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나무나 동물 이름 서너 개쯤 끼워 넣어보라. 느티나무보다는 이팝나무가, 강아지보다는 고양이가 시적이다. 쌀가루처럼 날리는 이팝 꽃잎들이 이마를 스칠 때, 산책길에 불쑥 끼어든 길냥이의 양쪽 눈동자색이 다른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시간은 돌이 된다. 그런 시간의 결정(結晶)을 시는 공깃돌처럼 건넨다.
소설적인 글을 쓰려면? 먹는 얘기나 어디가 아픈 얘기를 넣어보라. 살리는 힘이 죽이는 힘, 거두어 먹이는 힘이 거두어들이는 힘임을 보여주라. 메멘토 템푸스. 시간을 기억하라. 시가 시간을 일시정지시키는 양식이라면, 소설은 잊고 있던 시간의 존재를 2배속 빨리 감아 상기시키는 양식이다.
창조 씨와의 두번째 만남은 시적이었던가 소설적이었던가. 일단은 먹는 얘기로 시작됐다. 창조 씨 쪽에서 정한 약속 장소는 연남동 인근의 한 중식당이었다. ‘음식남녀’. 중국 요리 4대 셰프 중 한 명이 직접 운영하는 핫플레이스라고 했다.
“왜 하필 평일 점심이야? 저녁이면 같이 볼 수 있는데.”
아내가 식당 리뷰를 훑어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바쁜 사람이잖아.”
날짜와 시간을 정한 건 나였다. 출퇴근 시간에는 지하철을 타지 않는 게 나의 철칙이다. 하지만 구옥 이층집을 갤러리풍으로 개조한 그곳에서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은 화장실에 갈 타이밍뿐이었다. 입구에서 창조 씨 이름을 대자마자 목조 계단을 올라 2층 맨 안쪽 별실로 안내받았다. 미리 주문해두었는지 요리들이 알아서 착착 나왔다. 창조 씨는 자신이 만든 것처럼 레시피까지 훤히 꿰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요리 이름도 맛도 아닌 창조 씨의 시선뿐이다. 한 시간 남짓한 식사 시간 동안 창조 씨와 눈을 마주친 기억이 없다. 나무위키 뺨치는 입심으로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답지 않게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는 순간이 거의 없었다. 내 의사를 물을 때도 어깨 너머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했다. 단둘이 마주 앉았다기보다 주목하는 시선들에 둘러싸인 사람 같았달까.
“소설 쓰는 분들 보면 막 신기하고 대단하고 그렇습니다.”
창조 씨는 내 양어깨 너머로 번갈아 눈길을 두며 말했다. 나 말고 다른 소설가들이 거기 와 있기라도 한 듯.
“책도 세 권이나 낸 작가님이시면서.”
“작가야 소설 쓰는 분들에게나 어울리는 호칭이죠. 완전히 없던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잖아요.”
“태양 아래 새로운 게 있나요? 없던 걸 발명하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재발견할 뿐이죠. 중요한 건 대상이 아닌 관점이에요.”
“저도 소설을 쓸 수 있을까요?”
창조 씨가 쑥스러워하는 얼굴로 물었다.
유일하게 창조 씨와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최 셰프님, 이분이 스물두 살에 엄청난 작품을 쓰신 분이에요.”
내 이름도 모르는 셰프 앞에서 괜한 비행기를 태울 때부터 편치 않았다. 주방으로 복귀한 줄 알았던 셰프가 A4 용지와 네임펜을 들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벽면을 가득 메운 방문 기념 사인들은 가히 명예의 전당이었으니.
당숙뻘 되는 일가 어른 부탁으로 고향의 한 서점에서 사인회를 연 적이 있다. 서점 주인이 조카사위라고 했던가. 내 스냅 사진이 큼지막하게 박힌 플래카드 아래 두 시간 넘도록 버티고 있었지만, 흘끗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뿐이었다. 말을 건넨 손님이 있기는 했다. 문구 코너에서 나를 곁눈질하던 한 아이. 바람 풍 자가 또렷이 찍힌 『마법천자문』을 가슴에 꼭 안고 다가와 물었다.
