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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길라잡이

교황청 공식 순례지, 서소문

역사탐방 길라잡이 : 교황청 공식 순례지, 서소문
역사탐방 길라잡이 : 교황청 공식 순례지, 서소문
역사탐방 길라잡이 : 교황청 공식 순례지, 서소문

대체 무슨 문이 있다는 거지? ‘서소문’이라는 이름만 듣고 어떤 이들은 이런 의문을 가졌을지 모른다.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 지금은 그 어떤 문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이곳이 서소문이라 불리는 이유와 이곳에 깃든 대한민국 천주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역사탐방 길라잡이 : 교황청 공식 순례지, 서소문

<서소문 역할을 하던 철거 전 소의문의 모습>

소의문(서소문), 그 탄생과 역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며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성곽에 4개의 커다란 문인 4대문을 짓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성문인 4소문을 두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을 둘러싼 4대문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그리고 4소문은 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이다. 그중 서대문 역할을 하던 돈의문과 서소문 역할을 하던 소의문은 현재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서울의 도시 개발을 명분으로 도로를 정비했고 이때 일제에 의해 소의문이 철거된 것이다. 중앙일보 주차장 부지에 과거 서소문이었던 소의문이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비석만이 그 흔적을 대신한다.

역사탐방 길라잡이 : 교황청 공식 순례지, 서소문

<중앙일보 주차장 앞 비석>

서소문은 최초에 소덕문이라 불렸다. 성종 때 부왕인 예종 왕비에게 휘인소덕이라는 시호가 내려지자 중복을 피하기 위해 소덕문의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기록이 증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영조실록 영조 20년 8월 4일의 기록에 따르면 이전까지 소덕문에는 초루가 없었고 1744년인 영조 20년이 되어서야 초루가 지어졌는데, 초루가 완성되며 이를 보고할 때 소의문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소의문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소의(昭義)란 의로움을 밝힌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이름과는 달리 이 문은 도성에서 사람이 죽으면 관이나 상여가 나가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소의문은 아현과 남대문 밖 칠패시장으로 통하던 문이었기 때문에 통행하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때문에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어 범죄를 예방하고자 처형장으로 지정하고 사형을 집행하던 곳이었다. 실제로 현재 서소문 역사공원이 자리하고 있는 부지는 과거 ‘서소문 밖 네거리'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형장으로 사용되었다.

단일 장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처형장,
아시아 최초의 국제 순례지가 되다

우리 땅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7세기 즈음이다.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가톨릭은 일부 양반 계층에서만 책을 통해 소개되었고 포교 방식이 가벼운 모임이나 기도 정도였기 때문에 왕실과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당시 왕이었던 정조가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운 이들을 처형한 사건이 있긴 하지만, 이는 대대적인 박해라고 보긴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첫 번째 대규모 천주교 박해는 1801년 신유년부터이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했던 정순왕후 김씨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남인들을 경계했다. 그러던 중 일부 남인들 사이에서 천주교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대표적인 남인 천주교인들을 시작으로 서울에서만 300여 명의 신자들을 처형한 신유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약 6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1866년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병인박해 때는 국내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이때 서울에서 가장 많은 처형이 이루어졌던 곳이 바로 ‘서소문 밖 네거리'. 서소문 밖 네거리는 단일 장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한 장소라고 한다.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훗날 천주교가 우리나라에서 자리를 잡고 인정받게 되자 천주교구회는 천주교 박해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1984년 44명을 성인으로 선포했다. 뿐만 아니다. 서울시에서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통칭 명동성당), 대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중림동 약현성당으로 이어지는 천주교 역사의 시작과 근대건축물을 둘러보는 길을 서소문 순례길이라 소개하고 있는데, 2013년 9월 서울대교구에서는 이곳을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로 지정했고 2018년 9월엔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받은 아시아 최초의 ‘국제 순례지’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자 최대 규모의 고딕 양식 성당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사건은?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명동성당 전경>

서양식 붉은 벽돌, 웅장한 스테인드글래스가 인상적인 이곳은 명동성당이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재정 지원으로 1898년 준공되었다. 중앙에는 대성전이, 지하에는 순교자들이 안치된 지하 성지 묘소가, 외곽을 따라가다 보면 가톨릭 회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명동성당은 외형이 아름다워 천주교 신자들의 결혼식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성당 중 하나이다. 뒤에 소개할 약현성당도 그렇지만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사전에 결혼을 희망하는 신자들이 추첨을 통해 결혼식 날짜와 시간을 결정한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상>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에 지어졌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활동했던 돌우물골 근처이기도 하다. 명동성당 내부에는 이를 기리기 위해 김대건 신부 상이 자리하고 있다. 설립된 지 120여 년이 지난 명동성당은 그 역사에 걸맞게 우리 역사의 수많은 장면과 함께 하는데, 대표적으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조작에 대해 폭로했던 5.18 7주기 추모미사를 들 수 있다.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이 미사로 당시 정권은 큰 타격을 입었고, 이 사건은 6월 항쟁의 중요한 계기가 되어 민주화 운동에 엄청난 힘을 더했다. 이후 명동성당은 대학생 농성단의 은신처 역할을 했으며 6월 항쟁이 끝난 이후엔 희생자들을 기리는 각종 미사들을 집전하기도 했다.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과거 명동성당의 모습 / 출처: 『朝鮮』(朝鮮總督府, 1925)>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민주화 운동 이전, 독립운동이 있었다. 1909년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가 친일파 이완용을 칼로 찌른 후 “오늘 나는 원수를 갚았으니 통쾌하다"라고 외쳤던 장소는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찌르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비록 중상만 입히고 실패하긴 했지만 이재명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이며 이 사건 역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명동성당뿐 아니라 명동 일대에는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여러 장소들이 있다. 이재명 의사 의거지에서 100m 떨어진 곳에는 작은 공원과 함께 ‘이회영 6형제 집터’를 기리는 표지석과 이회영 선생의 흉상이 있다. 이회영 선생과 그 형제들은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자 명동 일대의 토지를 헐값에 처분하고 그 돈으로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자 광복군의 밑거름이 된 신흥강습소를 세우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불리는 사건 중 하나이다.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대한민국 최초의 성당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과거 약현성당의 모습/출처: 약현성당 홈페이지>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약현성당 전경>

