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입 미술관

인상파의 거장, 클로드 모네

인상파의 거장, 클로드 모네 인상파의 거장, 클로드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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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의 거장, 클로드 모네 인상파의 거장, 클로드 모네

하늘의 왕, 외젠 부댕을 스승으로 맞이한 모네

클로드 모네는 1840년 상인이었던 아버지와 음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탐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도전정신과 인물의 특징을 포착하는 재능을 타고났다고 한다. 그는 학창시절, 틈만 나면 친구들과 선생님의 특징을 포착해 캐리커쳐로 그리곤 했다. 당시 그가 그린 그림들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는데, 모네는 자신이 그린 캐리커처들을 팔아 용돈벌이를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러한 모네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스승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하늘의 왕’이라 불렸던 화가 외젠 부댕이다. 부댕은 ‘외광파’ 화가로 분류되는데, 이는 말 그대로 밖으로 나가 빛을 받으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말한다. 놀랍게도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은 풍경화조차도 실내 작업실에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색마저도 배운 그대로 그리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부댕은 달랐다. 모네에게 밖으로 나와 자연의 풍경을 직접 보고 그릴 것을 강조하며, 실내에서 그린 풍경은 닫힌 그림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부댕의 영향을 받은 모네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부댕은 제대로 보고 이해하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전통적인 방식의 그림 그리기에 반기를 들다

새로운 예술세계에 눈을 뜬 모네는 당시 모든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공부하며 훗날 인상파 화가로 활동하게 되는 카미유 피사로와 르누아르 같은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파리생활은 답답함 그 자체였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그림은 전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림의 주제는 신화나 역사, 종교와 관련된 것이어야 했고, 인물화는 전부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으로만 그려야 했다. 또, 풍경을 실내에서 그리는 방식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모네는 자신만의 예술을 위해 이 모든 전통적 방식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왜 모두가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새로운 예술을 위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모네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그의 역작 ‘인상, 해돋이’를 완성시킨다.

비난과 야유, 조롱과 멸시 속에서 탄생한 인상주의

1872년, 모네가 그린 한 편의 그림으로부터 ‘인상주의’라는 위대한 이름이 탄생한다. 그는 해안을 바라보며 붉은 해가 뜨는 모습을 그렸는데, 모든 형태가 또렷하지 않다. ‘인상, 해돋이’라는 제목에 답이 있다. 완벽하게 구성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닌, 눈 앞에서 변해가는 풍경의 인상을 빠르게 그린 작품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평론가와 대중들은 모네의 이 그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비난과 야유가 쏟아졌고, 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게 뭐야? 미완성 그림인가? 정말 못 그렸군. 제목처럼 정말 인상만 그렸네.” 아이러니하게도 인상주의는 이렇게 태어났다. 인상주의는 원래 조롱과 멸시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네는 수많은 비난 속에서도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그림, 대중이 원하는 그림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 예술가로서 자신이 가는 이 길이 바로 그림이 가야 할 미래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사람들의 무시와 조롱에 모네의 그림은 좀처럼 팔리지 않았고,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 사채업자들이 찾아오기 일쑤였다. 결국 모네는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아름다움의 대명사가 된 모네의 작품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모네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모네의 곁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여인 까미유가 있었다. 그녀의 응원 덕분에 흔들리지 않고 화풍을 계속 발전시키고, 전시도 꾸준히 열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서서히 모네에게 호평을 보내는 평론가들이 등장했고, 그림도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사진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의 전통적인 그림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사람들은 새로운 그림의 필요성을 느꼈고,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에게서 그림이 가야 할 새로운 미래를 보게 된다.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내 카미유가 아이를 낳고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슬픔에 잠긴 모네는 눈을 감은 아내의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붓을 들었다. 그리고 메달과 함께 붉은 꽃을 안겨주고,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그렸다. 이후 모네의 그림은 온통 우울함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모네는 결코 무너지지 않고 아픔 속에서도 계속해서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대중의 비난을 받던 그의 그림은 이제 아름다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대중이 내 작품을 두고 왈가왈부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인생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것이다.”

모네가 생전에 남긴 이 말이야말로 어쩌면 시대를 초월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말이 아닐까.

정우철

정우철

EBS 클래스 e 도슨트 정우철의 미술극장
<알폰스 무하>, <툴루즈 로트렉>, <앙리 마티스> 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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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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