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 후 이야기

모서리에 서다 -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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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까지 와놓고도 그는 책상 앞에 앉는 대신 창가에 오래 서 있었다. 그의 연구실은 부등호 모양의 연구동 건물 가장 안쪽, 모서리에 있어 창가에 서면 옆 연구실 안의 일부가 들여다보였고 그는 이곳으로 연구실을 옮긴 뒤부터 줄곧 한쪽 창에 커튼을 쳐두었다. 언덕을 따라 듬성듬성 들어선 크고작은 건물들이 비스듬하게 눈에 들어왔다. 연구동 건물은 대학의 유서 깊은 건물들 중 하나였지만 새로운 학과들이 개설되고 언덕 아래로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캠퍼스 가장 안쪽으로 밀리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의 학과가 처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었다.

마당에 주차된 건 그의 차 한 대뿐이었다. 방학이었다. 그가 창가에 서 있는 동안 캠퍼스 깊숙한 이곳까지 차는 물론이고 사람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복도 끝의 화장실에 다녀오다 문득 최언 시인의 연구실 문에 붙은 재퇴실 표시가 재실 쪽으로 옮겨져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노크해보았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퇴근하면서 퇴실 쪽으로 화살표를 옮기는 걸 잊은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실 문 앞에서 ‘재퇴실’ 표시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 ‘퇴실’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눈이 내릴 듯 날이 흐렸다. 맞은편 건물의 고벽돌이 물에 젖은 듯 어두워졌다. 낡고 오래된 건물에서 어딘가 모르게 병원 분위기가 났다. 그게 어느 병원이었는지 언제 누가 아파 간 것인지는 떠오르지 않고 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풍경이 자신의 내면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찾아오는 문병객 하나 없는 아이처럼 울고 싶어졌다.

언덕 위로 누군가 종종걸음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마스크로 눈 아래를 가리고 있었지만 중간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헤링본 재킷과 셔츠 위에 받쳐 입은 아가일 니트 조끼까지 영락없는 최언 시인이었다. 코트나 목도리를 걸치지 않은 걸 보니 진작에 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차림새로 최가 다녀올 때라면 빤했다. 그렇다면 차는? 오늘내일한다더니 기어코 퍼져버렸구나, 싶었다. 문득 자신의 어딘가도 기어코 퍼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렇게 퍼져버려도 나쁘지는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낯설어 깜짝 놀랐다.

올해로 금연 9년째였지만 한때 헤비 스모커였던 그는 연구동에서 가장 가까운 흡연 장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가보지는 않았다. 꽤 멀어 쉬는 시간에 담배를 피우러 갔던 최가 뛰듯 강의실로 돌아가는 걸 여러 번 보았다. 흡연 장소가 머니 이참에 담배를 줄일 수 있겠다는 기대와 달리 간 김에 줄담배를 피우게 된다고 투덜대는 것도 들었다. 최의 낯빛과 몸동작으로 밖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는 뭐가 저리 신이 나는가. 차도 퍼져버린 마당에.

주차장에 세워둔 그의 차를 알아보았을 테고 그렇다면 자기 방으로 가는 길에 그에게 들를 게 뻔했다. 곧 최가 방문할 거라는 생각을 하자, 그는 최가 흡연구역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는 동안 바람에 쓸려가고 남았을 담배의 잔향을 떠올렸고 그러자 최의 저 활력이 어쩌면 저 담배 한 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고 싶은 걸 할 자유. 하고 싶은 걸 하는 기쁨.

그는 복도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최는 오지 않았다. 방학에 학교에 나왔으니 최도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리라는 걸 짐작하면서도 서운함과 함께 최가, 최의 담배 한 대가 간절했다.

“김 선생도 알다시피 나는 옛날부터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았지……”

방 안에 있으면서도 없는 척 퇴실로 해두는 누구와는 달리 자신은 언제든 누구든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언제 최 선생의 그 신조가 여자에게서 사람에게로까지 범위를 넓힌 거냐” 고 비아냥대면서 그는 최의 방, 낡은 소파에 앉았다. 학회로 중국에 다녀온 지인이 선물한 차라며 최는 한바탕 수선을 떨었다. 그 바람에 환기를 하지 않아 바닥에 고인 오래 묵은 책과 먼지 냄새가 조금씩 들썩거리면서 비릿한 보이차 향과 섞였다.

“최소한 나는 김 선생 너처럼 편협해지지는 않았다.”

주차된 그의 차를 보고 반가워 연구실까지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퇴실’ 표시는 그 어떤 거부의 “몸짓”보다 강력해서 최는 혹여라도 그가 자신의 발짝 소리를 눈치채고 나와볼까 조심조심 문 앞을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 뭐냐?”

