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하루> 제6화

삶의 여정 속 겪는 다양한 감정을 탐구한 김엄지 작가 소설 삶의 여정 속 겪는 다양한 감정을 탐구한 김엄지 작가 소설

하늘은 부옇게 흐리고 오래 바라보면 눈이 부셨다. 젖은 구름이 빠르게 움직였다. 가끔 비가 내리고 바람은 내내 세게 불었다. 길바닥에 작은 것들이 끊임없이 뒹굴고 부딪쳤다. 센 바람에 편의점 앞 파라솔 기둥이 흔들리기도 했다. 태풍은 아직 북상 중이었다. 다가오다 관통하고 끝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의미, 이 계절의 의미를 생각했다. 나는 파라솔 아래 플라스틱 의자에 힘을 빼고 앉아 있었다. 그런 채로 감은 눈을 오래 뜨지 않기도 했다. 눈을 뜰 때마다 텅텅, 탁탁, 거리에서 뭔가 부딪쳤다.

선생님, 하는 목소리가 들려 눈을 떴을 때 옆집 남자가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선생님. 맥주를 드시고 계시는군요. 옆집 남자는 검은색 마스크와 이어폰,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나는 이것저것 매달린 옆집 남자의 귀를 살펴봤다. 귓불이 거의 없는 것 같은 저런 귀를 뭐라고 해야 할까. 저렇게 얄팍하고 빈약한. 작기도 작고. 쥐 귀, 칼 귀, 그런 말들을 떠올려보다가 아아. 귀를 뚫지는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뚫기까지 했더라면 더 볼 만했을 텐데. 나는 남자의 귀를 바라보고 있었고, 남자는 나를 또 선생님, 하고 불렀다.

저를 왜 선생님이라고 부르세요? 내가 옆집 남자에게 묻자 그는 웃었다.

저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편해요. 누구든 그렇게 불러요. 남자가 대답했다.

호칭이라는 세계에는 우리가 다 헤아리지 못할 신비와 어려움이 있어요. 남자가 덧붙여 말했다.

칭이라는 세계에서 미묘한 신경전, 과잉, 나를 너무 낮추지 않으면서도 격식을 차릴 수 있는, 흔하지만 귀한 호칭이 선생님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옆집 남자가 자기 생각에 결론을 낸 것 같았다.

그렇군요. 내가 남자에게 대답했다. 나는 그가 날 뭐라 부르든 그렇게 불리기로 했다. 그는 분명히 그만의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만의 생각에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게 날 너무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선생님 오늘은 왜 여기에 나와 계시나요? 카페에 계실 시간 아닌가요? 남자가 내게 묻고, 나는 요즘 카페는 냉방이 너무 심해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대답을 했다.

저도 요즘 통 카페엘 가지 않아요. 옆집 남자가 말했다.

옆집 남자는 이제 카페에 대해 죽 이야기할 것 같았는데, 내 예상이 어느 정도는 맞았다. 옆집 남자는 카페와 관련된, 어쩌면 이 여름과 관련된 이야기였을까.

마지막으로 카페에 다녀온 날이 떠오르네요. 옆집 남자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삶의 여정 속 겪는 다양한 감정을 탐구한 김엄지 작가 소설-1

