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4년 10월 16일 저녁,
영국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이 난 곳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던 웨스트민스터 궁전이었다.
엄청난 화재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템스 강 건너편으로 몰려들어 이를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한 노인이 배를 띄워 강 한복판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센 불길에 무너져가는 국회의사당을 지켜보던 노인은 스케치북을 꺼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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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파운드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영국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이자 풍경화의 대가라 불리는 윌리엄 터너는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아들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14세에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한 윌리엄 터너는 27세에 정회원이 되면서 화가로서 성공적인 길을 걷게 된다.
이후 터너는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방식으로 다양한 풍경을 담기 시작했다. 폭풍우가 치는 날에는 자신의 몸을 증기선의 돛대에 묶고, 오랜 시간 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관찰하기도 했다. 그 결과 빛과 색채만으로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현장의 느낌을 생생하게 작품으로 표현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모로 파격적인 터너의 작품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런던에 머물고 있던 터너는 국회의사당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는 배를 빌려 템스 강 한복판으로 가서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무너져 가는 모습을 스케치로 담는다. 그리고 몇 달 후, <불타는 국회의사당, 1834년 10월 16일>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고위층에게도 외면 당했고, 불구경을 하기 위해 몰려나온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는 이유로 화가와 비평가들에게 악평을 들어야 했다.
터너는 자신의 작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들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고, 말년에는 제자나 후계자도 없이 은둔하며 살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런던을 방문한 프랑스 출신의 화가 클로드 모네는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고, 훗날 모네가 발표한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은 인상파가 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미지 출처 | gettyimage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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