일이 잘 풀렸으면 창가에 서 있었을 리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차까지 두고 온 자신을 봤을 리 없었을 거고, 그가 친히 자신의 방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이었다. 최는 그가 몇 년 전 연재하던 장편을 돌연 중단한 걸 알고 있었다.

“명규야.”

그가 자신의 이름을 그것도 필명이 아닌 본명으로 부르자 최가 긴장했다.

“뭐냐? 뭐냐?”
“명규야……”

뜸이 들이다가 기어코 말하고 말았다.

“나 담배 한 대만 다오.”

담배 끊고 천년만년 살 거냐고, 바로 보름 전까지도 그를 괴롭히던 최였다. 회식 때마다 담배를 권하고 그가 넘어오지 않으면 독한 놈, 무덤에 풀도 안 자랄 놈, 이라고 욕을 하기도 했다. 그런 최가 주춤거리고 있다.

“나야말로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막다른 길에 놓인다. 견고하고 높은, 위압적이기까지 한 그 벽 앞에.”

막다른 벽. 중단한 그의 소설을 최가 찾아 읽었을 리는 없고 그냥 단순한 비유일 텐데 최가 말한 그 벽을 그는 눈으로 본 듯 막막해졌다. 그는 어느 날 막다른 골목에 이른 듯 더 이상 소설을 전개할 수 없었는데, 다름 아닌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이 쫓기고 쫓겨 벼랑 끝으로 몰린 그 장면에서였다. 문제는 퇴로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밤은 깊었고 어둠 속으로 경찰차의 불빛들이 점점 다가오고 개들이 짖는데. 방법이 없었다. 방법이……

물어본다는 걸 잊고 있었다.

“차는? 차는 어쩌고?”

강의 때처럼 시간을 다툴 일도 없고 언제 멈출지 알 수 없는 차를 몰고 오느니 겸사겸사 버스를 타고 왔노라고 최가 말했다. 볕이 좋은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 사람 사는 구경 한참 했다고. 시장에 내려 마약김밥에 오뎅탕으로 요기도 했다고.

역병으로 시장도 타격이 크다는 뉴스를 접했는데, 여전히 시장의 분위기는 살아 있었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웃음이 터지고 떠들썩했다. 튀기고 굽고 찌는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 시장통을 걸어가는 동안 최는 덩달아 흥겨워졌다. 수시로 짐자전거가 지나쳤다. 인도 안쪽에 나물을 다듬어 파는 노인들이 몇 앉아 있었다. 나물이나 쪽파 등을 잘 다듬도록 목장갑의 손가락 끝부분을 일부러 잘라냈는데 흙과 나물 진이 묻은 손가락들이 추위에 곱아 있었다. 모두 팔아봐야 얼마나 손에 쥘까 싶은 양이었다. 그때 한 노인이 불쑥 붉은 플라스틱 소쿠리를 최에게 내밀었다. 놀랍게도 소쿠리 안에든 것은 쑥이었다. 사주어야 하는데 사고 싶었는데, 쑥을 사다 어디에 써야 할지, 혼자 살고 있는 최는 그 방법을 몰랐다. 결국 최는 모르는 척 그 손을 뿌리치고 말았다.

그는 최가 건네는 담배를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가느다랗고 긴 담배였다. 기가 막히게도 이 상황에, 돗대였다. 담뱃갑 속에 한 대의 담배가 일회용 라이터와 함께 들어 있었다. 그가 나오려는데 최가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승호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짜 필 거냐? 피우고 말 거냐?”

문이 닫히면서 최의 말이 멀어졌다.

“승호야 그런데 지금 이 추위에 대한민국 어디에서 쑥이 자라냐? 응? 대체 어디에서, 쑥이……”

연구실에 들러 코트를 걸칠까 생각했지만 그는 그대로 계단을 내려왔다. 현관문을 열자 찬바람이 훅 끼쳐왔다. 그는 폴라의 목 부분을 늘려 턱까지 끌어올렸다. 눈은 오지 않고 그새 사위는 더 어두워졌다. 그는 언덕을 내려가려다가 누군가 부른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5층 모서리 자신의 연구실 창에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커튼에 몸을 가리고 가까스로 얼굴만 내민 채로, 아까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울 듯 말 듯 밖을 내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언제였더라, 누군가의 병문안을 가서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병원 마당에 서서 병실 창문을 올려다보았던 때가. 찌릉찌릉 짐자전거 벨소리가 귓가를 스치면서 그는 화들짝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똑바로 걸어! 새끼야!” 그곳의 시장 사람들은 참을성 없고 억척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라는 새된 여자애의 목소리와 함께 마당의 수돗가에 놓인 알루미늄 세숫대야가 발길에 채어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 그만해, 그만하라고, 나 뚜껑 열리기 전에.”

