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흘리며 밭일을 하던 농부들의 고됨을 덜어주었던 우리의 전통주 막걸리.
찌그러진 막걸리 주둥이 사이로 졸졸졸. 농민들은 막걸리를 사발 가득 따라 마시며 삶의 무게를 견뎌냈다.
탁주라 불렸던 막걸리, 그 기록을 찾아서
우리 민족은 정확히 그 기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래 전부터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전엔 맑은 청주와 달리 탁하고 흐려 보인다는 이유로 주로 ‘탁주’라 불렸다.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막걸리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075~1084년에 편찬된 가야의 역사책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수로왕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요례’를 빚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요례에 쓰인 요(?)자는 탁주를 뜻하는 글자로 이것을 탁주류에 대한 첫 번째 기록으로 본다.
고려 시대까지도 막걸리는 제 이름을 찾지 못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은 북송의 사신 서긍(徐兢)이 1123년 고려를 방문해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역사서다. 서긍은 이 문헌에 “서민들이 맛이 떨어지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라고 기록했는데 이를 탁주, 즉 막걸리로 추정하고 있다. '막걸리'라는 이름이 처음 기록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작자 미상의 어휘사전 <광물재보(廣才物譜)>에서 ‘막걸니’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막걸리의 옛 표기로 마구 걸렀다는 뜻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쌀로 빚은 술 막걸리에서 쌀이 쏙 빠지게 된 사연은?
상업화를 이루기 전 한국의 쌀 막걸리는 소규모 가내 주조로 시작됐다. 양조장의 개념은 1909년 주세법 그리고 1916년 주세령과 함께 탄생했다. 주세의 대상이 되자 가양주 형태로의 주조는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1934년 가양주 면허제도 폐지를 시작으로 1995년까지 약 60년간 막걸리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주류 제조는 양조장에서만 이루어졌다.
마을 곳곳에서 생산되던 가양주가 사라져 아쉬워하던 서민들에게 다시 한번 시련이 찾아온다. 부족한 양곡을 보충하기 위해 정부에서 시행한 절미 운동 때문이다.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쌀 소비 억제 정책의 일환으로 막걸리 제조에 백미 사용을 전면 금지했고, 이로 인해 가격도 저렴하고 수급률도 좋은 밀 막걸리가 등장한다. 하지만 밀로 만든 막걸리는 쌀에 비해 맛이 떨어져 제대로 된 맛을 내지 못했다. 밀을 사용하며 맛이 떨어진 막걸리를 대신해 값이 싸고 빨리 취하는 소주가 ‘서민들의 술‘ 타이틀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1977년 쌀 수확량이 4천만 석을 돌파하고, 쌀 소비 억제 정책 전면 해제와 함께 쌀 막걸리 생산이 다시 시작됐지만 이미 막걸리의 자리는 소주로 대체된 뒤였다.
막걸리를 즐겨 마시던 대통령들
경제적인 문제로 막걸리 제조에 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긴 했지만 그 누구보다 막걸리를 사랑했던 박 전 대통령. 위스키를 마신 후에도 입가심으로 막걸리를 즐겼다고도 하는데, 그가 유독 사랑했던 막걸리는 경기도 고양의 ‘배다리쌀막걸리'이다. 1966년 능곡양조장의 배다리쌀막걸리를 처음 맛본 이후 14년간 청와대 비서실에 이 술을 조달하게 했다. 심지어 막걸리 주조에 쌀 사용을 금지시켰던 시기에도 청와대 납품 막걸리에는 그대로 쌀을 사용했으며 이를 비밀에 부쳤다고.
대통령이 마시는 술은 별도의 사양실에서 만들어졌다. 일주일에 한두 말 씩 워낙 많은 양을 조달하다 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청와대에 납품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부로 외부에 알릴 수 없었던 당시 박관원 대표는 스스로를 현대판 양온서(궁중에 술을 빚던 관청)에 비유하곤 했다. 배다리막걸리에 대한 박 대통령의 사랑은 김정일 위원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1999년 정주영 현대회장이 방북했을 때 김 위원장은 ‘박 전 대통령이 즐겨 마셨던 막걸리를 맛보고 싶다’며 직접적으로 배다리쌀막걸리를 언급해 요청했다.
