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시련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1818년 9월(순조 18년), 그가 도착한 곳은 남양주 마재마을이었다. 강진으로 유배된 지 18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건 지세가 다른 탓이지.” 일곱 살 때 아버지 정재원 앞에서 지었던 시가 언뜻 떠올랐을까? 열 사흘을 걸어 고향에 도착한 정약용은 정치적 박해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운길산 수종사에서 위로를 받으며 정파를 가리지 않고 대표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소론뿐만 아니라 노론을 대표하는 김매순, 홍석주, 홍길주, 김정희까지 정약용의 생가를 찾았다.
돌이켜보면 부질없는 일이었다. 서양의 발달된 문명을 배우기 위한 그의 행동은 천주교 박해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는 계기가 되었다. 막내 형 정약종을 고발하면 잠시나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뒤늦게 천주교도가 된 정약종은 지인과의 편지에서 천주교를 배우려 하지 않는 정약용을 원망하고 있었다. 천주교를 이미 버렸지만, 노론벽파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목숨을 부지하려는 마음 자체가 사치였던 것이다.
정조의 승하 그리고 낙향
1800년 6월 28일,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벽파와 정치적 대립을 하던 정조가 세상을 떠났다. 노론벽파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겨 놓고 능행(임금이 능에 나들이)을 하던 정조를 두려워하고 있었고, 신임을 받던 정약용 역시 경계 대상이었다. 때마침 정약용의 친척이었던 윤지충이 부모님의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불태운 사건이 터지면서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가 시작됐다. 이제 정조가 없는 세상, 정약용은 화를 피하기 위해 권력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자신의 군주이자 자비로운 아버지 같았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이제 어느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세상을 잊고자 한 그의 결심이 고향집의 여유당에 그대로 담겨 있다. 이 당호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로 ‘여’는 머뭇거리기를 겨울의 냇가를 건너듯이 하고, ‘유’는 망설이기를 사방을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듯이 조심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여유당은 정약용의 본성과 운명이 그대로 묻어있는 곳이다. 그는 용기만 있지 지략이 없었고, 의심할 줄을 몰랐다. 그만둘 수 있는 일이라도 기쁘게 느끼면 손에서 놓지 못했다. 서학의 길이 옳다고 믿었고 선이라고 확신했지만, 비난을 받아야 했다. 정약용은 지난 인생에 대한 회한을 <여유당기>에 “이것이 내 본성이고, 운명이구나.”라고 서술했다. 정약용은 노자에게 조언을 받은 셈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던 겨울, 여유당에서 지켜보던 냇물은 따끔따끔하여 뼈를 끊을 듯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지금은 한없이 청량해 보이지만 당시 정약용에게는 건너면 안 되는 길이었다. 부득이하면 떠나지 않았던 그곳. 여유당은 정약용의 희로애락이 자리한 곳이다.
실학자 정약용, 다시 붓을 들다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조정 안에 정조의 승하 소식이 전해지자 곧장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국문을 당했고, 정약종의 편지가 발견되면서 가까스로 장기현으로 유배를 갔으나 이제는 황사영의 밀서가 발견된 것이다. 황사영 백서 앞에서 두 사람은 삶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두 형제가 손을 꼭 잡고 있는 그때 황해도에서 돌아온 정일환이 노론벽파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정약용과의 인연을 기억하던 그는 노론벽파의 끊임없는 박해가 부당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권력 다툼에 진저리가 나버렸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시를 지으며 살아가고 싶었던 정약용은 이제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강진에서도 외면 받았던 그는 왼쪽 어깨에 마비 증상이 오더니 시력도 급격히 나빠졌다. 안경에 의지하면서도 그가 힘겹게 붓을 들었던 이유는 오로지 가족 때문이었다. 처음은 이 시련을 잊어 보고자 글을 썼지만, 고향에 남은 자식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정약용 일가는 셋째 형 정약종이 참수를 당하면서 사실상 벼슬길이 막힌 신세가 됐다. 정약용도 노론벽파의 음모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먼 길을 찾아온 아들 정학연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학문을 강조하는 것뿐이었다. ‘교육’을 강조했던 그는 점차 필생의 저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유배지에서 작성한 <목민심서>가 지금까지 빛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윤지충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부사로 2년 동안 근무했는데 사실상 정조에 의한 좌천이었다. 노론벽파의 압박으로 인한 부당한 처사였지만, 경험을 살릴 기회로 여겨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등 지방 행정을 두루 살필 수 있었다.
초가지붕을 기와로 교체해 복원된 다산초당은 만덕산 중턱에 위치했다. 그 길을 따라 다산 4경(정석바위, 약천, 다조, 석가산)을 볼 수 있는데 정석바위는 다산 정약용의 바위로, 유배지를 찾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백련사로 넘어가는 길에는 차밭과 동백꽃을 볼 수 있으며 아름다운 강진만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흑산도에 있는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던 천일각을 만날 수 있다. 조정에서 두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겼던 정약용은 사람들에게 외면 받았던 탓에 은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다산초당에서 약 50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이 누각에서 꺼져가는 희망을 조금씩 살리고자 했을 것이다.
