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다채로운 빛깔의 작은 사각형이 타일처럼 빽빽하게 채워진 독특한 그림이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파르나소스 산으로>.
스위스 출신의 화가 파울 클레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파르나소스’는 그리스 델포이에 위치한 산의 이름인데,
파울 클레는 왜 그리스의 산을 이토록 화려한 모습으로 담아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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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스위스 베른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 출신의 음악학교 교사였고, 어머니는 스위스 출신의 성악가였기 때문에 그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가까이 했고, 7세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해 11세 때는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클레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음악이 아닌 미술을 선택한다. 음악은 이미 그 정점을 경험했지만 미술은 앞으로도 해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화가로서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늘 수입이 불안정했기 때문인데, 결국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가 레슨을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고, 클레는 집안일과 육아를 맡으며 어렵게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초기에는 드로잉과 동판화 제작에 몰두하던 클레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 계기는 1914년 떠난 튀니지 여행이었다. 튀니지의 다채로운 색과 빛에 압도당한 그는 이후 스스로를 화가로 칭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클레에게 색채는 질서가 있는 우주의 영역을 의미했기에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습득해 자신만의 색채 이론을 완성해나간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클레 역시 징집이 되는데, 다행히 공군 보충병으로 배치되어 항공기에 페인트칠을 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클레의 작품은 점차 인정을 받으며, 많은 작품을 판매한다. 하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했던 클레는 바우하우스의 교수직으로 일한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의 주도로 만든 미술 아카데미와 공예학교를 합친 교육이관으로, 조각, 회화 등의 순수미술과 공예와 같은 응용미술을 통합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클레는 이곳에서 자신의 미술이론을 체계화한 수업을 진행하며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이 시절 클레는 기법, 모티브, 주제의 다양화를 꾀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음악과 미술을 접목하려는 시도였다. 여러 가지 색을 겹쳐 칠함으로써 음악에서 여러 음이 동시에 울리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강의와 작품활동을 병행하던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2주 간격으로 수업을 한다는 이유로 동료, 학생들과 갈등을 겪게 되고, 결국 1931년 뒤셀도르프 아카데미로 자리를 옮긴다. 이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학교에서 제공한 아틀리에에서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할 수 있게 된 클레.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예술을 형상화한 <파르나소스 산으로>라는 위대한 명작이 탄생한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당시 독일에 나치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인데, 나치는 그의 작품을 ‘퇴폐적 예술’로 치부했고, 유태인 미술상과 거래한 그를 유태인으로 의심하기까지 한다. 1933년 클레는 결국 학교에서 해고를 당하고, 고향인 스위스 베른으로 돌아간다. 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따라 독일 국적이었던 클레는 귀화 신청을 했지만 당시 보수적인 스위스 정부 역시 진보적인 예술가 클레를 ‘퇴폐작가’라 비난하며 이를 거절한다. 그 와중에 클레는 불치병에 걸려 크게 건강이 악화되고, 작품활동도 위축된다. 이후 7년이 지나고 나서야 스위스 정부는 그의 귀화를 허락하지만 클레는 그 소식을 듣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한다. 자신의 고향에서 이방인으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이미지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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