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전봉준, 미완의 혁명이 남긴 뜨거운 울림

역사탐방 길라잡이 : 전봉준, 미완의 혁명이 남긴 뜨거운 울림
역사탐방 길라잡이 : 전봉준, 미완의 혁명이 남긴 뜨거운 울림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1894년 3월, 동진강이 감싸고 있던 야산이 백산(白山)이 되었다. 안으로는 탐욕스럽고 포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적의 무리를 내쫓기 위해 흰옷을 입은 농민들이 지금의 부안 백산성에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나당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의 구원군을 맞이했던 이곳은 농민들의 뜨거운 열기 덕분에 이후부터는 백산으로 불리고 있다. 멀리서 지켜보던 백성들은 그들이 들고 있던 죽창 때문에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을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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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을 이끄는 전봉준 장군,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백산에 모인 농민들은 ‘보국안민(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이나 ‘제폭구민(폭도를 제거하고 백성을 구함)’ 등의 문구가 쓰인 깃발을 펄럭였다. 때로는 죽창을 높이 들고 함성을 질렀으며 일부는 훈련을 받은 덕분에 대오를 짜기도 했다. 이들은 양반과 부호 때문에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지방 관리들에게 굴욕을 받았던 낮은 벼슬아치들의 들끓는 소리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 외척들의 국정농단에 맞선 이 항쟁은 외세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한 반외세 투쟁으로 번져갔다. 이렇게 동학군은 첫 승전보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있었다.

탐관오리의 목을 베겠다, 사발통문

1894년 1월, 고부에 있는 말목장터에서 그 첫 봉기를 알렸던 전봉준과 농민들은 당시 최악의 탐관오리로 알려진 조병갑의 목을 베기 위해 관아(벼슬아치들이 모여 나랏일을 처리하던 곳)로 향했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모진 폭행을 당한 끝에 죽음을 맞이한 것도 봉기에 큰 도화선이 됐을 것이다. 전창혁과 농민들은 조병갑의 부정행위를 참을 수 없어 고부 관아를 찾았으나 오히려 심한 몽둥이질을 당했으며 주모자라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분노로 가득했던 전봉준은 봉기에 앞서 죽산리의 부호 송두호의 집에서 사발통문을 모의했다. 반란을 모의하는 이 자리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이 위에 사발 한 개를 엎어 놓고 밑에서부터 원을 따라 서명했다. 예전 선비들이 상소를 올릴 때 누가 우두머리인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사발을 엎고 둘러가면서 서명했던 관례를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는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송두호와 그의 아들 송대화, 전봉준 집안의 사위였던 손여옥의 이름이 있었다. 현재 일부 내용은 떨어져 버리고, 연월일 표시가 남아 있는 이 사발통문에는 당시 열다섯 살인 송국섭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 이 소년은 문서 전달과 심부름을 하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만큼 조병갑의 수탈 행위가 심각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된 사발통문에는 당시 절박함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남아나는 백성이 없을 것이라는 그 호소 때문인지 구절마다 거칠고,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건조하게 느껴진다. 기념관에는 학생들을 위한 사발통문 체험관도 준비되어 있다. 송국섭의 심정으로 당시 고부 안을 가득 메운 농민들의 통곡을 잠시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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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안타깝게도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조병갑의 도주 이후 관아에 있던 곡식은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전봉준은 말목장터를 본부로 삼고 봉기를 확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신임 군수 박원명의 회유로 동요했고, 고부를 넘어 봉기가 확대되면 ‘역모’라는 무거운 죄가 따라온다고 믿었다. 특히 지도부 내에 일부 토호(국가 권력과 대립하면서 향촌에 토착화한 지방 세력) 세력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봉기로 이끌 수는 없었다.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는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안핵사(조선 후기 사건 처리를 위해 파견한 임시 관직) 이용태가 오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이용태는 당시 전봉준을 잡겠다며 무고한 농민들을 폭행하고 부녀자들을 향해 겁탈과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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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고택>

정읍시 이평면에 위치한 전봉준 장군의 고택(예전에 살던 집)은 이용태가 불을 지른 곳이었다. 동학 교인으로 지목된 농민들의 집을 모두 불태웠지만 전봉준이 살던 이 집은 다행히도 완전히 불타지 않고 일부가 남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시골 마을 언저리에 위치한 전봉준의 고택, 그가 가슴 졸이며 머물렀을 것을 생각하니 그리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특히 당시 상황을 재현한 방과 부엌을 들여다 보면 측은지심마저 든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방명록에 이름 석자를 기록하면서 잠시 동학군의 심정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다.