그 집에는 마당을 공유하는 방들이 모두 여섯 개 있었다. 아버지의 부도로 살던 집을 정리하고 잠깐 옮겨 가 살았던 곳이었다. 아침이면 비좁은 수돗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연령대도 하는 일도 다 달랐다. 학교가 버스로 한 시간 반 거리 이상 멀어졌지만 그는 그 동네의 학교로 전학하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는 학교가 멀어 몸이 힘들다는 핑계로 성적이 떨어지면 안 된다는 약속을 그에게 받아냈다. 아버지가 지방을 떠도는 동안 그 방에서 그는 어머니, 어린 여동생 둘과 함께 이 년 오 개월을 살았다. 일주일 걸러 한 번씩 어느 방의 누군가가 밥상을 엎고 누군가 발버둥 치며 울었다. 잠시 후면 조용한 방 안에서 깨진 그릇들을 쓸어담는 비질 소리가 들렸다. 그와 열 살 차이가 나던 어린 막내가 “야, 나 뚜껑 열린다”라는 말을 배워 따라 하는 바람에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막내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축대 끝은 까마득해서 끝을 보려면 한참 고개를 뒤로 꺾어야 했다. 최가 매일 마주한다는 막다른 벽이 바로 이곳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막막해졌다. 울퉁불퉁한 거친 돌들을 마구잡이로 쌓아올린 듯 축대는 위태롭고 위압적이었다. 돌들 틈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풀이었다. 가뭄에 말라버린 벼 같은 풀들이 그 좁은 틈새에 위태롭게 뿌리를 내렸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창고와 캠퍼스의 경계선인 축대의 비좁은 틈이 흡연 공간이었다. 깨지고 먼지 낀 유리창 안으로 오래 쓰지 않은 뜀틀과 농구대 등이 보였다. 모래를 가득 채워 넣은 커다란 항아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에도 재떨이로 쓰일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창고 벽 아래 먹고 버린 음료 깡통들이 나란히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세모꼴 투입구로 누렇게 변한 담배꽁초들이 비집고 나와 있었다. 청소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최는 이곳에 와 끝이 보이지 않는 축대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불현 최가 사랑하는 시인이 떠올랐다. 최는 고통이 모자르다는 시인의 호통을 떠올리고 시장을 찾았을 것이다. 기획특집, 도둑�은 가난 그후이야기 - 도둑맞은 가난 이어쓰기

하지만 오늘 노인의 쑥이 담긴 소쿠리를 외면하면서 시장을 뛰어나올 때 최는 너무도 부끄러워졌다. 자신은 그 고통을 그 고통의 감각을 잠깐 훔치러 온 사람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시를 쓰는 최가 시인이 말한 그 ‘체취’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이 말한 체취와 육성, 피와 고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얼마 전 그 동네를 다시 떠올린 건 그곳과 가까운 곳에 들어선 국내 유일의 돔구장 때문이었다. 뉴스에서는 악천후 속에서도 경기가 중단될 리 없다고 소개하면서 돔의 지붕이 닫히는 장면을 잠깐 보여주었는데, 천천히 닫히는 돔 지붕과 반대로 그의 머릿속에서는 돔 지붕처럼 천천히 열리고 있는 한 남자애의 머리통이 떠올랐다. “뚜껑 열린다”라고 제 누나에게 엄포를 놓던 남자애였다.

혹시 그 사람인가, 지겹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빼빼 말랐던 그 여자애. 병으로 입원했고 감염의 위험 때문에 그와 친구들은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 선 채 병문안을 대신 했었나. 같은 집에 살던 그 남자애와는 한 학년이라는 이유로 가까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애의 친구들과도 어울리게 되었다. 아이들은 인근 인문계 고등학교와 성적에 맞춰가는 공고와 상고 등에 다니고 있었다. 부모들은 동네 시장과 가까운 공단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어 낮이면 집에는 아이들밖에 없었다. 그때 그의 성적이 잠깐 떨어진 건 학교가 멀어져서만이 아니었다.

그곳을 떠난 뒤에도 일 년에 한두 번 그 동네로 가서 그들과 어울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제 부모처럼 공단의 공장에서 일하거나 작은 사무실의 경리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서 커플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고 그도 그 결혼식에 참석했다. 대학을 휴학하고 군에 다녀오고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동안 잠깐 연락이 끊겼는데 그 애들 중의 하나로부터 연락을 받은 건 그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면서 신문 일면에 사진과 이름이 실린 뒤였다. 그는 오랜만에 그애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그애들 중에도 신문을 구독하고 있는 애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오랜만에 자신이 살던 곳의 호프집에서 아이들을 보았다. 남편이나 아내를, 혹인 연인을 데리고 짝으로 나와 호프집 한 자리를 다 차지했다. 그가 결혼식에도 참석했던 부부는 그새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벌써 다섯 살이라고 했다. 남자애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에게 네가 작가가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잠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는데 누군가 말했다. “그래도 뭐가 될 줄은 알았어. 넌 우리와 달랐거든.”