그 카페에 다녀온 다음부터 제게 일상이 사라졌어요. 선생님은 일상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시간인가요? 어디부터 어디까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일종의, 일정한 기간인가요? 지나고 난 뒤에야 알 수 있는 건가요? 한때는 저도 일상이라는 게 시간이고, 또 그 속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돌아가야 할 일상이 있다고 믿으면서, 돌아가야 할 날이 정확히 몇 월 며칠인지도 모르면서 노력했어요. 잠을 많이 자거나 운동 삼아 걷거나, 누군가와 대화하고 어울려보거나 그런 걸 시도했어요. 그날은 평소보다 일찍 나와 오래 걷다가 카페에 들어갔어요. 비가 올 것 같아서 한 손에 장우산을 들고 긴 산책을 했던 거죠. 카페에 들어갔을 때 아마 11시이거나 12시였을 것 같네요. 그 여자는 제가 들어가기 전부터 거기에 앉아 있었어요. 저는 그 여자 얼굴을 보지는 못했어요. 처음부터 저는 그 여자의 발톱을 봤어요.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여자가 계속 그 자리에 있었고 저도 제가 앉은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어요. 그런 날이 있잖아요. 내가 뭘 보고, 뭘 하는지 잊고서 계속 몰두하는 시간이 있잖아요. 그 여자는 제 앞에 있었는데, 바로 앞은 아니었고요. 3~4미터 즈음 앞에요. 저는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마든지 그 여자를 보지 않는 것처럼 그 여자를 볼 수 있었어요. 그 여자 말고도 여러 발이 보였는데 그 여자만 맨발이었어요. 하얀색 샌들을 신고 있었고 발톱마다 다른 색이 칠해져 있었어요. 아주 빨갛고 노란 그런 색이 아니라 빛바랜 색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그런 부연 광을 내면서 그러니까 반들반들한 돌 같았어요. 발등이 까딱까딱 흔들리면 그 몽돌 같은 발톱도 같이 움직이고 발등은 하얗다기보다 투명한 그런 느낌이었어요. 웃기죠. 사람 살이 투명하다니. 그런데 선생님. 저는 분명히 그 여자 발만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어느 순간이었는지 제 시야에서 사라졌어요. 흰 발등, 흰 샌들 끈, 얇지만 단단해 보이는 발목, 그리고 그 위를 더 보려는데, 사라졌더라고요. 언제 그 여자가 사라진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죠.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에 여자가 재빨리 카페에서 벗어났고, 저는 그 순간을 늦게 알아차린 것뿐이겠지요. 여자가 사라지고 나니 카페에서 더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만 돌아가려 자리에서 일어났지요. 정말 이상한 일은 그때 일어났어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놓은 제 우산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토록 눈에 띄는 파란색 장우산이 감쪽같이 보이질 않았어요. 누가 들고 갔을까요? 게다가 주인이라 짐작되는 사람 바로 옆에 세워둔 것을요. 저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카페 직원에게 다가가 제가 들어온 후부터 지금까지의 CCTV를 열람해줄 것을 요청했어요. 직원은 당황한 것도 같았지만 금방 제 부탁을 들어주었어요. 저와 카페 직원 둘이 CCTV를 확인할 수 있는 모니터 앞에 서 있었고, 그 주위로 모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스쳐 지나갔죠. 아. 그런데 제가 처음부터 빈손이었더라고요. 카페에 입장하는 순간부터요. 빈손으로 카페 유리문을 여는 저를, 제가 확인하고, 제 주위에 모두가 확인했죠. 아무것도 없는데요. 제 오른쪽에 서 있던, 저보다 20센티미터는 커 보이는 카페 직원이 덤덤한 말투로 말했어요. 카페 직원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무슨 눈빛을 주고받는 것 같았어요.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상한 사람이 맞는 거겠죠. CCTV 모니터를 더 볼 것도 없었지만, 저는 뭔가 더 확인하고 싶어서, 조금 더 보겠습니다, 하고 양해를 구했어요. 직원 둘 중 하나가 그렇게 하세요, 말하고는 제 옆에서 멀어졌습니다. 우산은 단 한 번도 모니터 안에 등장하지 않았어요. CCTV는 천장에서 아래를 비추고 있었어요. 테이블, 머리통, 사람들의 티셔츠 색, 그런 것들이 보였어요. 제가 죽 쳐다본 발의 주인인 여자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어요. 화면 속에 제 머리통은 움직이지도 않고 앉은 자리에 가만히 있더군요. 앉아 있는 저는 흔들리지도 않아서 마치 멈춘 화면 같았어요. 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그 모습까지 모니터에서 확인하고. 그 카페에서 나왔어요. 직원들에게 인사를 남기지는 않았어요. 수치심은 없었어요. 수치스러워야 할 상황인 것 같았지만 그보다 우산 생각이 컸어요. 카페에 입장할 때부터 빈손이었다면, 우산은 당연히 제집 신발장 근처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얼른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런데 집 안 어디에서도 그 길고 파란 우산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이상한 걸까요?

솔직히 대답할까요? 내가 옆집 남자에게 되물었다.

