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치열했던 삼국의 숨결을 느끼며 중원을 걷다

역사탐방 길라잡이 : 치열했던 삼국의 숨결을 느끼며 중원을 걷다
역사탐방 길라잡이 : 치열했던 삼국의 숨결을 느끼며 중원을 걷다
역사탐방 길라잡이 : 치열했던 삼국의 숨결을 느끼며 중원을 걷다

우리 역사를 반만년 역사라고 말하는데 내놓을만한 얘기거리가 없는 지역이 있을까? 대한민국의 중앙에 위치한 충주도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남한강이 흐르는 이곳은 선사시대 취락의 흔적이 있으며, 특히 통일신라 이전 한강 유역을 둘러싸고 가장 치열하게 삼국이 전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삼국시대 이전 삼한 중 마한의 일부였던 충주는 백제 근초고왕 때(350년 경)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 그 후 5세기 중엽 고구려가 남하하여 중원지방을 지배하게 되고, 이후 6세기 중엽 신라가 충주 지역의 주인이 된다. 이처럼 삼국이 번갈아 차지한 중원 지역은 한반도 전체 세력을 좌우하는 중심지역으로 성장하는데, 조선시대에는 가흥창이 설치되어 물자를 운송하는 수상교통의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오래 전 역사의 주인공들이 주목했던 중원 지역, 그 중심인 충주가 담고 있는 지나간 시간의 자취와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역사탐방 길라잡이 : 치열했던 삼국의 숨결을 느끼며 중원을 걷다

<대한민국의 중심, 충주 (출처 : 충주시 홈페이지)>

중원의 상징, 치열한 전투의 현장

중원의 도시 충주의 의미와 가장 어울리는 곳이 중앙탑사적공원이다. 1992년 사적공원으로 조성된 이곳은 충북 최초 야외 조각공원이기도 한데 그 명성답게 넓은 잔디밭과 나무들 사이로 다양한 조각품들을 볼 수 있다. 다양한 식당과 카페, 산책코스로 충주 시민들의 힐링을 위한 쉼터 역할도 하고 있는 공원에 들어서면 웅장한 자태의 칠층석탑과 마주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중에서 가장 큰 석탑,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불리는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인데,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하나의 받침돌을 사용하지 않고 이중으로 포갠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후 고려시대에 2차 봉안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 보수를 하면서 모양이 일부 변형되었다는 논란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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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세워졌다고 여겨지는 시기는 신라 원성왕(재위 785~798년) 때인데, 언제부터 중앙탑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중앙탑이라는 이름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원성왕이 국토의 중앙을 알고자 보폭이 같고 잘 걷는 두 사람을 각각 남과 북의 끝에서 동시에 출발시켰더니 탑평리 칠층석탑의 위치에서 만났고, 그래서 국토의 정중앙이라는 표시로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과거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중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투를 벌인 곳, 세 번이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3국 모두에게 중요했던 곳, 통일의 교두보였던 중원, 그 곳에 위치한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의 당당한 자태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이 갖고 있는 중원 문화의 상징성과 자부심일 것이다.

시민과 함께 하는 충주박물관

칠층석탑을 본 후 옆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바로 충주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멋스러운 한옥 지붕과 현대적인 외관이 특색인 충주박물관은 1986년 시민들이 기증한 유물을 모아 유물전시관으로 시작하였다. 이후 중앙탑 주변으로 이전하여 충주의 모든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종합박물관으로 발전하였다. 박물관은 건물 2동과 야외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제1관은 역사실과 민속실로 구분해 불교미술과 민속품이 전시되고, 박물관을 지키는듯한 석탑을 지나 위치한 제2관은 선사삼국실, 고려조선실, 충주항쟁실, 충주명현실로 구분되어 충주의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충주박물관 1관 및 2관>

박물관에서는 충주가 배출한 여러 인물들도 만나 볼 수 있는데 대가야 가실왕의 명을 받들어 중국 진(晉)의 악기인 쟁을 모방해 가야금을 만들고 12개의 악곡을 만든 우륵도 그 중 하나이다. 우륵은 가야 사람이었는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신라에 귀순하였다.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이 음악을 잘한다는 것을 듣고 왕은 하림궁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두 사람의 연주에 감동한 왕은 그들을 국원성, 지금의 충주에 살게 하였다고 한다. 치열한 전투가 치러졌던 중원이 품고 있는 문화의 한 대목이다.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충주박물관을 지키고 있는 석탑과 조각들>

충주 각지에 서린 과거의 흔적을 하나로 엮어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쉽게 만든 충주박물관은 단지 유물 및 자료 전시에만 그치지 않고 시민들과 밀착된 운영을 하고 있다. 사회 교육 활동의 일환으로 충주 지역의 역사와 인물, 문화재를 중심으로 다양한 체험학습과 답사를 실시하는 어린이박물관학교를 비롯하여 박물관대학, 전통문화학교 등을 운영하여 시민들의 참여 폭을 넓히고 있다. 지난날 유물 기증으로 충주 시민들은 박물관의 시작을 함께 했고, 오늘 충주박물관은 역사와 문화 체험 기회 확대로 시민의 삶과 함께 한다.