또렷이 찍힌 『마법천자문』을 가슴에 꼭 안고 다가와 물었다.
“아저씨 유명한 사람이에요?”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했을까. 사인 용지에 바람 풍 자만 계속 끄적거리는 대신에.
“그럼 저랑 바꿀래요?”
나는 창조 씨를 똑바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
도움을 베푼 대상에 애정이 생기듯 갚을 길 없는 은혜는 복수심을 낳을 수도 있다.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마련한 자리가 빚을 더 늘리고 말았다.
“임창조 작가님이랑 오셨죠?”
카운터 직원이 내가 건넨 신용카드를 그냥 돌려줬다.
“미리 결제하셨나요?”
“인스타에도 매번 올려주시는데……”
“계산 안 했으면 이걸로 해주세요.”
나는 신용카드를 다시 들이밀었다.
“제가 공짜로 먹은 적이 있던가요?”
언제 다가왔는지 창조 씨가 직원에게 물었다.
“당연히 없으시죠.”
직원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차 안 가지고 오셨어요?”
주차장으로 향하던 창조 씨가 작별 인사를 건네려는 나를 돌아보았다.
“소설 쓰려면 사람들 구경도 좀 해야죠.”
창조 씨가 차 키를 만지자 주차장 한편에서 아우디가 삑 소리로 화답했다.
“그럼 지하철역까지 태워드릴게요.”
그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운전석에 올랐다.
“벤틀리는 견적이 얼마 나왔어요?”
안전벨트를 매며 내가 물었다.
“작가님 책 몇십 쇄는 찍어야 할걸요.”
별 뜻 없는 농담이었겠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비릿한 반감이 꿈틀댔다.
“얼만데요?”
나는 정색하며 물었다.
“잇 더슨 매터.”
영국 유학파라고 했던가. T를 강조하는 발음이 거슬렸다. 중요하지 않다고? VIP.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영문 약자가 이름이나 다름없는 사내에게 중요한 문제란 대체 뭘까. 그런 게 있기는 할까.
“수리비 내게 해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와 달리 맥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당혹스러웠다.
은혜가 복수심을 불러일으키는 건 부채감 때문만은 아니다. 갚을 수 없다는 무력감이 더 치명적이다.
“그럼, 부탁 하나 들어주실래요?”
창조 씨가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
“어땠어?”
그날 저녁, 퇴근하기 무섭게 아내가 물었다.
“뭐가?”
“뭐긴 뭐야.”
“눈을 똑바로 안 맞추더라고. 내 옆에 누가 앉아 있나 싶었다니까.”
“물병자리 맞네. 늘 딴 세상에 가 있는 사람들이거든. 다윈도 갈릴레이도 물병자리야.”
“별자리까지 알아봤어?”
“셀럽은 포탈 인물 정보에 생년월일까지 뜨잖아.”
“딴 세상 사람 맞더라고. 나랑은 다른 자기만의 세상.”
“그래도 한 번 쳐다보면 꿰뚫어보는 것 같지 않았어? 자기랑은 안 맞았을 거야. 물병자리랑 사자자리는 상극이거든.”
그즈음 아내는 별자리 공부에 빠져 있었다. 내 소설이 안 팔리는 것도 너무 사자자리처럼 쓰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자처럼 작중인물 위에 군림하려 들지. 피조물들을 조종하는 창조주처럼. 창조 씨 글을 봐. 공기의 별자리답게 가볍고 부담 없이 읽히잖아.”
“사자자리라서 자기중심이 확실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나는 무리에서 쫓겨난 늙은 수사자럼 툴툴거렸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세계 문학사라는 기념비에 새겨질 문장이 한 줄 있다.
‘세상에! 저이는 귀가 어찌 저렇게 생겼을까?’
