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길라잡이

평화의 소녀상은 오늘도 진행되는 역사다

역사탐방 길라잡이 : 평화의 소녀상은 오늘도 진행되는 역사다
역사탐방 길라잡이 : 평화의 소녀상은 오늘도 진행되는 역사다
역사탐방 길라잡이 : 평화의 소녀상은 오늘도 진행되는 역사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주인공 옥분의 목소리를 빌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궁금증에 대해 이렇게 질문했다. ‘미안하다’ 그 말이 그렇게 어려운가? 극 중 옥분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인물은 고 김복동 할머니. 그녀를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역사탐방 길라잡이 : 평화의 소녀상은 오늘도 진행되는 역사다

<영화 스틸컷 - 아이 캔 스피크 (출처: 네이버 영화)>

군복 공장 일자리를 준다는 말에 속아
8년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소녀 김복동

역사탐방 길라잡이 : 군복 공장 일자리를 준다는 말에 속아 <br />
 8년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소녀 김복동

<영화 스틸컷 - 아이 캔 스피크 (출처: 네이버 영화)>

여성인권운동가, 나비기금 창시자, 여성인권 박물관 주춧돌 위원,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 수여자. 수많은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김복동. 하지만 우리가 그녀를 기억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고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10대 소녀였던 1940년, 군복 만드는 공장에 일자리를 준다는 말에 속아 따라나섰던 것을 시작으로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침략 전쟁을 벌이는 일본군에게 8년간 끌려다니며 고통받았다.

군복 공장 일자리를 준다는 말에 속아 <br />
 8년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소녀 김복동

<1944년 8월 14일 버마 미치나에서 미군의 심문을 받는 조선인 위안부의 모습 (출처: U.S Army)>

위안부 피해자들은 하루에 20여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을 뿐 아니라 강간, 폭행, 고문 등으로 고통받았다. 행여 임신이라도 하면 자궁째 태아를 떼어냈고 강제로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고 김복동 할머니에게도 지옥과 같은 시간들이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인 1992년, 할머니는 TV에서 위안부 피해가 있다면 신고해 달라는 뉴스를 보게 됐고 50여 년 만에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할머니는 신고를 말리던 친언니와 이 일로 크게 다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그다지 따뜻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싸늘한 대중의 시선에도 할머니는 굴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5시간 이상 대중교통을 타야 했지만 꼬박꼬박 서울 집회에 참석했고, 수없이 연행됐다. 할머니는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이하 정대협)에서 집회에 대한 연락이 오면 허름한 옷에 슬리퍼 차림도 서슴지 않고 곧장 서울로 달려와 선봉에 섰던 분이다.

(출처 : 『도심 속 상공인 마을: 도심 상공인들의 생활문화』)

<영화 스틸컷 - 아이 캔 스피크 (출처: 네이버 영화)>

진실은 언젠가 통하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할머니의 거침없는 폭로와 고백에 사람들은 점차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1993년 비엔나에서 열린 UN 인권위원회에서 증언한 것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 각국의 인권 무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키워드를 너무 어렵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풀어내 호평을 받았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멜버른까지. 단발머리 소녀상

삐뚤빼뚤한 단발머리, 꼭 쥔 주먹, 가녀린 맨발, 그리고 왼쪽 어깨에 올려진 새 한마리.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동상을 본적이 있는가? ‘평화비', ‘소녀상' 등으로 불리는 이 조형물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리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확립하기 위해 만들어진 ‘평화의 소녀상’이다.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총 240명 중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고, 지금은 오직 17명만 생존해 있다. 지금은 모두 할머니의 모습이지만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던 시절엔 소녀상의 모습과 비슷했을 것이다. 김서경, 김운성 부부 작가는 동상을 구상하며 소녀의 모습을 전쟁 당시 피해자들 나이대와 비슷하게 만드는 대신 바닥에 할머니 모습의 그림자를 만들어 의미를 더했다.

