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서부의 소도시 델프트의 풍경을 담은 <델프트 풍경>은
운하가 발달한 네덜란드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그린 네덜란드의 대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품 <델프트 풍경>이 없었다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도 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베르메르와 그의 작품에는 과연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일까?
동영상 재생이 안 될 경우 FAQ > 멀티미디어 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베르베르는 ‘델프트의 스핑크스’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한다.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평생 머물며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삶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기에 붙여진 별명이다.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베르메르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뭘까? 이는 사후 20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의 작품이 인정받았기 때문이며, 그가 남긴 작품 수가 고작 35점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작은 단서들만으로 그의 삶을 추정하고 있다.
베르메르의 아버지는 여인숙을 운영하면서 그림을 판매하는 화상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장사가 그리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빚이 잔뜩 남아 있는 여인숙을 베르메르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나고, 가장이 된 베르메르는 이 무렵부터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여인숙을 운영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판매했지만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는 못했다. 당시 화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1년에 100점 정도는 그려야 했는데, 베르메르는 고작 두세 작품을 그리는데 그쳤다.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비싼 재료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베르메르는 가난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베르메르는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지자 장모의 집 근처에 작업실이 있는 3층 규모의 집을 장만한다. 이곳에서 그의 많은 작품들이 탄생하는데, 델프트의 전경을 운하 건너편에서 바라본 <델프트 풍경> 또한 이 무렵에 그려졌다. 하지만 1672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네덜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의 여러 국가들 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고, 이로 인해 베르메르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갑작스런 빈곤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그는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델프트의 수많은 화가들 중 하나로 잊혀지고 있던 베르메르가 다시 부활한 건 200년이 지나서였다. <델프트 풍경>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토레 뷔르거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베르메르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대중에게 소개하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우유를 따르는 여인> 등의 작품들이 뒤늦게 널리 알려지면서 베르메르는 큰 사랑을 받게 된다.
이미지 출처 | gettyimagebank
이미지 출처 | 에디터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