실학의 발전, 정약용과 채제공의 만남
노론벽파에게 정약용은 왜 그토록 경계 대상이었을까. 단지 정조의 총애를 받은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풍이자 사상인 실학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실용적이지 않은 성리학을 뒤엎으면서 백성들의 지지까지 받으니 정약용을 포함한 실학자들이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낡은 것은 후퇴하는 법. 결국 자연과학이 연구되면서 18세기의 조선의 르네상스가 시작됐다. 정약용은 먼저 이익의 <경세치용> 학문을 접하면서 서양 문물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실학은 시대적으로도 피할 수 없는 학문이었다. 지난 2백여 년이 흐르면서 여러 가지 모순들이 드러났고, 여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앙법 덕분에 생산량이 늘어나 농민들은 남은 농산물을 거래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상공업도 발전했다. 실학자들은 공부의 목적부터 실리와 실용에 초점을 두었다. 유교 경전을 다시 해석하면서 다양한 학문 주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 모든 것들은 백성들의 경제 생활 개선과 사회적 지위의 향상에 있었다. 토지제도를 개혁해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땅을 나누어 주고,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했던 것이다. 당시 정조를 포함한 실학자들의 기록과 실학자들의 노력의 흔적을 실학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다.
실학박물관에서 최근 실학과 관련하여 ‘재상 채제공, 실학과 함께 하다’라는 의미있는 기획전이 개최되었다. 정조 때 재상이었던 채제공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전시로, 재야의 실학 연구를 실질적 성과로 연결하는데 큰 역할을 한 채제공과 당시 실학 관련 자료와 유물을 전시한 것이다. 채제공과 정약용의 인연은 정약용의 아버지인 정재원으로부터 시작된다. 벼슬을 마다하고 마재마을로 돌아간 정재원을 형조좌랑에 임명되게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채제공이다. 그리고 성균관에 입학한 이후 수석 자리를 놓지지 않았던 정약용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던 채재공과 정약용의 운명적 만남도 이루어지는데, 그때 나이 채재공은 57살, 정약용은 15살이었다.
정약용,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다
정약용과 정조, 채제공이 18세기 르네상스를 이끌 수 있었던 건 발상의 대전환에 있었다. 그동안 오랑캐로만 인식됐던 청나라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서양 기술의 우수성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792년(정조 16년), 정조는 부친을 여의고 삼년상을 치르던 정약용에게 화성 설계를 지시한다. 화성은 정조에게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새로운 도시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무려 제2의 신도시 건설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은 정약용은 중국의 저서들을 참고해 ‘성설’이라는 화성 설계 지침을 만들었다. 정조가 보낸 <테렌즈 기기도설>은 정약용에게 큰 자극이 되었는데, 서양 선교사 테렌즈가 서양 기술을 중국에 소개한 책으로 역학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고 있었다. 여기서 정약용의 눈에 들어온 건 ‘기기도설’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유명한 ‘거중기’로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바위 등을 쉽게 들어올릴 수 있었다. 고정도르래가 힘의 방향을 바꿔주면서 움직도르래가 그 힘을 반으로 감소시키는 거중기는 화성 축조 때 사용되어 공사 기간과 비용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기존 수레를 개선한 유형거도 눈에 띈다. 축조 현장에 바로바로 돌을 실어 옮겨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거중기보다 현장에서 더 유용하게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공사 기간이 절반으로 줄은 것만 봐도 그 실용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28개월 만에 완성된 화성은 정약용이 고안한 자재 운반 기구들 덕분에 예상했던 제작 기간보다 7년을 더 앞당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거운 돌을 옮겨 싣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정약용의 성설에 따르면 돌의 규격화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8만 개가 넘는 돌을 미리 다듬어서 옮긴 것은 지금 봐도 대단하지만, 이런 물리적인 뛰어남 외에 정조와 정약용을 기억해야 하는 또 다른 모습이 화성에 남아있다.
화성을 구성하고 있는 돌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백성들의 이름이 적힌 모습을 볼 수 있다.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그 이유 중에는 위민(백성을 위함)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화성기적비’에는 ‘둔전’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는데. 둔전은 그동안 토지가 없던 농민들에게 경작권을 주는 것으로, 특권을 노리던 양반들에게 경고를 주는 메시지였다. 실학을 통해 실생활에 도움을 주고 사회를 바꾸어 나가려는 생각의 바탕에는 백성을 향한 마음이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요즘, 한국판 뉴딜 정책이 주목받고 있다. 거중기와 유형거를 활용한 화성 축조는 실용적인 기구의 개발이라는 성과뿐만 아니라 고용 창출의 효과까지 얻었다. 오늘날 대규모 국책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화성 축조에 구현된 효율성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는 셈이다.
정약용은 18년이나 되는 유배 생활 동안 실학 정신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써내려 갔다. 백성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 넣었던 군포의 부당함을 목도하면서 <애절양>에 그 심경을 담아 냈다. 당시 군정 제도는 죽은 부모와 아이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만행이 자행되고 있었다. 자신의 생식기까지 잘라내는 사내를 지켜보던 정약용은 <경세유표>를 통해 행정기구의 개편과 제도를 주장했다. 썩은 나라를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그의 경고가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가 않다. 당대 대표 학자들과 세상의 변혁을 논했던 정약용은 제자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육’을 강조해 벼슬길이 막혀 좌절하고 있을 자녀들을 일으켜 세우기도 했던 정약용은 1836년(헌종 2년), 결혼 60주년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랐다. 미화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속세에 빠져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고, 하늘을 쳐다보며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다.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 불릴 만큼 천재성을 보이며 다양한 분야에서 수백여 권의 저서를 남긴 정약용,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신혼 첫날 밤을 떠올렸다. 60년 전에 속삭였던 사랑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을까. 정약용은 <회혼시>를 통해 아내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정약용의 묘가 있는 마재마을에는 열수(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긴 강)가 있다. 집 앞을 흐르는 넓은 강으로 자신을 열수 정약용으로 칭하기도 했다. 정약용의 묘를 지나 열수 앞에서 그가 실학을 통해 꿈꾸었던 세상을 함께 그려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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