 허균이 말하는 허씨 5문장가의 짤막한 소개 글이 예쁘게 자리하고 있다.

<홍길동전 />의 필사본과 만화, 음반,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홍길동전>의 필사본과 만화, 음반,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홍길동이 마지막으로 향한 율도국은 신분 차별이 없는 이상적인 세상이다.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만을 중시하는 나라, 적자 차별 없이 인재를 알아볼 줄 아는 나라다. 허균이 홍길동이라는 서얼 출신의 의적을 통해 표출했던 율도국은 유교 질서에 고립된 중신들에게는 불편한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이었는지 <광해군 일기>에 따르면 허균을 천지간의 괴물로 묘사해 놓았다. 그의 일생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춰져 있다는 내용은 가히 치가 떨릴 정도다. 광해군 시해의 역모 배후로 지목됐던 허균은 지금의 삼심제라고 할 수 있는 삼복계도 무시한 채 일사천리로 사형에 처해졌다. 그가 죽은 이후에도 관련자들이 유배를 가거나 고문을 당하며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허균이 역모 배후로 지목된 이 사건은 많은 백성들의 항의가 잇따랐다. 처참하게 찢겨진 몸은 그를 지지하고 아끼던 백성들의 손에 건너갔고, 하염없는 눈물로 돌아왔다.

조선이 허락하지 않은 여인

기념관 안에는 허씨 일가의 일상을 담은 모형들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그 중에 상복을 입은 세 남성이 책을 태우는 모형이 눈에 들어온다. 누이 허난설헌의 유언에 따라 그녀의 시집을 모두 불태우는 허균의 모습을 본뜬 모형이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허초희로, 난초와 추운 겨울을 연상케 하는 설을 호로 정해서 그 의미부터 기구해 보인다. 허난설헌은 아버지 허엽의 개방적인 성향 덕분에 자연스럽게 학문에 통달할 수 있었고, 여덟 살에 첫 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다. 광한전(달나라에 있는 궁전)에 초대를 받아 그 신선 세계에 있는 백옥루(시인이나 화가가 죽으면 올라간다는 하늘의 높은 누각)를 보고 상량문(집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 까닭과 공역한 날짜, 시간 등을 적는 글)을 짓는 내용이다. 상량문은 축복을 기리는 내용이기도 했기 때문에 당대 명문가에게 부탁할 만큼 중요했다. 스승이었던 오빠 허봉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 여덟 살의 허초희가 이런 내용의 시를 지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덕분에 빼어난 미모와 재능을 겸비했다는 뜻으로 ‘초희’라는 이름이 일찍이 생겼고, 성인이 되면 부르는 이름 ‘자’로 ‘경번’이 생겼다. 당시 이름조차 없었던 여성들이 많았던 조선을 생각해 보면 아버지 허엽이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켰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허난설헌의 유언에 따라 시집을 태우는 허균 모형,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

<허난설헌의 유언에 따라 시집을 태우는 허균 모형,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은 <난설헌집>의 유일한 산문이기도 하다. 평소 신선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는 허난설헌은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도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이상향까지 추구했다. 허난설헌이 한문으로 지었다는 이 시는 한 글자 한 글자의 의미를 곱씹고 되새기는 일을 되풀이할 정도로 빼어나다. 한글 번역본으로 읽어봐도 대충 넘어가는 문장이 없을 정도다. 한문을 제법 통달한 다음에 원본을 천천히 읽으면서 의미를 파악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광한전백옥루상량문,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

<광한전백옥루상량문,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허난설헌은 15세에 안동 김씨 집안이었던 김성립과 결혼하면서 불행이 시작됐다. 성리학적 유교 질서를 강조하던 남인계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허씨 집안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다. 게다가 김성립은 과거 급제에 계속 실패하면서 학문과는 담을 쌓고 살기 시작했고, 허난설헌을 시기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고향인 강릉을 떠나 시집살이라는 낯선 세계와 맞닥뜨려야만 했던 허난설헌의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버지 허엽의 객사 이후에 두 아이를 병으로 떠나 보내야 했고, 소중한 오빠 허봉도 세상을 떠났다. 중국의 시집을 꾸준히 건네줄 정도로 각별히 아껴주었던 오빠의 죽음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 26세였던 허난설헌은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서릿달이 차갑다.”라는 시적 표현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허균에 의해 다시 태어난 허난설헌

허균은 누이의 유언에 따라 시집을 모두 불태웠다. 하지만 허난설헌의 훌륭한 시들은 허균의 머릿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친정에 보관되어 있던 시와 평소 외우고 있던 시의 내용들을 모아서 직접 시집을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임진왜란을 겪던 조선에는 명나라의 사신들이 자주 찾았는데 오명제가 허난설헌의 시 200편을 포함해 조선의 시집을 수집해 갔다. 덕분에 명나라가 만든 ‘조선시선’에는 최치원, 김시습과 더불어 허난설헌의 시집도 포함될 수 있었다. 이후에 큰 인기를 얻자 명나라의 사신들은 허난설헌의 시집을 구하기 위해 허균을 찾았다.