네. 솔직히 대답해주세요. 저는 그날 그 카페에 다녀온 후로 혼란스러워요. 이 여름이 다 끝날 때까지 우산을 찾지도 못했고, 365승은 이미 포기했어요. 어떤 날은 흥분이 되도록 회복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건 잠깐의 기분일 뿐이었어요.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내가 그 남자에게 이상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그 남자가 충분히 자신의 착각을 깨달은 모습이었고 게다가 그간의 일들을 정리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나에게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은, 이를테면 내 아버지 같은 경우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이상한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정말 이상한 것은 옆집 남자와 내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왜 지금 이 남자와 마주 보고 앉아 있는가. 낮도 밤도 아닌 이 시간에. 더운 바람과 서늘한 바람이 아무렇게나 불어닥쳤다. 북상 중이라는 태풍의 영향이었다. 옆집 남자가 내게 했던 말 중에, 이 여름이 다 끝날 때까지,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여름이 정말 끝난 것일까? 금방 그칠 것도 같은 힘없는 비가 내렸다.

옆집 남자와 나는 편의점 앞 파라솔 밑에 앉아 있었다. 각자 맥주를 세 캔씩 비웠다. 나는 옆집 남자가 하는 말 중에 365승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듣고 싶었다.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 일이었다. 듣고 싶은 말이 있다니. 근래에 나는 사람이 내는 소리에 몹시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흉내 내는, 혹은 사람이 녹음했을 기계의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소리뿐만 아니라 차가 지나가는 소리, 바람이 부는 소리도 성가셨다. 뭔가 밟히고 깨지고 짓이겨지는 소리들도 불편했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공사 소리나 갑작스럽게 시작되는 사이렌은 더 괴로웠다.

그래서 코인을 그만두셨나요? 내가 옆집 남자에게 물었다.

아니요. 아직 다 빼지 않았어요. 다 빼도 바보 아닌가요? 요즘 같은 시기에. 옆집 남자가 대답했다.

옆집 남자는 말하는 대부분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다가 일순간 맑고 명료한 눈빛이 될 때가 있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라는 말을 할 때 남자는 거의 다른 사람 같았다. 목소리도 달라지는 것 같았다.

선생님, 제가 정말 이상하지 않으세요? 옆집 남자가 눈을 끔뻑거리며 물어왔다.

이상하다기보다 좀 피곤해 보이네요. 내가 대답했다.

선생님. 잘 보셨어요. 피곤해요. 그런데 선생님 혹시 얼마 전에 아버님께 다녀오셨나요? 옆집 남자가 내게 묻고,
네. 내가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며칠 전에 선생님이 복도에서 욕하는 걸 들었어요. 옆집 남자가 말했다.

내가 복도에서, 그랬던가.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남자는 카페에 가져가지도 않은 우산을 찾기 위해 CCTV를 확인했던 전력이 있지 않던가. 내가 뱉은 욕이라는 걸 저 남자는 어떻게 확신하는 걸까. 그러나 내가 복도에서 욕을 했건 안 했건, 대단한 일도 아니었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제가 욕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닌데. 내가 말하자.

네. 잘 알고 있어요. 선생님은 과묵하신 편이죠. 남자가 대꾸했다.

전 다시 돌아가고 싶은 하루가 없어요. 남자가 말했다.

다시 돌아가면 이렇게는 살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거든요. 남자가 말했고.

그런데 어느 때로 돌아가야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리셋도 리셋 나름이잖아요. 남자가 말했다.

살면서 해결된 괴로움은 하나도 없었어요. 해결되고, 지나가고, 극복됐다 여겼던 날들의 실상은 안 좋은 상황이 더 안 좋은 상황에 매몰된 것뿐이었어요. 남자가 말하고, 파라솔 밖에 하늘이 번쩍였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 더 안 좋은 일을 기다리는지도 몰라요. 남자가 손에 쥔 빈 맥주 캔을 찌그러뜨렸다.

어떤 희망도 절망을 이기지는 못해요. 선생님, 그렇죠? 남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처음부터 제가 이렇지는 않았거든요. 이렇게 이상하지는.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선생님께서 제가 이상하지 않다고 하셔서 실망했어요. 남자가 화가 난 얼굴이 되었다.

그냥 솔직히 말씀해주셔도 되는데. 남자는 화가 났다기보다 조금 취기가 오른 것 같았다.

선생님. 제가 맥주를 더 사 올까요? 남자가 내게 물었다.

네. 그러세요. 내가 대답했다.

