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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읽거느 새단장 기념 이벤트 2016.01-18~02.29광화문 읽거느 새단장 기념 이벤트 2016.01-18~02.29

역사탐방 길라잡이

조선의 위대한 스승, 퇴계 이황

 
조선의 위대한 스승, 퇴계 이황
조선의 위대한 스승, 퇴계 이황

퇴계 이황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길

서울 용산구 소월로 주변을 거닐다 보면 교육의 대학자로 알려진 퇴계 이황 선생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마침 내리던 빗방울 덕분에 근방에 있는 남산도서관에서 그와 관련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23세의 청년 율곡 이이가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았을 당시에도 빗물이 내렸다. 비유할 수는 없지만, 율곡 이이가 이틀을 더 머물면서 가르침을 받았던 것처럼 남산도서관에서 알게 된 이황의 가르침은 큰 울림을 주었다.

<퇴계 이황 선생 동상, 남산도서관 />

<퇴계 이황 선생 동상, 남산도서관>

당시 율곡 이이가 전해준 시를 통해서 퇴계 이황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율곡 이이가 바라본 퇴계 이황의 모습은 공자와 맹자의 학문에 통달했으며, 두어 칸에 불과한 집에서 경전 천 권을 쌓아놓고 살았다. 코를 찌르는 책 종이와 먹물 냄새 덕분이었을까? 율곡 이이는 시를 통해서 “가슴속은 비 온 뒤에 갠 달 같이 환하다. 담소하면 요동 치는 물결을 그치게 한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퇴계 이황은 위대한 교육 대학자로 알려졌지만, 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림파들이 화를 당한 ‘사화’나 연산군의 폐위로 이어졌던 ‘중종반정’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고요히 교육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선조는 뚜렷한 업적이 없다는 이유로 시호(제왕이나 재상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율곡 이이의 간청으로 영의정으로 추증(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했다.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검약하게만 살았던 퇴계 이황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선비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알아 보기 위해 퇴계 이황의 고향인 안동을 먼저 찾을 필요가 있었다.

자연을 사랑한 대학자의 숨결을 느끼다

이황은 스스로 지은 이름 퇴계처럼 물러남을 중시하며 수많은 관직을 고사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단양과 풍기 군수로 부임하고,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임하며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으나 결국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그 후학들이 사당을 따로 건립하며 조성된 것이다. 서원은 조선 시대 지방의 사설 교육 기관으로 지금으로 따지면 사립 학교로 통한다.

<도산 서당 /> <도산 서당 />

<도산 서당>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경북 영주의 풍기 군수로 부임하기 전에 세워진 백운동 서원이 계기가 되었다. 전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성리학을 전파한 고려의 학자 ‘안향’을 기리는 사당을 지은 것인데, 교육 장소가 되면서 백운동 서원이라고 하였다. 당시 이황 군수는 백운동 서원을 보고 크게 감탄하여 임금으로부터 액자를 하사받았다. 이황의 간청으로 서적과 토지 등을 지원받은 백운동 서원은 이후에 소수(무너진 학문을 일으켜 세운다) 서원이 되었다. 아마 이황은 이때부터 고향인 안동에 내려와 교육 기관을 세울 것을 결심했을 것이다.

도산서당으로 가는 길은 특별했다. 산을 등지고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절경을 맞이하고 있었다. 퇴계 이황은 교육과 함께 자연도 지극히 사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퇴계 이황이 직접 지은 도산서당의 담장은 예상외로 낮은데 마루에 편안히 앉아 정면을 바라봤을 때 대각선에 있어야 할 코너의 담장은 아예 없는 상태였다. 좌측 벽도 훤히 뚫려 있어서 시각적으로 봤을 때 탁 트인 느낌이다. 도산서당은 부엌, 방, 마루로 딱 3칸뿐이지만 이러한 개방성 덕분에 자연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도산서당 앞마당에 위치한 연못, 정우당 />

<도산서당 앞마당에 위치한 연못, 정우당>

퇴계 이황은 연못과 샘을 만들어서 각각 이름을 짓기도 했다. 앞마당에 있는 연못 ‘정우당’은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결코 더럽히지 않는 군자의 고고한 삶을 의미하며, 서당 근처에 있는 작은 샘인 ‘몽천’은 몽매한(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제자를 바른길로 이끌어 가는 스승의 도리를 의미한다. 샘물이 수많은 역경을 거쳐서 바다에 이르듯이 제자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퇴계 이황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도산서당에서 멀지 않은 청량산을 자주 거닐던 이황은 입구 시비에 ‘독서여유산’을 새겨 놓았다. ‘독서는 산을 노니는 것과 같다.’라는 뜻으로 자연 그 자체를 서당과 동일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하였을 때는 ‘미천장담’이라는 시를 통해 자연을 향한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시내와 산이 자신의 늙은 모습을 못 알아볼 것 같다는 표현은 퇴계 이황의 순수한 감수성마저 느끼게 해 준다. 어쩌면 자연을 등지고 살았던 벼슬길이 못내 원망스러웠던 건 아닐까?