<난설헌집,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

<난설헌집,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그렇게 중국에서 먼저 간행된 <난설헌집>에는 명나라 사신들의 소개 글이 적혀 있었다. 특히, 주지번의 소인(책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는 짧은 머리말)이 인상적이다. 그는 “천지와 산천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뭉쳐졌다.”면서 “당대의 시인에 귀속할 정도”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이 시문집을 보게 되면, 내 말이 그릇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또 다른 명나라 사신 양유년의 제사(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 따위를 적은 글)에 따르면 “슬프나 마음에 상처 받지 않고, 즐겁지만 음란치 않은 소리로 옛 시가 다시 빛을 발하는 듯하다”며 더불어 허씨 가문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허난설헌 동상, 허균・허난설헌 기념 공원 />

<허난설헌 동상, 허균·허난설헌 기념 공원>

특별히 명나라 사신의 평가가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허난설헌의 시가 조선에서는 환영 받지 못 했기 때문이다. 허난설헌은 다양한 주제로 시를 지었는데, 조선의 봉건사회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녀는 당시 조선시대의 서얼금고법과 억압 받고 차별 받는 여성들이 같다고 느꼈다. 노동을 하는 여성들의 삶까지 시로 읊은 허난설헌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동생 허균을 통해 중국 땅과 더불어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으로 보자면 최초의 한류 스타가 된 셈이다.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

시대를 앞서간 허균과 허난설헌은 불우의 천재로 불린다. 조선시대의 병폐를 지적하며 새로운 사회를 꿈꿨지만, 견딜 수 없는 불행만이 찾아왔다. 과연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공원에도 아픈 기억과 흔적만이 남아 있다. 허난설헌 동상 앞에 쓰여진 시 ‘아들딸 여의고서’ 역시 두 아이를 잃은 슬픔을 표현한 내용이다.

허균은 몹쓸 죄인이 되어 버렸으니 그 시신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에 허씨 가족 묘가 있는데, 지도에도 표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해 있다. 허균의 시신은 수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양지 바른 곳에 가묘가 자리하고 있다. 경악스러운 점은 허엽의 묘비에 커다란 금이 가 있다는 것이다. 허균이 역적이 되었으니 그의 죽은 가족들에게도 화가 미쳤던 탓일까? 묘비에 쓰여진 일부 글씨는 닳아서 잘 보이지 않았고, 허난설헌 시비 역시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초라해 보여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애일당 근방에 있는 허균의 시비도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였을까? 허난설헌이 고된 시집살이를 하고 있을 때도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건 오로지 시였다. 그래서 허난설헌이 남긴 시 중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초당동 고택 전경 />

<초당동 고택 전경>

난설헌집 칠언절구 형식 중에 ‘추천사’가 눈에 들어왔다. ‘추천’은 지금 말로 ‘그네’를 뜻하는데, 음력 5월 단오 날에 친구들과 그네뛰기를 하는 상상을 하며 읊은 노래다. 허난설헌은 “띠를 매고 수건 쓰니 반은 신선”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지금의 초당동 고택에서 보낸 유년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게 아닐까? 돌이켜보면 오빠 허봉에게 학문을 배우고, 손곡 이달을 통해 신분제도의 모순을 깨달았던 그 시절, 그리고 동생 허균에게 글공부를 가르쳤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허균 역시 누이와 함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글공부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는지, 고향 강릉을 자주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학자 안정복이나 문신 소설가였던 김만중, 그리고 서애 유성룡과 연암 박지원 등 조선에서도 허균과 허난설헌을 향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끝내 조선에서 환영 받지 못하였고, 머나먼 중국 땅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했다. 조선은 그들을 증오했지만, 결국 명나라를 통해 그 빼어난 문장이 역으로 알려진 셈이다.

불우의 천재, 시대를 앞서간 문장가 등 허균과 허난설헌을 수식하는 단어들은 많다. 그 중에 <조선시선>에 가슴에 남는 후서가 하나 있다. 바로 ‘해동을 울린다.’라는 표현이다. ‘해동’은 발해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명나라에서 봤을 때 ‘조선’을 말한다. 인정받지 못한 허균과 허난설헌. 그들은 결국 문장으로 조선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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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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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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