루암리 고분군에 잠들어 있는 중원의 사람들

중앙탑사적공원에서 충주박물관까지 살펴본 후 차를 타고 숲이 우거진 산중턱으로 향한다. 5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루암리 고분군을 찾아간다. 예전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으나 최근 대대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고, 입구에서 받은 안내 자료를 보니 고분에 대한 얘기들이 비교적 잘 소개되어 있다. 고분의 형성 시기는 6세기 후반이며, 신라 진흥왕 때 영토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이주해 온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고분은 신라의 무덤인 굴식돌방무덤, 돌덧널무덤 등으로, 굴식돌방무덤은 평면이 네모꼴이고 시상대가 마련되었으며 돌방의 벽은 땅 속이 아니라 땅 위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고분 초입의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짧은 굽다리접시, 바리, 합, 항아리 등 토기와 철기, 금동제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토된 유물 중 짧은 굽다리접시(단각고배)는 6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였고 가야에서도 사용했던 생활 도구인데, 이 무덤의 주인을 신라 귀족이나 가야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라고 추정하는 이유이다.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충주 루암리 고분군>

지금은 이처럼 보존이 잘 되어 있지만 옛날부터 고려장터로 전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구릉을 가로지르는 고개는 ‘무지고개’라고 불렸는데 그 명칭이 묻이 또는 무덤을 의미하고 있어 이곳이 공동묘지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설명을 읽으며 고분 주위에 설치된 난간 밖 언덕 위로 올라간다. 언덕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그 옛날 이름 모를 중원의 주인공들을 품고 있는 많은 무덤들이 일제강점기에 도굴되고 훼손되며 방치되었을 긴 시간이 더 안타깝게 다가온다.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 충주고구려비

루암리 고분군에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이 있다. 입구에 서있는 고구려의 상징인 삼족오(태양에 산다는 전설의 새) 조형물이 이곳이 고구려 전시관임을 말해준다. 충주는 남북을 왕래하는 계립령과 죽령 같은 육로와 남한강을 이용하는 수로 등이 있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그 당시 무기와 생활 도구를 만드는 재료가 되고 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질 좋은 철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통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곳, 그곳의 주인공은 백제, 고구려, 신라 순으로 바뀌었고 결국 통일은 신라의 몫이 되었지만 고구려는 70년 넘게 충주를 지배했고, 현재 그 자리에는 중원 점령을 상징하는 충주고구려비가 남아 그들의 기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과거 약현성당의 모습/출처: 약현성당 홈페이지>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약현성당 전경>

중원고구려비라고도 불리는 충주고구려비는 1979년에 발견되었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구려비이며 당시 삼국의 관계 등을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원래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마모를 피하기 위해 2012년 고구려비 전시관이 건립 후 전시관 내부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5세기 후반 장수왕의 남진 정책이 펼쳐졌을 때 셰워졌을 것이라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아쉽게도 이번 탐방 시점에 코로나19로 입장할 수 없어 실물로 보았을 때의 웅장함은 직접 느끼지 못하고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다.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충주고구려비 (출처 : 충주고구려비 전시관 홈페이지)>

신라에 중원을 빼앗긴 후에도 고구려는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어릴 때부터 옛날 이야기로 잘 알고 있는 온달 장군이 영양왕 때 전쟁에 나서면서 “계립현과 죽령 이북의 땅을 우리 것으로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신라 김춘추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보장왕은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원병을 보내겠다”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고구려는 결국 중원을 회복하지 못했고 역사는 통일신라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이분법으로 얘기하면 신라는 승자고 고구려는 패자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하고도 천 년도 훨씬 더 지난 오늘 그 중원의 땅에 여전히 힘차게 자리하고 있는 충주고구려비의 모습에서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생각은 부질없고 온데간데 없어진다. 충주고구려비가 전하는 소리 없는 울림은 2미터가 넘는 비의 무게보다 무겁고, 천 년의 시간보다 더 깊다.

세계 술 문화 박물관, 리쿼리움

전세계 다양한 술을 볼 수 있는 다채로운 문화의 현장.
와인에서부터 맥주 그리고 우리나라의 소주까지 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와 시음 방법, 제조 기술 등 술의 모든 것이 전시가 되어있다. 관람 후2층을 가면 와인과 커피를 강이 어우러지는 풍경과 함께 즐길 수 있다.

세계 술 문화 박물관, 리쿼리움 세계 술 문화 박물관, 리쿼리움

주     소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정안길 12
문     의043-855-7333

탄금호 국제조정경기장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물살! 누군가에게는 무한도전, 누군가에게는 체험의 현장으로!
세계조정선수권대회가 열렸던 바로 그 곳에서 조정 체험과 아름다운 강변의 풍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충주조정체험학교가 있어 일반인도 쉽게 조정에 도전해 볼 수 있다.

세계 술 문화 박물관, 리쿼리움 세계 술 문화 박물관, 리쿼리움

<출처 : 탄금호 국제조정경기장 홈페이지>


주     소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중앙탑로 124
문     의043-844-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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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석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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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9-2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