지도에도 없는, 작고 고즈넉한 서당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는 정도전과 정몽주를 필두로 각각 혁명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혁명파는 훗날 훈구파로 불리었으며, 온건파의 후신인 사림파를 탄압하는 ‘사화’가 발생했다. 사림파에 속해 있던 퇴계 이황은 중종반정까지 지켜보며 민심을 다잡는데 필요한 건 결국 교육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 때문인지 경상도 풍기 군수로 있을 때 무작정 고향으로 내려온 일이 있었다. 몸이 아프다는 연유로 사직하려고 했으나 조정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도산으로 몸을 옮긴 것이다. 이황은 도산에 한서암이라는 집을 짓고는 암자 주변에 피운 봄꽃을 보면서 주경야독의 삶을 살기로 하다가 이듬해에 후학 양성을 위해 계상서당을 지었다. 시기상 단양 군수로 있을 적에 백운동 서원에 감탄했던 이후였기 때문에 도산서당 이전에 지어진 또 하나의 문화재인 셈이다.

<계상서당 전경 />

<계상서당 전경>

계상서당은 도산서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이 고즈넉한 서당은 퇴계의 종택 맞은편 개울가의 돌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다. 마치 도산서당의 방 한 칸을 떼어 놓은 것처럼 담소해 보여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작은 서당에서 강학(학문을 닦고 연구함)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계상서당이 도산서당의 초기 모델로 보일 즈음에 남산도서관에서 읽었던 이황의 남다른 철학이 떠올랐다. 견리사의, 즉 눈앞의 이익을 보면 의리를 먼저 생각한다는 뜻으로 당시 선비들도 즐겨 쓰던 말이었다. 이황은 조카사위 민시원이 급전이 필요하다며 이자까지 쳐서 갚겠다고 했으나 오히려 의리를 중시하며 역정을 냈다고 한다. 평소 검약한 생활을 했던 이황의 소박함은 식사 습관에도 드러난다. 1일 2식과 1식 3찬을 원칙으로 한 것인데 식불염정(음식을 가리지 말라)과 불다식(배불리 먹지 말라), 그리고 식불어(식사 중에 말하지 말라)의 원칙을 철저히 따랐다. 이처럼 선비의 품격을 보여준 이황은 계상서당서부터 교육의 산물을 이룩하려 했던 건 아닐까? 많은 선비들이 퇴계 이황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던 건 자신을 최고로 자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만한 벼슬아치와는 달리 자신을 낮추었고, 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어할 만큼 겸손한 선배였다.

율곡 이이의 ‘퇴계 선생 유사’에 따르면 이황은 도량과 성품이 따뜻하고 순수하기가 옥과 같았다. 이이의 눈에는 잘난 척하지 않는 이황이 오히려 평범해 보였지만, 벼슬을 마다하는 와중에도 전혀 어긋남이 없어 사후에는 큰 귀감이 되었다. 23세의 율곡 이이가 계상서당을 찾아서 이틀 동안 도학을 논할 당시에 퇴계 이황은 시를 통해 이렇게 화답했다.

“그대가 찾아와 내 마음이 상쾌하다. 이름난 선비에게 헛된 명성 없음을 비로소 알았고, 지난날 공경한 몸가짐 부족한 것이 못내 부끄럽구나.”

퇴계 이황을 향한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

퇴계 이황은 선비들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존경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7남매 중 6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던 이황은 어머니 춘천 박씨의 따뜻한 관심 속에서 자랐다. 공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꿈을 꿨던 박씨는 태몽을 직감하고, 밤낮없이 누에를 치고 농사짓는 일에 매달리며 어린 이황을 뒷바라지했다. 이황의 아버지 이식은 과거시험에 합격했으나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 버렸다. 당시에는 가혹한 부역과 세금을 견디지 못해 유랑민이 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박씨는 가장으로서 꿋꿋이 버텨내며 가난을 이겨내고 있었다. 놀라운 점은 박씨가 여느 선비 못지않게 학식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것이다. 남편과 아들들의 공부하는 소리를 곁에서 들은 덕분에 이황에게 사람의 됨됨이뿐만 아니라 학문에 대해서도 충실히 가르칠 수 있었다.