죽어도 한 날, 살아도 한 날,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전봉준은 이용태와 역졸들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당촌 마을 근방으로 피신했다. 이미 눈치를 채고 있던 전봉준과 수하들은 다음 거사를 위해 무기를 땅에 묻고 고부를 떠났던 것이다. 전봉준이 도착한 무장은 동학의 최대 세력을 형성시켰던 손화중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전봉준의 비서 정백현과 일찍이 동학에 입교하고 전봉준에 협력하던 오시영 등 동학교도들이 많이 거주했다. 조병갑의 목을 베기 위해 농민들과 봉기했던 전봉준은 당시 시기를 놓고 이견이 있었던 탓에 손화중과 손을 잡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기회를 엿보던 전봉준은 이곳 무장에서 다시 봉기할 것을 결정했고, 드디어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손화중과 김개남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봉기가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던 태인은 바로 김개남의 근거지였다. 그는 타협을 몰랐으며 기개가 있던 탓에 태인에서는 혁명의 지도자로 불렸다. 이제 세 사람은 “죽어도 한 날, 살아도 한 날”이라며 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세 지도자가 이끄는 농민들은 고부, 무장, 태인, 정읍 출신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무려 4천여 명이 응집했다. 고부에 약 500명이 모였던 곳과 비교하면 엄청난 숫자였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은 차례대로 서명을 한 뒤에 민씨 정권을 향해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수령들의 탐학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임금과 나라를 향한 충성은 잊지 않고 있었다. 이에 호응한 농민들이 전봉준의 장엄한 목소리가 끝나자 세상이 곧 뒤집어질 것처럼 환호했다. 전봉준은 이때부터 여러 발표문 앞에 자신의 이름을 기록했다. 어렸을 때부터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체구가 작은 아이. 워낙 작아서 ‘녹두’라는 별명이 붙었던 전봉준이 드디어 동학군의 총대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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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기념탑과 포고문>

포고문은 농민군 전령(심부름꾼)들에 의해 전라도 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상도에도 전해졌다. 이른바 ‘무장 기포’가 마무리되면서 전봉준과 농민들은 고부를 단숨에 점령하고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 고부 민란 당시 지도부를 회유했던 박원명이나 전봉준을 잡겠다며 무고한 농민들의 집을 모조리 불태웠던 이용태도 줄행랑을 친 상태였다. 백산에 지휘부를 둔 전봉준과 농민들은 국가를 반석 위에 두겠다며 거사의 이유를 담은 포문을 열었다. 민씨 정권의 국정농단과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고자 내걸은 격문은 전국으로 퍼져 갔고, 나날이 농민들이 몰려들었다.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는 전봉준의 고향인 고창으로 넘어가는 길에 볼 수 있다. 선운대로를 한참 지나가다 구암3교 옆에 비교적 좁은 진입로에 있다 보니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동학군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훈련장과 유적지 안내도가 충실히 마련되어 있다. 전봉준 장군과 동학군의 그 뜨거웠던 포고의 현장을 상징하는 기념탑은 죽창을 주변에 배치했으며 강렬한 의지를 담아낸 횃불로 형상화 했다.

첫 승전보를 알리다, 황토현 전투

백산에서 울려 퍼진 함성은 전라도를 총괄하던 감찰사 김문현에게 전해졌다. 그는 고부 민란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병갑을 체포한 뒤에 전봉준까지 붙잡으려고 했으나 실패한 일이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애초부터 싹을 잘랐어야 했다. 후회막심하며 전전긍긍하던 김문현은 전라도 전주에 설치됐던 무남영(군대가 주둔한 군영)의 군사들을 모조리 소집하더니 보부상과 백정, 거기에 무부(무당의 지아비)들까지 강제로 동원했다. 감영(각 도의 관찰사가 거처하는 관청)에서 보낸 이들은 수백 명에서 수천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전모를 살펴 보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먹을거리조차 준비되지 않은 탓에 아무 마을에나 들어가 소와 돼지 등을 마구잡이로 잡아먹었고, 심지어 부녀자들까지 겁탈했다. 훈련을 받지 않은 탓도 있지만 이들 중에는 술에 취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전주로 향하던 동학군은 감영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에 백산에서 전열을 정비했다. 총을 쏘면서 덤벼들던 감영군을 황토재로 유인하면서 유리한 고지를 이끌었다. 때마침 내리던 비가 황토를 물들였고, 제풀에 지친 감영군은 야영을 준비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비가 멈춘 어둑한 밤은 짙은 안개까지 끼면서 모든 시야를 가리고 말았다. 봉기의 주체가 농민들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불을 밝히고 거하게 술을 마시며 흥겹게 노래까지 부르는 여유를 보였다. 마을에서 부녀자들을 납치해 희롱하는 군사들도 있었다.

