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0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작업실에
영국에서 온 귀족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먼 섬나라의 귀족들이 어떻게 베네치아까지 오게 된 것일까?
당시만 해도 유럽 대륙에 대해 영국은 문화적인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서양 문화의 원천인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것이
귀족 및 지식층의 ‘필수 코스’로 큰 인기를 끌었으니, 이를 ‘그랜드 투어’라 불렀다.
이 투어의 코스 중 하나가 바로 낭만적인 물의 도시, 베네치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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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베네치아로 여행을 온 영국 귀족들 사이에선 베네치아의 풍경을 담은 ‘베두타’가 큰 인기를 끌었다. ‘베두타(Veduta)’는 이탈리아어로 ‘전경(View)’이라는 의미인데, 회화에서는 정밀한 풍경화를 말한다. 영국 귀족들은 그랜드 투어의 추억을 기록하고 자랑하기 위해 베두타를 자신의 집에 걸어두었던 것이다. 이 베두타로 베네치아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누린 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카날레토였다.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카날레토. 그의 아버지 베르나르도 카날은 극장의 무대 배경을 그리는 화가였다. 카날레토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그림을 그렸고, 이를 통해 풍경화의 기초를 습득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 풍경화에 대한 영국인들의 욕구를 알아챈 카날레토는 곧바로 베두타 작업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의 예상대로 풍경화는 큰 인기를 끌면서 주문이 폭주했고, 작업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카날레토는 다시 고민에 빠진다.
카날레토는 그림을 보다 쉽고 빠르게 그리기 위해 ‘카메라 옵스쿠라’를 활용했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사물이나 풍경을 넓은 종이나 유리에 투사시켜 윤곽을 그리는 방법으로, 카날레토는 이를 통해 밑그림을 쉽게 그려나갈 수 있었다. 또한, 이상적인 풍경을 그리기 위해 자와 컴퍼스를 사용하여 건축물과 인물들을 공식에 따라 배치했다. 그 결과 베네치아보다 더 베네치아 같은 풍경화를 완성할 수 있게 된다.
1740년, 카날레토는 뜻밖의 큰 위기를 맞이한다. 유럽의 강대국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여행객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풍경화 주문 역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고, 카날레토는 과감히 고객이 있는 영국으로 향한다. 런던에 도착한 카날레토는 영국의 풍경을 그림에 담았지만, 아쉽게도 베네치아 풍경화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결국 카날레토는 베네치아로 다시 돌아오고, '베두타'의 화려한 시대도 그렇게 저물고 만다.
이미지 출처 | gettyimage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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