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새로움을 가져온다. 학생들은 새 학기를 시작하고 회사원들도 새 업무에 적응을 해 나간다.
사람들은 ‘새 학기 증후군’을 겪기도 한다. 영국 워릭 대학교 연구진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새학기 증후군의 주요 요인은 ‘인간관계’이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
새 학기 때 누가 짝이 될까 상상하던 두근거림은 어른이 된 후에도 봄마다 되살아난다.
그런데 친구란 대체 뭘까? 어떻게 하면 친구와 좋은 우정을 쌓을 수 있을까?
“내 더위 사가라!”
옐로우
레드.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더위를 사라니? 지금은 봄이라고.
레드
옐로우. ‘더위팔기’ 몰라? 이건 오래된 풍습이야.
내가 널 불렀을 때 대답을 했지? 그때 내가 “내 더위 사가라.”고 말했으니깐,
넌 내 더위를 산 게 된 거야. 네가 대답을 안 하고 “먼저 더위” 라고 말했으면
오히려 내가 더위를 산 게 됐겠지만 말이야.
옐로우
뭐? 이런 게 전통이라니 이해할 수 없어.
지금도 폭염이 시작되면 전 연령 사망률이 평균 8%가 올라.
하물며 옛날에는 선풍기도 없었잖아. 더위가 그야말로 재앙이던 때라고.
명조실록에 폭염으로 농부들이 파종을 포기하고 기근이 겹쳐
수많은 시체가 구덩이에 가득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으, 상상만 해도….
레드
알지. 옛날에는 더위를 먹어도, 약도 쉽게 구할 수가 없었잖아. 오죽하면 수원의 화성 건축 공사 때에 정조의 지시로 ‘척서단(滌暑丹)’이란 이름의 일사병 방지 약이 특별 지급되었다는 기록이 있겠어? 일반 백성들은 그렇게 지급받지 않으면, 좀처럼 약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단 거라고.
옐로우
그래! 그런데 더위를 사라니! 여름에 나 혼자 고생하라는 거야? 어떻게 친구에게 그럴 수가 있어?
레드
진정해. 엘로우. 난 널 진짜 친구로 생각해서 그런 거야.
옐로우
그게 말이 돼?
레
에헴. 잘 들어. 아리스토텔레스 알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말이야. 그 사람은 우정을 ‘친애 Philia’라고 표현했어. 우정의 대상을 친구뿐만이 아닌, 부부나 선후배 사이, 공동체로까지 확장한 거야.
옐
나도 알아. 친애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 말이지? 먼저 유익성에 근거한 친애. 이건 상대가 유익한 것을 주어야만 지속되지. 그래서 이익이 없어짐과 동시에 친애도 사라져. 두 번째는 즐거움에 근거한 친애. 이건 감정에 의해 쉽게 좌지우지되고, 자신에게 어떤 즐거움이 돌아오는가를 중요하게 여겨. 때문에 상대가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않으면 그 순간 친애는 끝나.
마지막 세 번째! 탁월성에 근거한 친애는 가장 완전한 거지. 내가 좋은 사람이기에 성립하는 친애! 상대가 잘 되기를 바라며, 상대 역시 나와의 친애로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거지. 이 친애는 서로가 좋은 사람인 한 변하지 않고 이어진다고 알고 있어. …이렇게 알고는 있는데, ‘탁월성’이 뭔지 감이 잘 안 잡히긴 해.
레
탁월성은 말이야. 예전에 옐로우 네가, 곤충채집 통에 닫힌 블랙을 구한 적이 있잖아?
옐
아, 그때? 처음에는 블랙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어. 블랙이 힘이 좀 세다고 우리를 얼마나 괴롭혔어? 우리 과자도 빼앗아 먹고. 나를 아령처럼 번쩍 들어올리기도 하고.
옐
그렇지만 나와 블랙은 오래 알고 지냈잖아. 함께 겪은 사건도 많고. 그러니깐 블랙이 장난을 쳐도, 진짜 나를 해칠 마음은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위험할 때에는 나를 도와줄 거라는 것도. 그러니깐 도와준 거지. 게다가 블랙도 그 뒤로 변했어. 못된 장난도 안 치고. 내 얼굴을 본떠서 나무 조각상도 만들어 줬다니깐.
레
그게 바로 ‘탁월성’ 이야. ‘탁월성’은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좋은 친구로 행동하면 상대방 역시 좋은 친구가 된다는 거거든. 그를 위해 필요한 건 깊이 있는 사귐과 인격적 친밀성이야. 믿음을 쌓을 수 있는 지속적인 교류가 있어야, 진정한 친애를 형성할 수 있다는 거지.
옐
한마디로 내가 좋은 친구라서 블랙을 좋은 친구로 만들었다는 거군. 으쓱해지는데? 그런데 친애와 ‘더위팔기’는 대체 무슨 상관인 거야?
레
자자. 서두르지 말고 잘 들어 봐. 먼저 친애의 세 가지 특징!
순수성!
친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잘 되기를 바란다.
상호성!
이러한 바람이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어야 한다.
인지성!
서로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레
‘더위팔기’는 이 친애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행위라고.
옐
레드. 억지 부리지 마. 어떻게 ‘더위팔기’가 친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행위일 수 있어?
레
옛날에 폭염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었어. 그건 귀신이 불러온 재앙이었고, 하늘이 성을 내어 내리는 벌이었다고. 그래서 비가 안 오면 신에게 비를 내려 달라고 비는 기우제도 지냈던 거야. 더위를 먹는 것도, 귀신이 한 짓이라 여겼지. 이 ‘더위팔기’는 원래 정월 대보름날에 하는 거야. 봄에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은 좋은 기운이 가득하다고 믿었거든. 그 날, 더위를 사고파는 ‘거래 가능한 물건’처럼 만드는 놀이를 한 거야. 아이의 이름을 개똥이, 쇠똥이 등으로 부르고 “그놈 못생겼다.”라고 말해야 귀신이 아이를 천하게 여겨 무병장수한다고 여겼던 것과 같은 이유지.
옐
아하. 그러니깐 더위를 판 사람은, 사실은 더위를 산 사람이 여름동안 큰 병을 앓지 않기를 바란다는 거로군. 그날 산 더위를 타는 건 귀신의 짓이 아닌 게 되니깐, 인간의 힘으로 치료 가능하다 이거구나.
레
그렇지! 친구가 큰 병을 앓지 않기를 바라고, 친구끼리 서로 이름을 부르니 상호적이고, 명절 때마다 행해져 왔으니깐 모두가 그 마음을 알고 있다고. 어때? 완벽한 친애적 행동이지? 그러니 내가 너에게 더위를 판 것도, 다 너를 위해서란 이야기지.
옐
…분명히 맞는 말인데 왜 찝찝하지?
레
찝찝하긴. 우리 블랙에게 더위 팔러 가자. 블랙에게도 우리의 우정을 나눠줘야지.
레
좋았어! 가자!