남편 없이 가문을 일으켜 세웠던 어머니의 영향 덕분이었을까? 여성을 향한 이황의 태도는 여느 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황의 며느리 봉화 금씨는 시아버지 묘소 가까이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금씨 가문의 야박한 태도에도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했던 시아버지가 못내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며느리가 아파 누우면 직접 사물탕을 사서 보내기도 하였고, 아들을 나무라면서까지 건강을 챙길 정도였으니 죽어서까지 시아버지를 모시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둘째 부인을 향한 사랑도 남달랐다. 제사 준비 때 과일을 훔치거나 집어 먹어도 조상님들도 귀엽게 봐주실 것이라며 탓하지 않았고, 구멍이 난 흰 도포 위에 빨간 헝겊으로 기워도 오히려 자랑스럽게 입고 다닐 정도였다.

<정문 앞에서 바라본 노송정 종택과 퇴계 이황이 태어난 태실 내부 모습 /> <정문 앞에서 바라본 노송정 종택과 퇴계 이황이 태어난 태실 내부 모습 />

<정문 앞에서 바라본 노송정 종택과 퇴계 이황이 태어난 태실 내부 모습>

노송정 종택은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으로 퇴계태실이라고도 부른다. 유의할 점은 이황의 자손들이 살고 있는 퇴계 종택과 헷갈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노송정 종택은 본래 이황의 할아버지 이계향이 지은 집이었는데, 폐위된 단종을 향한 충정으로 소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노송정은 ‘늘 푸른 소나무’라는 의미로 이계향이 직접 호로 삼았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가자 이계양은 국망봉에 제단을 쌓고, 모든 벼슬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계양은 세한송백(추운 시절의 소나무와 잣나무), 즉 어지러운 시대에도 변치 않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강조하며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를 곁에서 지켜본 부인 영양 김씨의 가르침 역시 이황의 어머니와 못지않았을 것이다.

노송정 종택의 정문 앞에 서면 ‘성림문’이라는 현판이 먼저 보인다. 꿈에 공자가 들어선 문이라는 뜻이다. 그 뒤로 노송정의 현판이 겹치듯 보이는데 본채는 노송정의 좌측에 있다. 안채에 들어서면 큰 마루를 두고 상방과 안방이 보이는데, 도산서당처럼 한결같이 고즈넉하기만 하다. 이황이 태어난 태실 내부는 한없이 고요해 보였다. 마침 하늘에 떠 있는 해가 구름 사이로 숨어들면서 어스레해지자 문창에 새겨진 나뭇잎 모양이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황 역시 이 영롱한 빛처럼 세상을 향해 희망을 비치고 있었다.

사람의 학문을 완성하다

퇴계 이황의 학문을 좀 더 깊게 알아보기 위해서 도산서원길을 따라 퇴계로로 향한다. 유교문화박물관에는 이황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인 성학십도의 목판을 볼 수 있다. 당시 왕위에 오른 선조의 나이는 17세. 그리고 이 어린 왕좌를 위해 상소문을 저술했던 이황의 나이는 68세였다. 사실상 한평생 인생을 바쳤던 그의 학문이 완성된 시기였다.

선조가 성군이 되길 원하면서 저술된 성학십도는 성학의 뜻을 집약하여 10개의 그림으로 완성됐다. 이황은 이 상소문에서도 학문을 중시하면서 ‘배움’과 ‘생각’을 강조했다. 자신이 몸소 실천했던 공경과 예를 재차 강조할 때는 우국충정과 절개마저 느껴진다. 이황이 생각하는 공부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성학십도의 서문을 살펴보면 “반드시 몸가짐을 삼가고 엄숙하고 고요하고 하나에 집중하는 때에 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성학십도 (출처: 유교문화박물관) />

<성학십도 (출처: 유교문화박물관)>

이황이 강조한 공경과 예는 도산서당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황이 1천여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공부하던 방의 이름은 ‘완락재’로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희의 ‘명당실기’에서 취했다. 주희가 머물던 당을 사이로 공경을 뜻하는 ‘경재’와 의를 뜻하는 ‘의재’라는 방이 있었다고 하니, 완락재 역시 공경과 의를 중시하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다. 퇴계집에는 “경을 주로 하되 의를 쌓는 공부를 해야 하니”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경을 주로 하고 의를 쌓는 공부를 하면 만물의 근원이 되는 태극과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황은 “즐기며 완성하여 죽을 때까지 싫증나지 않을 것”이라는 주희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여 완락재라는 방을 만들고, 평생 유학의 의미를 음미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솔선수범을 보여준 이황의 학문은 성학십도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퇴계 이황의 친필 현판, 유교문화박물관 />

