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지혜

프랑스의 작은 로마, 아를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소도시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소도시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소도시

1888년, 지치고 우울한 표정의 한 사내가
프랑스의 남부의 조용한 마을, 아를을 찾아온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

네덜란드 출신의 무명 화가였던 고흐는 왜
프랑스 남쪽 끝에 위치한 아를까지 오게 된 것일까?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소도시
  • 이동통신망을 이용하여 영상을 보시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네트워크 상황에 따라 재생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동영상 재생이 안 될 경우 FAQ > 멀티미디어 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소도시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소도시
  • 스물 일곱, 뒤늦은 나이에 선택한 화가의 길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빈센트 반 고흐는 화랑에 취직해 유망한 화상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런던 지사로 파견되어 마주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큰 충격을 받고, 짝사랑했던 하숙집 딸에게 실연까지 당하게 되면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나머지 결국 해고를 당한다. 이후 종교에 심취하지만 광신도적인 기질 때문에 이마저도 거절당하고, 결국 27세가 되어서야 뒤늦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 방황하는 무명 화가의 불안정한 나날들

    고흐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독학을 고집하며 자신만의 그림 그리는 기법을 익혀 간다. 하지만 여러 가지 기행을 일삼으면서 가족과 심하게 다투고,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되면서 결국 고향 네덜란드를 떠나게 된다. 이후 동생 테오가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시야를 넓히지만, 대도시의 방탕한 삶과 우중충한 겨울 날씨에 지친 고흐는 밝은 태양을 찾아 무작정 남쪽으로 향한다.

  • 아를에서 머물며 예술혼을 불태우다

    고향 네덜란드와 비슷한 풍경을 지니고 있는 프로방스 지역의 소도시 아를에 도착한 고흐는 비로소 안정을 취하고, 이곳에서 무려 2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다. 고흐는 아를에서 자신이 꿈꾸었던 화가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자신이 아는 모든 화가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동생 테오의 안정적인 지원을 원했던 고갱 한 사람만이 고흐의 제안에 동의해 아를에 오게 된다.

  • 새드엔딩으로 끝난 두 거장의 만남

    고흐와 고갱은 처음에는 함께 작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친하게 지내지만, 둘에게는 좁힐 수 없는 성격과 작품관의 차이가 존재했다. 결국 큰 다툼 끝에 고흐가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르면서 둘의 관계는 끝이 나고 만다. 이후 고흐의 정신 상태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고, 2년 후 파리 근교의 오베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관람 정보

  • 원형경기장

    이미지 출처 | gettyimagebank

    원형 경기장 les Arènes d'Arles

    프랑스 아를에 위치한 로마식 원형 경기장. 아를은 기원 전 30년경 로마의 아우구스티누스 황제 때부터 프랑스 남부의 주요 도서로 전성기를 누렸는데, 그 시기에 극장과 광장에 이어 이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총 21m의 높이에 출입문이 60여 개나 되는 원형 경기장은 무려 2만1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한다. 고흐가 아를에서 그린 <구경꾼들>이라는 작품을 보면 이 경기장에서 투우를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지금도 부활절 축제 기간에 이 경기장에서는 투우 경기를 개최하고 있다.
  • 콘스탄티누스의 목욕탕 Thermes de Constantin

    이미지 출처 | wikipedia

    콘스탄티누스의 목욕탕 Thermes de Constantin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4세기경에 지은 대형 목욕탕. 당시 로마제국은 방대한 영토를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고, 각 지역을 통치하는 정제와 그를 보좌하는 부제, 총 4명이 권력을 나누어 갖는 사두정치 체제였다. 이때 서로마의 정제였던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후계자로 추대되었고, 콘스탄티누스는 프랑크족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현재의 프랑스 땅인 갈리아 영토를 지켜낸다.

    이 성공을 기반으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을 통일하고 유일한 황제에 오르게 되자, 중요한 본거지인 아를에 시민들을 위한 목욕탕을 건축했던 것이다. 이 목욕탕에는 현대 목욕탕과 같은 급탕 시스템은 물론 냉탕, 온탕, 한증막까지 구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21-02-09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