남자가 플라스틱 의자에서 일어나 편의점 쪽으로 걸었다. 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비틀거리지는 않았지만 팔다리에 긴장감이 풀린 듯 좀 흐느적거렸다. 나는 그가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이 아니라면 지독한 연기 중일 수도 있었다. 자기마저 속이며 여자의 발톱이니 파란 장우산이니 그런 이야기를 꾸미는. 그는 어쩌면 스스로의 우울이나 편집 증세에 도취된 것일 수 있었다. 도취. 그 단어를 떠올리자 이제 그만 이 파라솔에서 떠나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도취 쇼에 동원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전면 유리로 비쳐 보이는 편의점 내부를 쳐다보았다. 옆집 남자 말고도 몇몇이 편의점 진열장 사이사이를 오갔다. 뭘 찾는 것인지 옆집 남자는 편의점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다 잠시 멈춰 서고 다시 분주해지기를 반복했다.

선생님. 오래 기다리셨나요? 옆집 남자는 컵라면 하나와 감자 스낵, 맥주 네 캔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옆집 남자는 새롭게 캔 맥주를 따 마시고 뭔가 기다리는 사람처럼 잠자코 앉아 있었다. 맥주 한 캔을 다 비운 다음에는 말없이 내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옆집 남자는 내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는데, 그 눈빛이 지나친 압박이나 어떤 강요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어떠세요? 그가 속삭이듯이 물었다.

뭐가요? 내가 그에게 되물었다.

선생님 생활은 어떠신지……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아아. 이제 내가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일까. 그런 것 같았다. 옆집 남자가 내 생활에 대해 물어왔으니, 나는 내 생활을 말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놀랐던 일부터, 거의 잊힌 줄 알았던 원망. 하루에 두 번 세 번 느껴지는 극심한 두통과 카페인 중독, 허무한 감정이 가장 대처하기 힘들다는 말까지. 나는 내가 지금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내 이야기를 끝냈을 때 한차례 비가 퍼부은 뒤였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요란했기 때문에 옆집 남자가 내 이야기를 다 들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었다. 편의점의 빛, 그것만이 밝고 옆집 남자와 내 주변은 충분히 어두워져 있었다. 내가 말을 하는 동안에 옆집 남자는 몇 번이고 편의점을 오가며 술을 더 사 왔다. 옆집 남자는 점차 더 취해가는지, 내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맥주 네 캔이나 여섯 캔씩 새로 사 왔다. 옆집 남자는 술을 마실수록 마시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그러나 꼬꾸라질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갑자기 끼어들어 버럭 소리를 지르기는 했었다.

그래서 뭐가 해결됐을까. 저 완전히 취하기 직전인 남자에게 떠든 내 이야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밤이 되었는데.

선생님은 지나치게 설명조예요. 그게 문제인 것 같아요.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옆집 남자가 말했다.

아아. 그런가요. 나는 말했다. 그럴 수 있었다. 나도 옆집 남자만큼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맥주를 마셨고, 끊임없이 설명하려 한 것 같다. 무엇을? 지난 3~4년간 내게 있었던 일과 내 감정에 대해. 왜? 왜 나는 옆집 남자에게 토로하듯 밤이 되도록 떠들었을까. 그건 나도 모른다.

선생님. 누구나 가벼워질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선생님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고요. 선생님 언제라도 현실에서 훌훌 사라지고 싶은 꿈을 갖고 계신 거잖아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모르는 척하고 싶으신 거잖아요? 앞니를 드러내고 거울을 보면 아직 사람 같은 모습이 비춰지겠지만 그래서 선생님은 스스로 괜찮다고 느끼실 지도 모르지만 선생님! 그래서 그게 다인가요? 선생님이 느낀 세상에 절망이? 옆집 남자는 내 이야기에 실망한 듯했다. 실망한 얼굴, 나는 그것과의 대면이 너무 오랜만이라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김엄지 소설가
  • 작가소개

    김엄지소설가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돼지우리」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중편소설 『폭죽무덤』 『겨울장면』, 장편소설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 등을 출간했다. 데뷔 당시 단번에 써내려간 듯한 거친 언어와 술술 읽히는 가독성, 동시대를 그려내는 예리한 감각을 선보이며 가장 주목받는 이십대 작가 중 하나로 급부상했고, 10년 차를 맞던 지난해에는 『폭죽무덤』이 동인문학상 본심 후보작에 선정되며, “그 문체가 스며내는 감각적 느낌만으로도 놀랍다. 감각적 삶의 무기력에 지친 인물의 존재 이유에 질문을 던지고, 그 우울함을 각성하고 벗어나려는 노력이 소설의 후반부를 이룬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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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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