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의 천재로 불리기까지의 여정
단양군에 위치한 여덟 가지의 명승지 ‘단양팔경’ 중에 하나인 ‘도담삼봉’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의 시선이 있다. 남한강 한가운데 솟아난 세 개의 봉우리는 장군봉(남편봉)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첩봉(딸봉)과 오른쪽에는 처봉(아들봉)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두고 우리 선조들은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둔 남편과 이를 못마땅히 여기는 본처의 모습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로 떠내려왔다는 설화다. 삼봉산이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으니 애초에 정선군의 것이라는 논리인데, 세금은 단양에서 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린 소년이 등장해서는 “오히려 물길을 막아 아무 소용이 없으니 필요하면 도로 가져가라.”고 주장하면서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소년은 훗날 도담삼봉을 거닐며 봉우리에 정자를 짓고 시를 읊었다. 경북 영주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이곳을 동경하여 호를 삼봉으로 정하였으며, 외가였던 충청도 단양이 출생지라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린 소년을 최고의 정치가, 사상가라고 부른다. 그는 고려 말 격동기 속에서도 정치, 경제, 제도, 법률, 병법 등을 연구하며 조선을 개국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1865년(고종 2년) 이전까지 그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받았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경우 그의 시를 좋아했다는 것만으로 역모의 증거가 되기도 했다. 삼봉 정도전, 그는 오랜 기간 역적이었다.
혁명가의 길을 찾아서, 삼봉기념관
“도량이 좁기 때문에 남을 시기하고 겁이 많았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해치려 하고, 감정을 품은 자에게는 임금에게 일러 꼭 보복하려 들었다. 하지만 임금은 듣지 않았다.” <태조실록>에 적힌 정도전의 인물 평가다. 정도전은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에서 죽음을 당한 이후부터 줄곧 역적으로 불렸다. 그의 죄목은 ‘반란 예비 음모 죄’였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정도전은 어린 세자를 뒤에서 조종하더니 결국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세자 이방석과 이성계의 사위 이제, 도진무사(도성 수비대) 박위, 좌부승지(원수를 보좌하는 참모장) 노석주, 우부승지(청와대 비서관 격) 변중량과 함께 거사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습을 감행한 쪽은 오히려 이방원 측이었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머물고 있던 집 부근에 불을 지른 건 이방원의 측근인 이숙번이었으며, 정도전이 칼을 손에 쥔 채 문 밖으로 나왔지만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태조실록>에 적힌 대로라면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는 정도전과 그 무리들이 호위병 대동도 없이 척결 당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조실록>에서는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하찮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만, 오히려 이방원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말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도전은 30대에 나주로 유배를 갔을 당시에 정침이라는 선비가 왜구에게 저항하다 죽은 사연을 듣고 크게 감탄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배지에 남긴 글에 따르면 선비는 자고로 의가 있어야 하며 오히려 죽음으로써 명예와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정도전의 신념은 확고했다.
삼봉 정도전의 흔적을 찾는 그 첫 번째 출발은 ‘삼봉기념관’이다. 태종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한 탓에 그가 함께 했던 역사적인 순간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후손들의 노력 덕분에 문집 <삼봉집>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권오창 화백이 제작한 정도전 영정이 먼저 반갑게 맞아주고, 그 뒤로 저서와 시문, 친필 액자, 친필 서간문 등 120여 점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 삼봉집 목판은 전자 디스플레이를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정도전이 남긴 시부터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철학 사상, 요동 정벌에 응용할 목적으로 만든 병서, 고려 역대 왕의 치적을 실은 경제문감별집, 법전을 기록한 조선경국전 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삼봉집>에 수록된 ‘자조’라는 시에서 정도전이 죽음을 직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쉬지 않고 달려온 자신에 대해 “한 잔 술 나누는 사이에 다 허사가 됐다.”면서 스스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는 과연 죽음을 두려워했을까? <태조실록>에 적힌 것처럼 막역지우로 지냈던 정몽주까지 운운하면서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했을까? 그가 남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삼십 년 동안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이뤄낸 공업이 모두 물거품이 되자 자조 섞인 시를 지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민본을 내세우며 역성혁명의 꿈을 키우던 정도전이었다.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그가 설계했던 수도 한양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소서, 한양 천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새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계룡산 지역으로 천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도성 공사가 한창이던 1393년, 하륜을 비롯한 풍수지리론자들이 각종 이유를 들어 지금의 서울 신촌과 연희동 일대인 무악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정도전의 입장에서는 그저 막연하게만 들렸다. 무악이 국토의 중앙에 있으며 뱃길이 통하기는 하지만 궁전과 관청, 시장, 사직 등을 건설할 충분한 공간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여러 풍수 책의 설명에도 들어맞는다는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정도전에게는 사람들이 살기에 충분한 공간과 교통의 편의 문제만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무엇보다 권문세족으로부터 고통을 받았던 고려 말의 백성들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주로 유배를 갔을 당시에도 백성들의 피폐해진 삶을 직접 목격했던 정도전에게 풍수지리설은 오히려 비과학적이고 합리적이지도 못했다. 이제 막 조선을 개국하고 혁명의 기지개를 켜는 와중에 백성들의 고초를 부추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계룡산과 무악 사이에서 갈등을 하던 이성계에게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바라건대 우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참작할 것이며, 점을 치더라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다음에 쳐야 합니다.” 정도전의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상은 오직 풍수의 길흉만을 따지던 당시 분위기를 일시에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새 도읍을 하루빨리 정하려고 했던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조언과 지지를 받으며 결국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한다. 한양은 국토의 중앙에 있으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이점이 있었다.