무도회에서 만난 청년 장교에게 마음을 빼앗긴 ‘안나’가 역으로 마중 온 남편을 보자마자 떠올린 생각. 남편과의 연애 시절 안나는 바로 그 귀에 매혹되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유와 버리는 이유가 다르지 않다. 우리를 끌어올린 힘이 우리를 추락시킨다. 희랍 비극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공포와 연민이라는 양날의 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공포요,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나를 비껴갔기에 연민이다.
“명왕성도 태양계에서 퇴출되는 마당에. 시대에 맞출 줄도 알아야지.”
아내가 최후의 처방을 내리듯 말했다.
가볍고 부담 없는 글? 내게 소설을 그만 쓰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소설의 진짜 안타고니스트는 시간이다. 돈키호테의 적은 풍차가 아니라 시간. 안나를 달려오는 기차 바퀴로 떠민 것은 연인의 변심이 아니라 시간. 시간은 성실한 정원사처럼 가장 맹렬히 솟구치는 생의 역동만 정확히 잘라낸다. 소설이란 결국 냉철한 가드닝의 기록. 제아무리 정밀하고 아름다운 묘사도 시간을 붙들려는 노력이 가망 없다는 진실을 환기할 때만 의미 있다. 먹고 사랑하며 죽음에 맞설 때 전부를 털리는 쪽은 자연이 아니라 먹고 사랑하며 죽음에 맞서는 인간 자신. 시간이라는 판관은 어김없이 자연의 손을 들어준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소설이 할 일은 저 보이지 않는 파괴자이며 창조자인 시간의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 태양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을 위해 값싼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 아니, 태양계의 변심 앞에서도 안색이 흐트러지지 않는 명왕성이 되는 것.
보라. 이것이 바로 사자자리만이 쓸 수 있는 위엄 가득한 글. 물병자리는 감히 흉내도 못 낼 불의 글쓰기.
나는 오후 내내 『아웃사이더』를 읽고 있었다. 젊은 수사자의 글쓰기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책.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일본식 표현 아닌가요?”
갑자기 그 책을 꺼내든 건 차에서 내리기 직전 창조 씨가 불쑥 건넨 한마디 때문이었다.
“네?”
“사인본 받은 김에 『아웃사이더』를 다시 읽어보니 습관적으로 쓰시더라고요. 예의 무엇, 무엇에 다름 아니다, 누구에게 있어 무엇은…… 다 일본식 표현인 거 모르세요?”
나는 조수석 문을 열려다 만 채로 창조 씨를 돌아보았다. 명색이 국문학 전공자인데, 일본식 표현이라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창조 씨의 눈길은 정면 창 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다른 사람은 접근도 못 할 자기만의 유리 벽 안에서.
*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뭔가를 태우곤 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때마다.
첫 발화점은 내 나이 열일곱 어느 여름날이었다.
*
『아웃사이더』의 빛바랜 종이를 더 넘겨볼 필요도 없었다. 창조 씨가 지적한 표현이 첫 문장부터 튀어나올 줄이야.
나는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검색창에 일본식 표현이라고 입력했다. ‘누구에게 있어 무엇은’ ‘무엇에 다름 아니다’ ‘예의 무엇’은 일본식 표현인 것 같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한일 번역기를 돌려봐도 번역된 일본어를 읽을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재킷도 벗지 않은 채 몇 시간을 씨름하고 있자니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호기심에 불을 댕기는 폭발적 도입부에 찬물을 끼얹어도 유분수지. 문학작품을 어학 논문 자료 취급하다니.
어학 박사를 딴 대학 동기에게 전화했다. 주격조사 어쩌고저쩌고에 대한 화용론적 연구. 창고 어딘가에 쑤셔 박혀 있을 박사논문 제목은 가물가물해도, 『아웃사이더』 초고를 보여줬을 때 사용 빈도가 높은 낱말 열 개를 추려온 기억은 또렷했다. 복수, 불현듯, 심연, 떠올랐다, 한기. 또 뭐더라.
“‘이유’라는 명사에 처소를 의미하는 조사 ‘에서’가 붙는 게 어색하지만 ‘무슨 마음에서’처럼 쓰기도 하니까 틀리다고 단언하기는 어렵고 ‘-ㄴ지’는 조사에 붙여 쓸 수 없어서……”
“그래서 일본식 표현이라는 거야 뭐야?”
