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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의 정신적 아버지, 마네

인상파의 정신적 아버지, 마네 인상파의 정신적 아버지,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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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의 정신적 아버지, 마네 인상파의 정신적 아버지, 마네

전통적인 그림을 거부한 마네의 선택

에두아르 마네는 다른 가난한 화가들과는 출신부터 달랐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여느 화가들처럼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유산을 상속받아 풍족한 생활을 했고, 그림을 팔기 위해 고객이 원하는 대로 맞춰서 그릴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좋은 환경 속에서 마네는 전통을 고수하는 한 화가에게 6년간 수학하며 그림의 기초를 쌓았지만 전통적인 그림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그런 마네가 1863년에 그린 두 작품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는 모더니즘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미술사에 큰 획을 긋는다.

비난의 중심에 선 화제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스페인식 의상을 입은 두 중년의 신사와 나체의 여인이 풀밭에서 점심 식사를 하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작품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등장 인물들은 마네의 동생과 지인, 아끼던 모델이었다. 당시 중산층들은 센 강가에서 피크닉을 자주 즐겼는데, 그 자리에 비너스도 아닌 실제 살아있는 여인이 누드로 앉아 있다는 것은 관람객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고전적인 주제에 아름다운 몸매의 여신처럼 등장하는 것이 아닌, 평범한 여인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 또한 평론가들을 화나게 했다. 또, 그림 속 여인은 관람객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신화 속 여성도 아닌 실제 여성이 누드로 관람객을 빤히 바라보는 것은 모두에게 큰 불편함을 주었다. 마네는 이 작품을 당시 예술가들에겐 유일한 등용문이자 권위 있는 전시회인 국전에 출품했으나 떨어졌다. 이곳의 심사위원들은 전통을 가장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위적인 그림은 원치 않았다. 주제도 신화나 종교, 역사 순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 때문에 떨어진 젊은 예술가들은 국전의 심사 기준이 늘 불만이었고, 1850년대부터는 아예 국전에 출품하지 않는 예술가도 급격히 늘어났다. 예술가들의 불만이 커지자 나폴레옹 3세는 이를 받아들여 국전에서 떨어진 작품을 소개하는 ‘낙선전’을 별도로 개최했다. 낙선전은 국전을 통하지 않고 파리 미술계에 자신을 알리는 등용문이 되었는데, 마네의 작품도 낙선전을 통해 소개되었다. 하지만 당시 이 그림은 앞서 설명한 이유들로 인해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게 된다.

명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파격의 <올랭피아>

황제는 마네의 작품을 보고 “뻔뻔스러운 그림”이라며 비난을 했고, 반면 사람들은 이 문제작을 보기 위해 전시장 밖까지 줄을 섰다. 이렇게 비난을 받았으면 겁에 질려 포기할 법도 하지만 마네는 보란 듯이 더욱 충격적인 그림을 내놓는다. 그 작품이 바로 <올랭피아>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그린 지 몇 달 만에 완성한 대작으로, 과거의 명작에서 구도를 빌려왔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에서 받은 영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구도만 비슷할 뿐 모든 것이 달랐다. 여성을 상징하는 비너스 대신 벌거벗은 모델이 침대에 누워있고, 흑인 하녀를 옆에 세웠다. 그런데 ‘올랭피아’는 당시 성매매 여성들이 흔히 사용했던 이름이다. 마네는 <올랭피아>가 성매매 여성이라는 점을 그림 속에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여인의 발 끝에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세우고 있는데, 이는 성적인 표현이었다. 목에 걸린 벨벳 목걸이 역시 성매매 여성의 표시였다. 사람들은 “색의 조합이 매우 추하고 못 그렸다.” “왜 저런 여성을 그림에 등장시켰냐”며 비난을 일삼았다. 주로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은 것이다. 앞에선 신사인 척 하면서 뒤에서는 성매매를 일삼는 사람들에게 분명 불편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지켜낸 거장, 에두아르 마네

마네는 대중의 심한 비난에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오직 자신이 본대로 그리겠다고 말했다. 한편으로 마네는 굉장히 독특한 인물이기도 했는데, 국전에는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면서도 예술적 전통을 깨는 일에 거침이 없었다. 모델의 포즈, 강렬한 색채의 대비, 회화적 표현에서 전통적인 주제를 파괴했다. 그런 까닭에 마네의 작품은 언제나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 그림들에 대해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전통에 반대하는 젊은 화가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조금씩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 그림들의 방향을 잡아줄 주창자가 필요했다. 그들은 마네의 정신을 높이 샀고, 그의 작업실에 모여 예술에 대해 토론했다. 그들 중 다수가 현재 ‘인상파’라 불리는 화가들이다. 즉 마네는 인상파의 정신적 아버지인 것이다. 마네의 그림에 대한 비난은 과거의 전통에 벗어난 혁신적인 기법과 구도를 이뤄낸 것을 당시 대중과 비평가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현재는 전통적인 주제와 현대적 감각을 조화시켜 새로운 그림을 그린, 모더니즘의 문을 열어준 존재로 미술사에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거장이 되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생각, 비난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마네의 삶이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정우철

정우철

EBS 클래스 e 도슨트 정우철의 미술극장
<알폰스 무하>, <툴루즈 로트렉>, <앙리 마티스> 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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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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