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2월,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루앙 시내에서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던 한 중년 남성이 있었다.
이윽고 그는 상점들이 들어선 한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가서
다짜고짜 작업실을 빌려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클로드 모네였다.
그렇다면, 그는 왜 루앙대성당 앞에 위치한 상가 건물 2층에 작업실을 마련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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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파리에서 태어난 모네는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노르망디 지역의 항구 도시인 루아브르로 이사해 어린 시절을 줄곧 그곳에서 보낸다.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던 소년 모네는 마을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그려서 팔곤 했는데, 이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부댕이라는 화가에 의해 본격적으로 그림 수업을 받게 된다. 당시의 화가들은 야외에서 간단한 스케치를 하고, 화실에서 나머지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에 반해 부댕은 야외에서 직접 풍경을 보면서 그리는 작업을 즐겼고, 이는 모네에게 큰 영향을 준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모네는 파리로 유학을 떠나고, 이때 쿠르베, 피사로, 르누아르 등의 동료 화가들을 만난다. 무엇보다 모네의 영원한 모델이자 아내인 카미유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고, 그녀를 모델로 한 작품 ‘초록 드레스의 여인’이 살롱전에서 호평을 받는다. 이후 프랑스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런던으로 피난을 간 모네는 영국 출신의 화가 터너가 그린 풍경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로 돌아온 모네는 어린 시절을 보낸 루아브르의 바닷가에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살롱전에 낙선한 예술가들끼리 뜻을 모아 개최한 전시회에 모네는 루아브르의 바닷가에서 그린 문제의 그림을 전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이었다. 한 비평가가 이를 보고 ‘인상’밖에 없는 작품이라며 전시에 참여한 화가들을 ‘인상주의자들’이라고 비꼬았는데, 이는 훗날 새로운 시대를 이끈 ‘인상주의’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비평가들의 비난은 점차 긍정적인 반응으로 바뀌었고, 모네는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이렇게 자신감을 얻은 모네가 새로운 작품을 그리기 위해 방문한 곳이 바로 그의 형이 살고 있던 루앙이었다. 루앙대성당 앞에 위치한 상가 건물 2층에 작업실을 마련한 모네는 건축물 자체보다는 빛과 공기, 바람, 안개, 온도 등등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루앙대성당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 무려 12개의 캔버스를 작업실에 늘어놓고 그리기에만 열중했다. 결국 모네는 2년에 걸쳐 30여 점의 <루앙대성당> 연작을 완성했고, 이는 모네의 대표작 중 하나로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미지 출처 | gettyimage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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