그때 한쪽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애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고 여자애들 중 하나가 남자애들을 향해 “이 얘기 들었어? 들었어?”라고 물었다. “글쎄 하나가 제 할머니 따라 경로당에 갔는데 경로당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을 손가락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하나가 다섯 살 난, 그 부부의 딸이라는 건 알았다. “그래서 하나가, 하나가 어쨌다고? 응? 응?” 남자애들이 물었고 그도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였지만 뒷말은 다시 여자애들의 웃음 속에 묻혔고 여자애 하나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안 돼, 여기선 안 돼, 승호가 있어서 안 돼.”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그들 중 누구도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 사이 휴대폰이 보급되고 일반 전화가 쓰이지 않게 되면서 그들과의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그렇다 해도 그들 중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그의 전화번호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출판사에 전화를 하면 전화번호 정도는 알려줄 텐데.

그는 담배를 꺼내들어 손가락으로 판판히 가다듬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일 년이었다.일 년만 참으면 의사들이 말하는 완전한 금연인, 10년을 채울 수 있었다. 경로당 할머니들 앞에서 제 엄마를 당황하게 한 하나도 이젠 서른 살이 훌쩍 넘었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였을까, 대체 무슨 이야기였기에 여자애들이 박장대소를 했던 걸까. 무슨 이야기였기에 끝내 자신에게는 비밀로 했던 것일까.

언제 그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날짜를 손꼽았다. 그 애들과 어울리면서도 자신과 그 애들 사이에 거리를 두었다. 꿈이 없는 아이들이 한심했다. 만나지 않아도 그 애들의 미래를 알 수 있었다. 하루하루 그런 날들, 그렇게 흘러갈 날들. 안 돼, 승호가 있어서 안 돼. 앞으로도 그들은 그에게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끝내 하나가 경로당의 할머니들에게 했다는, 웃겨서 눈물이 쏙 빠지는 그 말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그들을 은연중에 따돌렸듯이 그들도 자신을 절대 끼워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한참 꺾고 축대 끝을 올려다보았다. 막막했다. 담배를 든 손끝이 곱아들었다. 그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지만 그는 웃고 떠드는 그애들 틈에 끼지 못했다. 그날 일이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그는 그날처럼 서운해졌다.

커다란 과 패딩을 입고 있어 그는 여학생이라고 생각했다. 교내에서 마주치는 여학생들은 오버사이즈의 ‘과잠’을 입었다. 하지만 끌릴 듯한 패딩 아래로 하얀색 고무장화가 보였다. 교내 식당에 근무하는 조리사인 듯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왔다가 당황한 건 여자 쪽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그를 일별했다. 한 번 보고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파악한 듯했다. 그는 여자가 피식,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에 그는 절대 비쭉 위로 당겨진 여자의 입매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왜 그녀가 피식, 웃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울었는지 열이 나는지 눈꺼풀이 부어 있었다. 그녀는 마스크를 턱으로 끌어내리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참이나 참은 듯 허겁지겁 담배를 빨았고 급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 바람에 콧구멍이 씰룩거렸다. 그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게걸스럽게 담배를 피우는 그 모습에서 그는 오래전 읽었던 소설 속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설 속 그녀는 허겁지겁 풀빵으로 배를 채웠다. 그가 자신을 보는 걸 눈치챘는지 그녀가 휙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모서리의 그 방에서 그러듯이 그는 커튼 뒤로 숨듯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의 등단작은 그 시절에 관한 이야기였다. 겨우 2년 5개월을 살고 다 안다는 듯 그 시절에 대해 썼다.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 바로 그 자신이었다. 매일매일 그곳을 벗어날 날만 기다렸으면서, 비좁은 방 안에서 어머니의 코고는 소리에 매일 뚜껑이 열렸으면서도, 지금 그 시절을 그 시절의 간절함을, 지금은 없는 그 간절함을, 그 가난을 추억하고 있었다.

두 번째 담배는 앞엣것과 달랐다. 첫 담배로 일단 급한 불을 끈 여자는 느릿느릿 담배를 피웠다. 그는 곁눈질로 여자가 내뿜은 연기가 허공으로 떠올라 조금씩 흩어지는 걸 보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방에 있으면서 없는 척 퇴실로 표시해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고. 절대 편협한 사람 아니라고. 편협해지지 않는다고. 그는 쏟아지는 말들을 급히 삼켰다. 대신 소설 속 남자처럼 냅킨으로 풀빵을 싸서 먹듯 조심스럽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김태용 작가 사진

| 작가소개 |

하성란 소설가

장편소설 『식사의 즐거움』 『삿뽀로 여인숙』 『A』, 소설집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여름의 맛』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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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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