동기의 말을 계속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국문과 교수 맞아?”
“동아시아 문명학부로 바뀐 지가 언젠데. 작가라는 놈이 세상 물정에 그렇게 어두워서야.”
불혹을 넘겨도 나에 대한 견제 심리는 여전했다.
“얘가 결핵으로 대학 첫 학기를 통째 쉬어서 뭘 몰라요.”
약대 여학생들과 가진 미팅에서 나를 두고 했던 말도 잊을 수 없다. 그 한마디 덕에 머릿수 맞추려 나온 아내의 관심을 끌게 됐지만. 결핵이라는 단어에 움츠러든 여학생들 속에서 무슨 약을 어떻게 먹었는지 예후는 어떤지 물어준 사람은 아내뿐이었다.
─국문과 교수로 있는 친구가 일본식 표현이 아니라는데요.
나는 창조 씨에게 카톡을 보냈다.
『아웃사이더』를 끝까지 읽은 뒤였다. 문제의 표현이 몇 번이나 쓰였는지 센 것은 아니었다. 몇 장 읽다 보니 점점 빠져들어 중간에 놓을 수 없었다. 저주받은 데뷔작은 저주받은 걸작이었다. 다시 쓸 수 있을까. 용암처럼 솟구치는 이런 소설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그분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던 황홀경을. 휴화산이 된 내게 필요한 건 물병이 아니라 번개탄의 불꽃이었다.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를 연재 소설의 제목을 끝내 정하지 못한 나였다, 고민 끝에 내 이름 석 자를 적어 넣고 말았다.
“이름을 걸고 연재에 임하겠다는 각오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장편소설 『황유목』. 내가 창조 씨처럼 이름 자체가 브랜드인 작가라면 농담만은 아니었겠지. 제목은 소설 창작의 씨앗. 씨앗이 제힘으로 땅속 어둠을 뚫고 올라와 꽃 피우고 열매 맺듯 작가는 제목이 품은 에너지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한다. 하지만 황유목이라는 씨앗은 황무지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정체 모를 씨앗이었다. 싹이나 틔울지도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의 끓는점』 『너무 애쓰지 않는 하루』 『오른손이 모르게 왼손이 하는 일』. 침대에 누워 오른발이 모르게 왼발로 끼적인 것 같은 글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판국에 마음 끓이며 애써 소설 같은 걸 쓰면 뭐하나 싶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죽이는 아이템이 서너 개쯤 있었던 것 같은데 접촉 사고 이후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가볍고 부담 없이 아무거나 써도 되는 창조 씨는 얼마나 속이 편할까. ‘음식남녀’ 요리 품평을 늘어놓으면 미식가로 칭송받고, 접촉 사고를 그냥 넘어가준 얘기를 쓰면 미담으로 칭송받겠지.
창조 씨는 대꾸가 없었다. 노란 말풍선 앞 1자가 곧바로 사라진 걸 확인했지만 두 시간째 묵묵부답이었다.
─글쿠나. 국문과 교수님이 아니라면 아니겠죠. 참! 작가님도 국문과 나오셨죠?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는 척해서 죄송합니다. ^^
기다리던 카톡 알림음이 울린 건 막 잠이 들려는 참이었다. 무려 네 시간 만에 온 반응은 즉답처럼 선선한 말투였다. 저런 게 물병자리 특성인가. 나와는 다른 세상,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작가소개
김경욱소설가
199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중편소설 「아웃사이더」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베티를 만나러 가다』 『위험한 독서』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 중편소설 『거울 보는 남자』, 장편소설 『황금 사과』 『동화처럼』 『야구란 무엇인가』 『개와 늑대의 시간』 『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980년대 우순경 사건을 다룬 스릴러 소설 『개와 늑대의 시간』은 부산국제영화제 북투필름 피칭작으로 선정되어 국내 영화사에 판권이 판매되었고 제작을 대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