전봉준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30대 중반까지 유랑생활을 했지만, 고부에 정착한 이후부터는 서당 훈장 역할을 했다. 상당한 지식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아버지 전창혁의 영향 덕분이었을 것이다. 김의환의 <전봉준 전기>에 따르면 전봉준은 유학과 풍수, 그리고 실학까지 관심을 두었다. 그는 정약용의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를 읽고 크게 감탄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로 올라와 국내 정치와 외세의 동향까지 살폈던 전봉준은 이미 갑오년의 악몽을 내다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감영군의 눈에는 그저 무지한 농민들로 보였겠지만, 그들에게는 총사령관 전봉준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전략가였다.

<실학박물관 전경 (출처 : 실학박물관 제공)>

<황토현 전투 기념비>

전봉준은 먼저 농민군 수십 명을 보부상으로 변장시켜 감영군 진영을 염탐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짚더미를 쌓아 몸을 숨겼고, 장기전을 대비해 주먹밥을 준비했다. 새벽이 찾아오고, 감영군들이 모두 잠이 들자 기습을 감행했다. 까마득한 밤 때문이었을까. 감영군은 무지한 농민들이 도망쳤다고 생각했는지 갑작스러운 공격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때 보부상으로 변장해 감영군에 침투했던 동학군 일부가 계획했던 퇴로로 유인했고, 동학군들이 일제히 죽창을 치켜들었다. 이때 동학군의 전리품은 대포 1문과 소총 600자루, 많은 칼과 창이었다. 전봉준은 도망치던 향병(각 지방에서 조직하여 훈련한 병정)을 공격하지 않으면서 농민 봉기의 정당성을 대외적으로 알리고자 했다.

황토현 전적지로 가는 길은 이미 짙은 황토색의 장관을 보여주고 있었다. 덕천면 하학리 곳곳에서 황토밭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그냥 지나치기 아까울 정도로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준다. 현재 황토현 전적지는 기념 공원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옛 지도를 바탕으로 물길과 옛길, 그리고 논배미(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 하나하나의 구역)를 바탕으로 들판을 재현할 예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학군들의 그 기개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들이 바라던 세상처럼 황토현 전투 기념비로 들어가는 입구는 넓게 열려 있다. 힘차게 치솟은 황토현 전투 기념비만으로도 동학군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전주성 전투의 결과가 보여주는 동학농민혁명의 의미

황토현 전투에서 첫 승전보를 안은 동학군은 정읍을 통과해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거쳐 장성까지 진격했다. ‘장성 황룡천 전투’는 조선의 정예 부대인 경군을 물리쳤다는 점에서 동학군에게 큰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제 전봉준과 동학군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다시 정읍으로 올라가 태인과 원평을 거쳐 전주에 도착했다. 목표로 했던 전주성은 소수의 군졸만이 지키고 있었다. 지략이 출중했던 전봉준은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동학군 일부를 창군(창을 주 무기로 삼던 군사)으로 변장시켜 1894년 4월 27일, 끝내 전주성을 점령했다. 황토재를 피로 물들였던 황토현 전투와는 달리 무혈 입성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동진강이 감싸던 야산을 백산으로 만들었던 그 물결이 이제는 전주성을 하얗게 물들였다. 죽창과 낫 사이로 깃발이 펄럭였고, 동학군들의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실학박물관 전경 (출처 : 실학박물관 제공)>