정도전은 한양에 지을 궁성 터와 종묘, 사직, 궁궐, 도로 등을 알아보고 직접 설계도를 만들었다. 오늘날 서울의 태평로와 종로가 마련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많은 역사학자들과 건축학 연구자들은 서울의 4대문인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 남대문(숭례문), 북대문(숙정문)을 비롯한 한양도성에 관심을 기울이겠지만, 정도전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피맛골’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성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다니는 길이라는 뜻인 ‘피마’에서 유래했다. 생계가 바쁜 우리 백성들이 고관들이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조아리고 엎드려 예를 갖추어야 했다니, 지금 상상해도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관이 보일 때마다 백성들이 피해 들어갔던 피맛골은 장국밥집, 목로술집, 모줏집 등이 형성되면서 서민 전용 도로가 되었다. 때마침 ‘서울형 골목길 재생 사업’ 대상지로 선정된 피맛골을 들여다보자. 종각역 1번 출구 근방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피맛골’은 이제 동서양을 아우르는 음식점들이 차지하고 있다. 종로구에서는 세종로 사거리부터 동대문 방향까지 ‘피맛골’의 위치를 안내해 주고 있다. ‘피맛골’ 안내판을 지그시 바라보고 좁은 골목길을 하나씩 방문해 보았다. 고관들의 시선을 피해 뛰어 놀았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지면서도 미소를 머금고 지켜봤을 정도전의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흐뭇해진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민본사상
정도전이 그토록 민본을 내세웠던 계기는 나주로 유배를 갔을 때였다. <삼봉집>에 수록되어 있는 ‘답전부’에 따르면 정도전은 유배를 갔던 시기에 늙은 농사꾼을 만나 세 가지 질문을 듣게 된다. 정도전의 차림새를 유심히 살펴본 농사꾼은 권력가에게 아첨을 하다가 권세가 사라지자 죄를 짓고 낙향하였냐고 물었다. 다음으로는 백성과 나라의 안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다가 그 위선이 드러나 낙향하였냐고 묻는다. 세 번째로는 뜻있는 선비들을 배척하고, 자신의 뜻을 위해 함부로 정치를 하다가 죄를 지은 것이냐고 묻는다. 정도전은 세 가지 질문에 모두 아니라고 답한다.
놀라운 점은 정도전이 답한 뒤였다. 늙은 농사꾼이 정도전을 향해 “바른 말하기를 좋아해서 큰소리를 쳤고, 결국 윗사람들 눈 밖에 난 것”이라고 짚어내면서 가의와 한유, 굴원과 관용봉 등 중국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나열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바른 말을 좋아하고 도가 있는 선비들이었지만, 잘못된 일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다가 화를 당했던 사람들이다. 정도전의 눈에 비쳐진 백성들은 평생 벼슬아치 밑에서 농사나 짓는 하찮은 인간들이 아니었다. 정도전이 현장에서 만난 백성들은 오히려 세상의 이치를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물론 늙은 농사꾼의 입에서 중국의 선비들 이름까지 줄줄 나왔다는 확신은 없다. 다만 정도전이 늙은 농사꾼을 묘사한 방식에서 그가 늘 강조해 왔던 민본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큰 의미를 가진다.
유배지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정도전은 신흥무인세력으로 떠오른 이성계와 손을 잡는다. 그가 이성계에게 지어 올린 법전인 <조선경국전>에 따르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나라가 조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성을 위하고 사랑해야 하며 보호하는 것이 왕의 당연한 의무라는 점도 강조했다. 또한 임금의 지위라는 것은 한없이 높지만, 단 한 번이라도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성리학적 윤리와 실천적 도학정치(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통치 사상)를 내세웠던 정도전은 왕실의 재산을 환수해 국고로 돌리는가 하면, 왕과 고위 관리들을 감시하는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강화한다. 특히 사헌부와 사간원은 감찰과 언론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정도전은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로 불릴 만하다.
그가 외쳤던 개혁에는 늘 ‘민본’이 따라왔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이다. 그런 백성들을 숨이 턱 막힌 소에게 채찍질을 가하듯 대하면 격동하며 치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굶주린 백성을 가혹하게 착취하면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적이 된다.’는 뜻이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통해 백성들의 안정된 생업을 강조했다. 안정된 생업이 없으면 누구나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는 아주 당연한 논리였다.