<세운상가아파트 (출처 : 국가기록원) />

<평화의 소녀상 (저작자: Yunho Lee)>

평화의 소녀상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진상 규명, 생존자 발굴은 물론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활 보호까지 힘쓰고 있는 단체인 정대협에 의해 기획되었고 국내 수십 개 도시, 국외 십여 개 등 곳곳에 세워졌다. 2011년 처음으로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곳은 서울 종로구 주 대한민국 일본대사관 앞. 그런데 왜 하필 이 장소였을까?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가 방한했다. 한창 정대협이 조직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기이다. 총리의 방한 소식을 접한 직후 정대협은 방한 자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총리 방한일에 맞춰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연 것이다. 집회의 요구 사항은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위안부' 진상 규명, 일본 국회의 사죄, 법적 배상, 역사 교과서 기록, 위령탑 및 사료관 건립 그리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시위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미야자와 총리는 참의원 연설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관련해 “마음속의 깊은 사과와 반성을 한다"라고 발언했다. 총리의 방한 이후에도 집회는 매주 수요일마다 계속됐다. 수요 집회는 1992년 1월에 시작된 이래 500회가 된 2002년 3월, 단일 주제로 개최된 집회로는 세계 최장기간 집회 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지금까지 매주 갱신되고 있다. 수요 집회가 1000회를 맞이한 2011년 12월 14일, 정대협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소녀상을 기획했고 매주 집회가 열리던 장소인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을 배치하기로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통감관저 터에 세워진 ‘기억의 터'
우리가 이곳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명동역 1번 출구에서 약 500미터. 퇴계로 26가길 6에서 ‘기억의 터'를 만났다. 기억의 터는 전쟁범죄의 피해자였지만 당당하게 평화, 인권 활동가로 활약한 고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메시지를 담아 서울시에서 조성한 추모 공간이다. 2015년 모금운동을 시작해 19,754명의 참여로 목표액을 달성했고, 그 기부금으로 이 공간이 세워졌다.

(출처 : 『도심 속 상공인 마을; 도심 상공인들의 생활문화』)

<일제강점기 통감 관저의 모습 (출처: 서울시)>

‘기억의 터’가 조성된 이 자리에는 한가지 사연이 더 있다. 우리 땅에 식민시대가 시작된 한일강제합병조약이 체결된 장소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1910년 민족반역자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은 지금 ‘기억의 터’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통감 관저 터에서 이 합병 조약에 조인했다. 이 사건으로 우리는 일제에게 군사를 비롯한 모든 편의 제공을 강요당했고, 토지와 인력을 징발당한 것도 모자라 위안부라는 씻어내기 힘든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출처 : 다시세운프로젝트 공식 사이트)

<기억의 터 기자회견 (출처: 기억의 터 홈페이지)>

이 터의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일제 강점기 이전인 조선시대엔 국사당이 있었다. 1925년 일제는 우리의 국사당을 철거하고 같은 자리에 일본의 국가 종교시설인 신궁을 세웠다. 또한 우리 국민들에게 신궁 참배, 천황제 사상을 강요하며 조선을 정신, 종교적으로 지배하기에 이른다.

  • 새 옷으로 차려입은 미지의 공간-2

    <기억의 터 (출처: 기억의 터 홈페이지)>

  • 새 옷으로 차려입은 미지의 공간-2

    <기림비 (출처: 기억의 터 홈페이지)>

그렇다면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기억의 터'는 어떤 모습일까? 세상의 배꼽, 통곡의 벽, 거꾸로 세운 동상, 대지의 눈 등 기발한 작품명이 보여주듯 심오한 의미를 담은 작품들이 이 터의 의미를 되새겨 주고 있다. 특히 손을 맞잡은 한국, 중국, 필리핀 세 소녀와 이들을 바라보는 김학순 할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한 기림비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동상을 기획한 작가 스티븐 와이트(Steven Whyte)는 세 소녀 중 두 소녀와 손을 맞잡을 수 있도록 한켠을 비워뒀다. 소녀들에게 손을 내밀고 맞잡아야 비로소 완성되는 형상을 의도한 것이다.

‘평화의 우리 집‘ 그리고 ‘나눔의 집'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공간으로 가장 대표적인 두 쉼터 ‘평화의 우리 집', 그리고 ‘나눔의 집'을 살펴보자. '평화의 우리 집' 일명 마포 쉼터는 2012년 명성교회로부터 무상임대 받아 조성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쉼터이자 거주공간으로 고 이순덕 할머니, 고 김복동 할머니도 생전에 마포 쉼터에서 지냈다.

<세운상가아파트 (출처 : 국가기록원) />

<나눔의 집 (출처: 나눔의 집 홈페이지)>

나눔의 집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삶의 터전이자 쓰린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역사관이다. 1992년 마포구 서교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고 이후 명륜동, 혜화동을 거쳐 1995년에 경기도 광주 퇴촌면 650여 평 대지에 180평 노인 주거복지시설을 신축하였다. 현재는 1,800평 부지에 생활관, 역사관, 사무동, 치료소 등을 갖추고 있으며, 지금까지 많은 할머니들이 이곳을 거쳐가셨고 지금은 다섯 분이 남아 계신다.

최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지원해온 시설과 관련한 뉴스로 그 진위 여부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 아픈 역사의 피해자로 긴 세월을 살아온 분들이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충분히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소녀상을 세우고 기억의 터를 조성하기까지의 과정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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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공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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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7-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