<전주성을 함락하는 동학군,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주성은 행정권과 사법권의 중심지였다. 전봉준도 이를 잘 알기에 완산에 있는 용머리고개에서 진을 치고 경군과 대치했다. 그러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왕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을 모신 경기전이 훼손되자 경악하고 말았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으로 전봉준과 동학군에게 상징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자 동학군과 경군 사이에 잠시 소통이 이루어졌고, 전주화약이 맺어지면서 1차 동학농민혁명은 마무리가 됐다. 전봉준의 이러한 결심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을 구실로 조선 땅에 들어 온 청나라는 기 싸움을 벌이던 일본과 충돌을 막고자 텐진조약을 맺고 조선을 떠났지만, 고종의 요청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조선을 장악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들어 온 청나라에 대해 일본은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단지 우리 농민들이 잘살게 하려고 일으켰던 봉기가 외세의 침략으로 이어지자 전봉준은 고심 끝에 조정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실학박물관 전경 (출처 : 실학박물관 제공)>

<공주 우금치 전투,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동학군은 비록 서울을 앞에 두고 해산했지만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농민 자치 기구)를 설치해 폐정개혁안을 이루어 나갔다.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삼정의 문란을 시정해 나갔던 것이다. 당시 전봉준은 실질적으로 전라 감사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최초로 농민들이 지방자치를 실현한 것으로 아시아 민주주의의 기원으로도 평가받을 정도다. 조선을 집어삼켰던 혼란의 1894년, 갑오년의 흐름을 이곳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발통문으로 결의를 다지는 동학군의 모습부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의 헛되지 않은 죽음까지 역동적인 그림으로 담아냈다. 특히 공주 우금치 전투는 동학군의 애통한 심정을 절제된 미학으로 묘사해 눈길을 끈다.

전봉준 단소에서 생각하는 ‘나는 동학을 좋아한다’

동학군은 농번기를 맞아 자신들의 일터로 돌아갔지만,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전주화약으로 농민들이 해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오히려 일본은 경복궁을 무단 침입하고 청나라와 전쟁까지 벌인다. 동학군의 적은 이제 탐관오리가 아니라 조선 땅을 침범한 일본군이었다. 전봉준의 2차 동학농민혁명은 반외세 투쟁으로 발전한다. 1894년 9월, 전봉준은 농민군을 삼례로 재집결시켰다. 삼례는 고부민란이 일어났던 2년 전인 1892년 11월에 집회가 있었던 곳이다. 전봉준의 ‘칼의 노래’에 맞춰 사기를 드높인 동학군은 이제 의병이 되었다. 논산에서 만여 명이 모인 동학군은 서울로 입성하기 위해 공주로 향하던 중 1894년 11월,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결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봉준의 동학군은 안타까운 패배 이후에 원평으로 후퇴하면서 기회를 노리지만 역시 패배하고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해산한다. 전봉준은 순창군 피노리로 피신해서 재기를 노렸지만, 수하인 김경천의 밀고로 결국 붙잡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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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는 전봉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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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심문 장면,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았던 전봉준은 끝내 일본군과의 협조를 거부하고 1895년 3월, 43살이 되는 나이에 처형 당한다. 전봉준의 심문 기록인 <전봉준 공초>에 따르면 그는 이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취조를 하는 판관을 향해 당신들은 나의 적이라며 당당히 외쳤고, 일본군과의 협조는 비겁한 짓이라고 일갈했다. ‘동학’에 대해 질문하던 판관에게도 똑똑히 알려주었다. 마음을 바로 하고 만물을 공경하는 것이며, 마음을 지켜 충효로 근본을 삼고, 나라를 지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는 ‘동학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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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단소>

‘사인여천(사람을 하늘과 같이 섬긴다)’과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이다)’을 내세웠던 동학은 사실상 신분 제도를 부정하는 종교였다. 사람답게 살지 못했던 농민들은 동학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신분이라는 굴레에 묶여 더 힘든 삶을 살았을 그들을 생각하며 전봉준 단소(제단이 있는 곳)로 향한다. 전봉준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기에 제단과 허묘(주검이 없는 비어 있는 무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비통함 탓이었을까. 따스한 햇빛이 비치거나 때로는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피부를 스치는 와중에도 전봉준의 단소는 형언할 수 없는 고요함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절명시>를 통해 운이 다하지 못한 자신의 숙명을 애절하게 표현했다.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라는 구절에 절로 숙연해진다.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해 싸웠던 전봉준의 ‘미완의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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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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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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