역적이라는 굴레를 벗고, 문헌사
이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갈 차례가 됐다. 정도전은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했을까? <태조실록>에는 정도전을 역적으로 묘사했지만, 역모를 꾸몄다는 그 어떠한 정황 증거도 없다. 정도전이 있던 대궐 문에 횃불이 없었다는 다소 의아한 기록 탓에 오히려 이방원 측의 모함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게다가 정도전을 야박하게 평가했던 <태조실록>과는 달리 그를 극찬하는 기록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여 바친 정도전을 이성계는 높이 평가했고, 그의 스승이자 고려 말 3은(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중 한 사람이었던 이색은 “옛날의 군자도 정도전과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를 존경하는 바이다.”라고 평가했다. 조선 초기의 문신 신숙주는 “당시 영웅과 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했으나 선생(정도전)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면서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웠다는 점을 인정했다.
<태조실록>에 역모를 꾸몄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후 왕들도 정도전을 역적으로 기억하였다. 그러다 1791년, 정조가 정도전의 학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기존 <삼봉집>에 빠진 글들을 모아 문집을 다시 발간하였고, 그 목판이 현재 삼봉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1865년, 고종은 한양도성을 설계한 정도전을 높이 평가하여 모든 훈작(훈등과 작위, 훈등은 나라나 군주를 위하여 드러나게 세운 공로의 등급)을 회복시키고, 1872년에 경기도 양성현 산하리에 문헌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1912년, 정도전의 후손들이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으로 이전하였으며 삼봉기념관이 건축되는 계기가 되었다.
문헌사 옆에는 정도전의 장자였던 정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희절사’도 있다. 정도전이 죽음을 당한 이후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지만, 네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정진 선생은 세종 때 형조판서를 지냈다. 다행히도 후손들은 조정 안에서 활동했으나 정도전만큼은 이방원의 의지 때문에 무려 500년이 넘도록 복권되지 못했다. 문헌사로 입장하면 ‘유종공종’이라는 어필(임금이 손수 쓴 글씨)부터 보인다. 한양도성을 축조하고, 경복궁 등 각 전당의 이름을 지은 정도전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이성계가 직접 하사한 것이다. 그 뜻이라 하면 ‘유학에 관한 학문적 지식이 으뜸이요, 조선 개국 창업과 수도 한양 건설의 공로 또한 으뜸’이라는 의미다. ‘유종공종’의 현판을 지나 사당 안을 들여다보면 정도전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다.
기나긴 여정의 마침표, 도담삼봉
정도전은 역적이라는 굴레의 그림자 때문이었는지 지금까지 묏자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동국여지지>에서 “정도전의 묘가 과천현 동쪽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발견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과천현 동쪽 18리는 지금의 서울 우면산 북쪽 자락이다. 후손들의 노력으로 묘를 하나 발견했으며, 1989년에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몸통이 없는 머리 부분의 유골과 조선 초기의 벼슬아치들이 가질 수 있었던 백자를 발견하였다. 정도전이 참수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한양대학교는 정도전의 묘일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현재 그 유해는 정도전 사당인 문헌사 맞은편 은정골 야산에 가매장되었기 때문에 정도전의 산소 터 표석만을 찾을 수 있었다. 양재고등학교 정문 옆에 작은 표석이 보이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다행히도 정도전의 가묘를 찾을 수 있었다. 삼봉기념관이나 문헌사를 방문하는 사람은 있어도 정도전의 가묘까지 찾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문헌사 옆을 우회해서 0.6km 정도 걸어가면 정도전이 지은 ‘고의’라는 시와 함께 고즈넉하게 보이는 정자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시골길의 정취가 베어 있는 정도전의 가묘를 볼 수 있다.
정도전의 흔적을 찾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조선 개국에 반대하다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한 정몽주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에 왕릉에 버금갈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반면 정도전의 유해는 가매장되었으며, 그 가묘만이 문헌사 뒤쪽을 쓸쓸히 지키고 있다. 나주 다시면에 위치한 유배지는 그 외관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가 살았다는 집은 남아 있지 않고, 종로구청 옆자리에 ‘집터’라는 표석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다.
불우의 천재로 불리기까지 걸린 500년은 참으로 기나긴 여정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의 흔적을 찾아 떠난 이 여정의 마침표는 도담삼봉이어야 했다. 그가 정자를 짓고 시를 읊은 것으로 알려진 도담삼봉에서 역적의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삼봉스토리관에 들어서면 정치인 정도전이 아닌 소년 정도전의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무지개 색의 조명을 받은 도담삼봉의 모형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뒤로는 도담삼봉과 관련된 전설과 김홍도 및 겸재 정선의 빼어난 그림들을 확인할 수 있다. 도담삼봉 옆에는 또 하나의 단양팔경인 석문이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구름다리 모양의 거대한 돌기둥으로 그 규모가 동양에서 제일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소년 정도전이 뛰어 놀았던 것처럼 단양팔경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불우의 천재,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 그의 흔적은 늘 쓸쓸해 보였지만, 도담삼봉만큼은 ‘피맛골’을 지켜봤을 정도전처럼 잠시나마 평온을 가져다 주었다. <삼봉집>에 수록된 정도전의 글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도담삼봉 뒤로 보이는 일출을 감상해 보는 건 어떨까.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그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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