능곡양조장은 현재까지도 배다리술도가라는 이름으로 5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2004년부터는 전통주의 역사와 유물들을 전시하는 배다리 술 박물관을 운영했다. 전통 방식으로 술을 내리는 체험을 제공하고 시음할 수 있는 카페도 마련돼 있었지만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약 10년 만인 2014년 폐관했다. 지금은 배다리술도가라는 이름의 주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막걸리를 사랑한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뿐이 아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취임 축하행사 ‘보통사람들의 밤'에서 서민들의 음식인 김밥, 순대, 어묵 등을 메뉴로 선택하고 버스 운전기사, 전화교환원, 음성나환자 등을 초대했다. 행사는 연회라기보단 잔치에 가까운 분위기였고 음식과 함께 막걸리, 소주가 곁들여져 이슈가 되었다.
2005년 농,산촌체험 관광마을인 충북 단양 한드미마을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내외. 고된 농촌 체험 후 새참으로 막걸리를 마셨는데 앉은 자리에서 여섯 잔이나 연거푸 들이켜 크게 화제가 되었다. 이 날 노 전 대통령이 너무나 맛있다고 극찬한 대강양조장의 대강막걸리는 이후 청와대 만찬주로 지정되었고 공식 만찬에 200여회 사용됐다.
대강양조장은 양조장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체험관과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사전 예약을 통해 술 빚기, 술 짜기, 시음, 양조장 견학 등의 프로그램을 만나볼 수 있다.
쉴 틈 없이 돌아가던 양조장 폐업부터 재생까지
현존하는 막걸리 양조장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곳은 경북 영양의 영양양조장이다. 앞서 언급한 단양의 대강양조장(1918년)보다 3년이 빠르고 지평 막걸리의 고향인 경기도 평택의 지평양조장(1925)보다 10년 이상 앞선다. 예부터 영양은 동,면마다 양조장이 있었을 정도로 막걸리 생산량이 많았다. 담배와 고추 농사로 봄부터 가을 농번기까지 일꾼들이 붐비는데 이때 이들의 목을 촉촉이 적셔주기 위해 생겨난 것이라 추정된다.
그 중에서도 영양양조장은 일제 시절부터 성업을 이루었던 대형 양조장이었다. 그 증거로 양조장 문기둥에 있는 6이라는 숫자를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영양지역 전체에는 전화기가 딱 10대뿐이었다. 10대 중 1번부터 5번은 관공서였고 그 바로 다음인 6번이 바로 영양양조장의 번호인 것이다. 그만큼 영양 경제에 이 양조장이 차지한 비중이 높았다는 뜻이 아닐까?
아쉽게도 영양양조장은 2018년 말 경영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폐업을 신청했다. 하지만 10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문을 닫은 양조장에 희망이 드리운다. 정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되며 다시 양조장을 가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양군은 2020년 말 영양양조장의 문을 다시 여는 것을 목표로 전국 유통망을 확보하고 생산시설을 정비하기로 했다. 또한 기존 양조장 시설을 고쳐 제조 체험장과 제조장 역사 자료 전시 관람실로, 양곡창고를 청년 주막 등으로 꾸며 청년들의 창업 공간으로 재탄생시킬 예정이다.
막걸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소비자 취향이 다양해지면서 새로운 스타일의 막걸리가 등장하고 있는데, 신개념 막걸리에 도전하고 우리의 술 막걸리에 대한 관심을 넓혀보자.
아메리카노와 막걸리가 만났다. 커피의 쌉쌀함에 부드러운 막걸리가 섞여 커피 마니아들과 막걸리 마니아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캔에 담겨있어 맥주처럼 편리하게 마실 수 있는 것도 큰 장점.
쌀뜨물처럼 뽀얀 기존의 막걸리들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제품이 나타났다. 과실이 들어간 것도, 색소를 첨가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붉은색을 띠는 누룩곰팡이와 홍국쌀을 사용해 짙은 빨간색을 냈다.
호랑이 배꼽이 생산되는 양조장은 경기도 평택에 위치해 있다. 한반도를 호랑이 모양으로 봤을 때 평택은 배꼽 정도의 위치에 있어 이와 같은 귀여운 이름과 패키지 디자인을 고안했다.
느린마을 양조장은 매장에서 직접 만든 막걸리와 안주를 제공하는 주점이다. ‘사계’는 막걸리의 숙성도에 따라 4종류로 분류해 계절을 이름 삼아 부르는 막걸리 라인업이다. 1-2일차는 봄, 3-5일차는 여름, 6-7일차는 가을, 8-10일차는 겨울이라 칭한다.
쌀로 빚은 술에 바나나를 넣은 국순당 쌀 바나나는 탄산이 더해진 바나나우유와 비슷한 목 넘김을 자랑한다. 살얼음이 낄 정도로 차갑게 마시면 밀키스, 사이다 못지 않은 달콤함과 청량함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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