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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는 1884년 이탈리아의 리보르노에서 태어났다. 가죽과 석탄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많은 부를 축적했지만 모딜리아니가 태어날 즈음 경기침체로 인해 파산한다. 어머니는 교양과 문학, 매너 교육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었는데,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예술에 뛰어난 지식과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를 평생 괴롭힌 것이 있었으니, 바로 건강 문제였다. 14세 때는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사경을 헤매던 모딜리아니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가고 싶다거나, 화가가 되고 싶다는 헛소리를 계속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아들의 병이 나으면 꼭 피렌체에 데려가겠노라고 약속한다. 이후 모딜리아니는 조금씩 건강을 회복했고, 어머니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들을 데리고 로마와 피렌체의 미술관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모딜리아니는 르네상스 거장들의 수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때의 기억이 훗날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는 특히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고 전해지는데, 모딜리아니 스타일이 그대로 담겨있는 작품 <부채를 든 루나 체코프스키>를 보더라도 주인공의 얼굴과 턱 라인, 밑으로 내려가는 어깨 라인이 마치 비너스의 몸에 옷을 입힌 듯 유사하다.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게 된 모딜리아니는 피렌체에서 처음으로 미술교육을 받게 되는데, 여기서 독특한 점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국립미술학교에 보내지 않고 좀 더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인 사립미술학교를 보냈다는 점이다. 당시 보수적인 분위기의 국립미술학교는 여성을 받지 않았다. 누드화를 그릴 때도 포즈와 구도가 이미 정해진 양식이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딜리아니가 다닌 사립학교는 여성들에게도 균등한 기회를 줬고, 누드화 역시 자유로운 포즈를 허용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림을 배운 모딜리아니는 어느새 자유로운 청년으로 성장했고, 이제 피렌체를 떠나 당시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향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는 ‘20세기 최고의 미남화가’라 불릴 만큼 미모가 매우 출중했다. 모딜리아니가 파리로 떠나던 날, 그의 동네에 살고 있던 여성들이 떠나는 모딜리아니의 뒷모습을 보고 함께 울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파리에 도착한 모딜리아니는 피카소, 디에고 리베라 등의 거장들을 두루 만나며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인상파, 입체파, 야수파와 같은 기존의 사조를 따라가지 않고 본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한다. 이를 단독사조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당시 모딜리아니의 스타일을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림이 판매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계속해서 가난 속에 살게 되었고, 술과 마약의 유혹에도 빠지게 된다. 그런 모딜리아니를 친구들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언제나 아는 것이 많고 매너가 좋은 모딜리아니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친구 모딜리아니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조금씩 돈을 모아 그의 전시회를 열어주기로 한다. 1917년, 모딜리아니는 그를 아끼는 친구들의 노력으로 생애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모딜리아니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전시회였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난 직후 누군가 전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그의 전시회를 홍보하는 포스터가 풍기문란으로 신고를 당한 가운데, 그가 그린 누드 그림들은 현장에서 전부 압수당한다. 모딜리아니와 갤러리 주인 역시 체포되었고, 그의 작품들은 한 순간에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모딜리아니 이전에도 수많은 화가들의 누드화가 존재했는데 왜 유독 모딜리아니에게만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의 누드화는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일종의 포르노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이전의 누드화는 그리는 이유가 분명했다는 점이다. 주로 그리스 신화, 영웅 설화 속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비해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반 여성들이 등장한다. 게다가 그림 속 여성이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누워 있으니, 이 역시 당시의 관람객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는 이전의 누드화들은 체모를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성의 몸은 비율과 조화로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지 실제 여성을 벗겨놓고 그것을 즐기는 건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런데 모딜리아니의 그림에는 이러한 것들이 그대로 다 표현되었고, 이로 인해 더욱 음란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모딜리아니는 성공의 기회를 놓치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난 속에 살아야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문제가 된 그의 누드화가 훗날 엄청난 가격에 판매되었다는 사실이다. ‘누워있는 나부’라는 제목의 두 작품은 각각 1,680억 원, 1,972억 원에 판매되며 모딜리아니 작품들 가운데 가장 높은 판매가를 기록했다. 한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그 시대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모딜리아니의 삶은 우리에게 그저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정우철
EBS 클래스 e 도슨트 정우철의 미술극장
<알폰스 무하>, <툴루즈 로트렉>, <앙리 마티스> 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