<퇴계 이황의 친필 현판, 유교문화박물관>

유교문화박물관에서 뜻깊은 보물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이황이 직접 쓴 도산서당의 현판 원본이 전시된 것이다. 비록 온습도가 조절되고 있는 실내에 보관되어 있어서 가까이서 볼 수는 없었지만, 실제로 그 원본을 보고 있자니 예서체만의 그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 획마다 보이는 물결 모양, 그리고 상형 형식의 ‘산’이 눈길을 끈다. 바로 옆에 보이는 ‘농운정사’는 유생들의 숙소로 도산서당이 지어진 다음 해에 완성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황은 현시대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센스와 위트가 풍부했던 게 분명하다. 서민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예서체의 글을 쓴 것에 더 나아가 ‘산’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유머 감각도 있었을 것이다.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둘째 부인이 제사상에서 과일을 집어먹었던 때를 다시 돌이켜봐도 이황은 많은 제자들과 여성들에게 큰 웃음을 줬을 것이다. 구멍이 난 흰 도포 위에 빨간 헝겊은 또 어떤가? 이황이 오히려 당당히 입고 돌아다닌 덕분에 동네 선비들이 비슷한 옷으로 바꿔 입었다는 일화가 있다. 퇴계 이황이 그토록 존경받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이지 않을까?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

퇴계 이황의 제자들 중에는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학봉 김성일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큼 유명한 인물들이 많다. 특히 임진왜란을 극복했던 유성룡을 배향하는(학덕이 있는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 등에 모시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과 함께 꼭 둘러봐야 할 문화재다. 이황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 중 한 사람을 꼽자면 대부분의 학자들도 유성룡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황의 가르침 속에서 눈에 띄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소수서원 근처에 살았던 배순이었다. 그는 당시 천민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장장이지만,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온순하고 근실했다는 배순은 풍기 군수 한 명이 소수서원에서 도를 가르친다는 소식에 다짜고짜 찾아가 경청하기 시작했다. 당시 풍기 군수는 백운동서원에 반해서 후생 양성을 결심했던 이황이었다. 배순은 매일 이황에게 인사를 드리고는 소수서원 강학당의 뜰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강론을 들었다. 이황은 성실히 공부하려는 배순의 진심을 이해하고, 다른 유생들과 함께 배울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소수서원 강학당 전경과 그 내부 모습 /> <소수서원 강학당 전경과 그 내부 모습 />

<소수서원 강학당 전경과 그 내부 모습>

배순은 이황이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가자 철 조각을 모아 퇴계의 철상을 빚어내 아침저녁으로 참배했고, 세상을 떴을 때는 3년간 매일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비록 천민이었지만, 이황의 가르침에 따라 유학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했다. 임금 선조가 붕어(임금이 세상을 떠남)하자 국망봉에 올라 곡을 하였고, 이황처럼 나물만 먹으면서 경을 주로 하고 의를 쌓는 공부를 하였다.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공자의 말씀에 따라 평등한 교육을 강조했던 이황 덕분인지 무려 여든 살까지 살았다.

배순이 세상을 뜨자 그가 살았던 마을은 그의 성씨인 배를 따서 배점으로 불리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에 위치한 배순정려비는 손자 배중이 세웠다가 외손인 임만유가 ‘충신백성’을 새기면서 지금의 정려비가 되었다.

<배순정려비 />

<배순정려비>

도산급문제현록(퇴계의 제자들을 기록한 인명부)에도 배순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배순이 특별한 이유는 간단하다. 유교무류, 즉 옛 선인들은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고 강조한 이황의 신념과 잘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대장장이는 미천한 신분으로 제자가 될 수 없었던 시대였지만, 이황에게는 달랐다. 물러남을 알고, 후배들을 향해 한없이 겸손하기만 했던 퇴계 이황의 인품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황은 숨을 거둘 당시에도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기를 원했고, 예장(조정에서 치러 주는 장례)도 원하지 않았다. 큼지막한 비문도 거부하고, 최소한으로 새겨 넣으라고 당부했다. 그만큼 자신의 명성이 장황하게 알려지는 게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이황의 명성을 잊지 않고 있다. 사단칠정(성리학의 철학적 개념) 논쟁을 벌였던 고봉 기대승의 추모 글을 통해 이황이 왜 최고의 선비였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본다.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 산도 허물어져 낮아지고 돌도 삭아 부스러지겠지만 선생의 명성은 하늘과 땅과 더불어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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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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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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