1887년 서울. 천주교 신자들이 증가하자 교회 당국은 일반 서민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강의실이 필요했다. 서소문 밖 약현이라 불리는 언덕에 교리 강의실을 마련했고 이곳이 약현성당의 터가 되었다. 약현성당은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성당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벽돌조 서양식 성당으로 프랑스 신부 코스트가 설계하였다. 그는 명동성당의 설계자이기도 한데, 같은 설계자의 손끝에서 탄생한 건축물이기 때문일까? 두 성당은 전면부 생김새가 매우 흡사하다. 때문에 약현성당은 명동성당의 축소판이라 불리기도 하며 실제로 약현성당의 건축 경험이 명동성당을 지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기도 동산의 비석>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성 정하상 바오로 상>

1892년 완공된 약현성당은 최초의 서양식 성당일 뿐 아니라 일본을 통하지 않고 직접 수용된 건축 양식을 사용한 건물로 대한민국의 건축사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인정받아 사적 제252호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약현성당은 6.25전쟁을 겪으며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고 이후 노후되어 1977년에 복원되었다. 1998년 방화에 의한 화재로 일부가 소실되었고 2000년이 되어서야 현재 모습으로 복원될 수 있었다. 성당 외부에는 기도 동산이 마련되어 있으며 성 정하상 바오로 상과 함께 순교자들을 기리는 비석과 탑이 세워져 있다. 이렇듯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고 그 외관과 내부가 모두 아름다워 결혼식 장소로 인기가 많으며 드라마, 영화 등의 배경으로도 많이 활용되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어떻게 변화했는가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서소문 역사공원의 순교자 현양탑>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역사박물관 입구 조형물>

1973년 정부는 이곳에 서소문 공원을 조성했다. 서울시는 이를 통해 서소문의 분위기를 탈바꿈 시키고자 했지만 쓰레기 집하장 등의 시설로 둘러싸여 있어 접근성과 환경이 좋지 못했다. 이 때문에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는 인근의 서울역과 함께 노숙인들이 찾는 쉼터로 사용되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시, 중구청이 이를 해소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지상 공영주차장을 지하로 옮기고 쓰레기 재활용 집하장을 철거하는 등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지하에는 서소문 역사 박물관을 만들고 지상에는 서소문 역사공원을 조성해 2019년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지상의 공원에는 수많은 유명, 무명의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순교자 현양탑이 있으며 탑에는 44명의 순교 성인, 27명의 순교 복자, 30명의 순교자들의 명단이 기입되어 있다.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뚜께 우물>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노숙자 예수상>

과거 처형장에서 망나니가 사람을 죽이고 칼을 씻었다는 뚜께 우물 터 앞에서 캐나다 작가 티모시 슈말츠의 예수 조형물을 만나볼 수 있다. 과거 노숙인들이 자주 찾았던 공원이라는 점에서 더욱 많은 의미가 담긴 작업물이 아닐까 싶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처형당한 장소에 노숙자의 형상을 한 예수상, 오랜 시간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역사의 장면이 스쳐 지난다. 지하에는 조선인 최초의 신부가 되기로 결정되었으나 순교하여 꿈을 이루지 못했던 순교자 성 정하상 기념 성당과 역사박물관이 마련되어 있다. 박물관에서는 동학, 서학, 천주교 등 조선 후기 사상 관련 많은 전시물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지하 3층 하늘광장은 하늘이 보이며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모습이 장관이라 사진 명소로도 유명하다.

순례길을 걸으며 함께 살펴보기 좋은 명소, 서울시립미술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 있는 서소문동 37번지는 조선시대 평리원이라 불리던 재판소가 있던 곳이며 광복 이후 대법원으로 이용되다가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1928년 일제강점기, 이곳에 경성 재판소가 지어졌을 때는 고딕 건축 양식을 띄고 있었는데, 전형적인 고딕 건축 양식의 뾰족한 스타일을 사용하지 않고 둥근 아치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2002년 서울시는 이곳에 서울시립미술관을 개관하면서 독특한 형태의 전면부는 살리고 후면부만 철거 후 다시 지어, 근대식 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현양탑 />

<서울시립미술관 /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이렇듯 역사적 측면과 건축물 측면에서 가치를 모두 인정받은 서울시립미술관은 2006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237호로 지정되었고 서울의 대표 미술관으로 사랑받고 있다. 미술관 건물을 둘러싼 야외 정원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의미 있는 장소로, 정원의 비석을 살펴보면 이곳이 과거 육영공원, 독일 영사관, 독립신문의 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소 : 서울 중구 덕수궁길 61 서울시립미술관 / 문의 02-2124-8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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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공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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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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